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을까?
대다수 학자들은
지금부터 4만년전이전 그러니까 중기고석기시대이후부터라고 하네요.
그 근거로 빌레못동굴 동물뼈를 들지요.
작년 7월의 빌레못과 빌레못굴
그 의견에 의하면 그때는 제주도가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규슈지역까지 연륙되어 있었다합니다.
왜냐? 갈색곰은 유라시아 북반구에 분포하고 있는 곰으로 그 뼈가 나왔다는 것은 중기홍적세시기에는 제주도가 육지에 연결되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빌레못동굴에서 나온 것처럼 갈색곰도 잡아먹고 곽지패총에서 나온 것처럼 대륙사슴도 잡아먹고 멧돼지도 잡아먹고 했다네요.
4만년전이라 하면 지질학쪽에서 말하는 120만년전에 기저현무암이 바닷속에서 분출해서(용머리 응회암속 현무암, 단산형성)
120만에서 70만년전사이에 서귀포층이 퇴적하고(산방산 용암돔형성)
70만에서 30만년전사이에 열하분출화산활동으로 용암대지형성, 현재와 같은 제주도 해안선의 모양을 갖추고
30만에서 10만년전사이에 한라산체가 형성되고
10만에서 2만5000년전사이 후속 화산활동 및 한라산체 형성(한라산 백록담 조면암의 연도 2만 5000년전)
그리고 1002년과 1007년 화산 활동이 군산과 비양도를 만들었다 는 것을 참고하면 좀 차이가 있지요.
하여간 약 1만2000년전에 빙하기가 끝납니다.
70만년전부터 그때가지 이어가던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이제 중석기시대가 도래합니다.
이때부터 제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라고 천지연 생수궤에서 발견한 토기류를 근거로 이야기 합니다.
고산리유적을 아세요
물론 지금은 덩그러니 안내판 하나 뿐이 없지만 우리나라 육지부와 종류가 다른 신석기유적이 다량 출토된 곳입니다.
(금년 3월 당산봉에서 본 고산 유적지)
1700여개의 이르는 화살촉이 발견되었죠.
육지부의 신석기 유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토기를 포함한 농경용도구입니다만
제주도에서는 구석기때 들고다니던 돌도끼가 아닌 여우,토끼,노루같은 발빠른 짐승을 잡기 쉽게 변형된 사냥도구입니다.
그러니까설라므내
육지부에서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되었을 때에도
제주에서는 중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생수궤와 같은 용암동굴 또는 바위그늘집에 살면서 수렵과 채집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라산정을 제외한 해발 300미터이내의 광활한 벌판, 나지막한 언덕, 잡목숲, 따뜻한 기후조건이 제공하는
풍부한 나무열매, 화산섬주변 풍부한 어산물,맹수는 없고 멧돼지,사슴,노루등의 동물상, 이것들이 제주인들에게 풍부한 식량창고를 제공하는데
궂이 농경을 할 필요도 없었고 지질구조자체가 농경에 적합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중석기시대 생수궤의 생활방식이 북촌리 바위그늘집시기까지 이어져 왔을 겁니다.
실제로 북촌리유적 바닥에서는 다량의 패류와 함께, 동물뼈, 산초로 추정되는 열매가 다량 발견되었답니다.
자 드디어 북촌리 고두기엉덕 바위그늘집자리입니다.
계절적인 임시주거지 였을거라 하는데
그것보다는 그 때까지 제주의 선사인이 어딘가 정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렵과 채취를 위한 이동간 거주한 주거지라고하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덧없는 세월이 지나듯 덧나무에서 꽃이 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덧이 아니고 덧붙인다 할때 덧이지요.
그래서 한자이름도 접골목. 뼈가 부러졌을때 부목으로 쓰면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분이 뼈를 잘 붙게 한답니다.
궤네기굴
기원전 5세기에서 1세기사이에 사람이 거주하던 유적이랍니다.
사실 신당으로 더 유명하자요
본풀이에 의하면
궤네깃또는 알송당 소로소천국과 웃송당 백주또의 열여섯번째 아들입니다.
밭을 갈던 소를 잡아먹어버린 일로 어머니 백주또와 따로 지내고 있던 아버지 소로소천국은
자기를 처음 찾아온 어린 아들이 버릇없이 자신의 삼각 수염을 뽑자, 화가 난 나머지 무쇠 철갑에 가두어 동해 바다에 띄워 버렸다 하네요.
