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청주 표충사

하늘타리. 2010. 6. 14. 23:49

 

청주 우암초등학교에서 수암골로 가는 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물을 만났습니다.

 

표충사

 

아! 청주 표충사가 이곳에 있었군요.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대항하다 순절하신 세분의 장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지요.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려 했는데

 

출입 가능한 모든 곳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습니다.

 

도 지정 문화재의 공통적인 사항이지요.

시에서 몇 년에 한번 적게는 몇 천만 원 많게는 몇억내외를 보수 및 정비하는 데 쓰지만

관리인이 없으니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꽁꽁 잠구어둡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관리인을 둘 수도 없고

 

말이야 하기 쉬워서 방문하려면 어디로 연락하라 하지만

개인자격으로 다니는 사람은 그게 쉽지 않지요.

 

그러니

점점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그들만의 박제된 문화재가 되어 가는 겁니다.

 

이 작은 키에 밖에서 기웃기웃 합니다.

 

 

이인좌의 난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러이 죽고

노론의 힘을 입은 숙빈 최씨(일명 무수리 최씨)의 아들 영인군이 즉위하게 되지요.

영조입니다.

이에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 영조는 숙종의 씨가 아니다라고 하여

소론과 남인의 연합군이 '경종의 복수와 역적의 토멸을 표방하며

경종이 애초에 세자로 입양하기로 했던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옹립하고

전국 각지에서의 궐기를 호소합니다.

 

이런 것을 알았는지 어쨓는지 영조는 본인이 즉위하는데 힘이 되어줬던 노론을 멀리하고

소론과 남인세력을 정권에 등용합니다.

그렇지만 영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론 과격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지요.

 

반란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납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반란은 진압되었고

진압에 성공한 관군이 도성으로 환군할 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진압군을 영접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숙종의 씨가 아니라는 기록은 꽤 많이 있습니다.

 

요새 동이라는 드라마를 한다는 데.....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숙종 때 무수리 최씨, 즉 영조의 생모에 관한 이야기가 드라마의 핵심이랍니다.

 

숙빈 최씨가 천한 무수리의 신분에서 숙종의 눈에 든 것은

수문록을 보면,

폐출된 인현왕후 탄신일에 성찬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다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론과 서인 세력이 숙빈 최씨를 숙종의 눈에 띌 수 있게 만든 계략이었을 거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그렇게 숙빈 최씨를 이용하여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것이겠지요.

 

역사에 있어 아직도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은데요.

어느 글 에서는 숙종이 영조를 꺼려한 것은

그의 어머니 최씨가 궁중 나인들의 빨래를 해주는 무수리였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관계를 가진 뒤에야 알게 된 것으로,

최씨는 처녀가 아니라 남편이 갓 죽은 과부였다고 하고

숙종은 영인군이 자기의 친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가 아닐까 의심했다 합니다.

 

기록을 보아도 1693년 4월 23일 성은을 받은 숙빈 최씨는

첫째 아들을 10월 6일에 낳았는데요.

관계를 맺은 지 대략 5개월만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인 12월 13일에 갑작스레 사망합니다.

그리고 1694년 9월 13일에 연잉군(영조)가 태어나는데요.

이것 역시 아이를 밴 날짜를 거꾸로 세어보면, 첫아이가 사망할 때쯤 바로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 무렵에 숙종은 숙빈 최씨와 관계한 바가 없답니다.

그래서 첫아이의 죽음으로 위협을 느낀 숙빈 최씨가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자기를 잘 돌보아주던 노론의 핵심 김춘택과 관계를 하였고 연잉군은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죠

 

사실 영조는 자기가 무수리의 아들이고

경종의 친아들이 아닐 수 도 있다는 자격지심에

무한한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

자기 아들조차 뒤주 속에 가두어 죽여버리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고

영조의 후손 정조가 죽은 뒤에

민중들 사이에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미치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더니 그 손자 정조도 독살당했다는

말이 꽤나 널리 퍼져 있었다 합니다.

 

 

 

청주 표충사, 일명 삼충사를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다 보니

막상 이곳에 배향되어 있는 충청병사 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의 충절은 이야기 하지 않고

애꿎은 동이 이야기만 했네요. 

 

이 건물은 영조 7년(1731)에 청주읍성 북문 밖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되었다 합니다.

1939년 도시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 처마 맞배지붕의 사당과 삼문으로 되어있다고

외관만을 보고 드리고 글을 마칩니다.

 

 


 Henryk Wieniawski - Souvenir de Moscou for violin & piano, O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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