동해 바다를 칠년이나 떠다니던 무쇠철갑은 용왕국의 산호가지에 가서 걸렸고,
용왕의 눈에 들어 셋째 딸과 혼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먹성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백일이 지나기도 전에 용왕국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네요.
용왕은 하는 수 없이 용왕 패도선(용궁과 지상을 오가는 배)을 내어주고 사위와 셋째 딸을 용왕국에서 떠나게 했답니다.
용왕 패도선을 타고 강남 천자국에 닿은 후 그곳 천자의 부탁을 받아 머리 아홉 돋은 장군의 목을 베어 변란을 진압하였고
고향도 그립고 부모도 보고싶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장성하여 돌아온 자신을 두려워하여 도망가다 그 아비가 죽기까지 하자,
낙담한 나머지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서 용왕국 셋째 딸애기는 대부인을 삼고 한라산 단 딸애기는 소부인을 삼아 좌정했는데.......
마침 김녕 큰당 한집이 한라산에 올라와 치성을 드리자,
산을 내려와 김녕 입산봉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자 화가 나서 풍운조화를 부렸고,
이에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극진히 모시니 화를 풀고 궤네기굴에 좌정하여 치병과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며 돗제를 받았다 합니다.
현재는 궤네기동굴이 유적지로 지정되어 출입을 할 수가 없으니 어디서 어떻게 그 큰배를 달래고 계실까 걱정됩니다.
종달리패총입니다.
철기시대에서 탐라시대전기로 이어지는 두개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조개무지로 알고있던 곳에서 옛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발굴의 결과로 종달리는 대촌(용담삼양일대), 곽지, 화순과 더블어 탐라전기거점마을의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본게 없네요.
황근을 심으려고 뒤집어놓은 흙속에서 언제적 것인지 모르는 조개파편을 보고옵니다.
온평리 혼인지동굴입니다.
저는 감히 이자리를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현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부터 내식으로 해설을 합니다.
이름하여 하늘타리의 스토리텔링..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만들어 놓고 주므르고 계시던 시절...
삼신인이 穴에서 홀연히 등장합니다.
구멍 즉 사람의 구멍 그러니까 어느여인의 몸에서 나온겁니다.
이들에게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한여인의 몸에서 나오지만 성이 각각입니다. 아직은 모계사회라는 겁니다.
이무렵 설문대할망이 홀연히 사라집니다.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고도 하고, 그 아들 오백명의 죽을 끓이다 죽그릇에 빠져 죽었다고도 합니다.
하여간 죽는 것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죽가마 맨밑에 있는 뼈를 어머니의 뼈라고 믿은 오백아들 중 499명은 그 자리에서 울며 돌이 됩니다. (막내는 차귀도로 가지요)
이들이 흘린 피눈물이 한라산철쭉이 되어 피어났고 그래서 한라산은 철쭉이 필때까지 눈으로 덮힌 소복을 벗지 않습니다.
설문대 할망도 사라지고 오백장군도 없는 그 무주공산에서 세명의 을나는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장성하여 짝을 얻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때맞추어 벽랑국에서 세공주가 오곡의 씨앗과 소와 말을 데리고 황루알로 옵니다.
이를 맞이하여 혼인지에서 혼사를 치르고 그 옆 용암동굴에서 첫날밤을 치룹니다. 이때까지 혈거형태를 유지했다는 거지요.
장가도 갔으니 이제 떨어져 살아야 겠습니다. 가부장제의 시작입니다.
살쏜장오리에 가서 화살을 날립니다.
화살이 떨어진 자리, 일도,이도,삼도에 터를 잡습니다.
부락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정주형태의 움집이 출현합니다.
그 터에 오곡의 씨앗을 뿌립니다. 농경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고을나가 일대의 부족을 통합하여 왕이 됩니다.
탐라역사의 시작입니다.
이하 생략합니다.
진수의 삼국지에 보면 탐라이전에 주호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사실 탐라는 주호이후의 이름인데 주호, 탐모라, 탁라 이런 이름의 시기도 통상 탐라전기에 집어 넣는 학자도 많아서 나도 거기에 따랐습니다.
설명이 복잡하면 지식의 깊이가 탄로나기 때문이지요.
婚姻祉 婚姻池에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습니다.
덩달아서 우렁쉥이알도 분홍으로 곱게 단장을 합니다 .
하지만 너무 색이 밝아서 주변과 조화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눈에 띄어 쇠백로가 와서 잡아먹어 버립니다.
아니 거꾸로 말합시다.
알에서 부화하기전에 너무 많이 잡아 먹히니까 잡아먹히기전 한때라도 화려하게 보내고 싶은가 봅니다.
한때를 화려하게 살고가신 분이 여기 또 있습니다.
점필제 김종직.
조의제문이 단초가 된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하였지만 후에 신원되었죠
살아계시던 어느시기 누군가에게 혼인지설화를 듣고 남긴 시 한수가 비석에 서있습니다.
신천리 마장굴입니다.
고,양,부 삼을나의 세상이 펼쳐집니다만
아직까지 이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신천리 마장굴과 같은 곳에서 생활하면서 수렵과 채집을 계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굴에서의 출토된 유물은 신석기전기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혼재해 있었다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유적이라 합니다.
여러시기에 걸친 주거층, 탐라시대 패총, 동굴함몰부를 주거형태로 채택한 것,
용암동굴자체의 학술적 가치등을 고려하여 도로를 우회하여 달라고 했으나 그냥 밀어버려서 동굴함몰부 일부가 도로에 깔려버렸지요.
동굴입구가 온전한데에 위안을 가져야 겠지요.
동굴이 연결된 또다른 출입구 또는 함몰구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굴 모두를 조랭이굴이라 부릅니다.
추정 해안출구 및 암맥류
이 암맥류에 얽힌 전설하나
이곳이 바로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해서 '용궁올레'라 불리는 곳입니다.
평소에도 수심이 깊고 위험해서 해녀들도 접근하지 않았다합니다.
그런데 평소 대담하기로 소문난 상군 해녀 송씨가
이곳에서 물질을 하다가 남해용궁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으나 '내가 죽으면 늙은 부모를 공양할 이가 없다'는 말에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녀 송씨가 물밖으로 나오자
바닷속에서 칼을 거꾸로 세운 것같은 바위들이 솟아올라
남해용궁으로 다시는 인간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았다고 하니
이곳이 바로 '칼을 세워놓은 다리'라는 뜻의 '칼선도리'입니다
해안출구위 신천목장초지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넓적한 큰바위가 있습니다.
고인돌로 추정하는 이유는 주변에서 곽지리식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지석도 없고 바위밑에 석곽도 없고 해서 인정은 못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주변에 어디선가 비슷한 돌 두개를 더 갔다놓고 나무를 심어 조경을 하고 있습니다.
팔운석
고망난돌이 바라보이는 곳 암석에 팔운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구름이 저 구멍을 통해 드나든다고 해서
김상헌은 그의 남사록에 팔운석이라 기록해 놓았습니다 .
그 기록을 따와
소암 현중화 선생이 생전에 관심과 애정으로 만들고 지도했던 소묵회회원들이 소암 선생님의 글씨체로 새겼습니다.
또다른 소암선생님의 글씨한번 보실래요.
말년 꼬냑한병 글씨한장 시절에 쓰신 거라서 내용이 그럴듯 합니다.
醉是僊 : 취하면 신선이 된다는 거지요.
새덕님 과일주 두잔에 취한 나도 신선된 기분으로 팔운석을 한바퀴 돕니다.
구름을 불러내지는 못하는군요.
한잔 더 먹었어야 했는데...쩝..
용머리
아무리 용을 써도 몸채가 뽑아져 나오질 않아서 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냥 이 바다에서 울고 있습니다.
신산리 고인돌입니다.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으니 당연히 동서로 트여있지요.
육지에서는 고인돌이 청동기시대 유적이라 하지만 제주에서는 주로 철기시대에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합니다.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묘실이 지상에 있는게 육지부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묘실이 지하에 있는 것은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합니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주의 고인돌은 모두 남방식이라고 하는데 가파도 고인돌은 탁자나 책상 형태의 북방식이라 합니다.
게다가 별자리를 그린 암각화인 성혈도 확인돼 높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인정받는 다 해야 최초조사간에는 130기가 가파도 전역에 있고 이중 절반만이 제자리에 있다했는데
이번 청보리축제때 가보니까 섬을 소개할 때 56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하니 또 그렇게 그렇게 없어져 가나 봅니다.
신례리 고인돌입니다.
너븐돌고인돌
상석의 윗부분과 옆면에 채흔이 뚜렸하다 하고 네귀퉁이에 흠줄흔적이 있다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원래 모르면 봐도 모르죠
출토유물은 공이돌과 적갈색토기몸통파편으로 탐라시대 전기에 해당된다합니다.
우뜬모르고인돌
상석주변으로 타원형의 적석부를 만들어 내부중앙에 석곽을 넣어 시신을 안치한후 지석을 고이고 상석을 얹어 수평을 맞춘후
테두리는 큰 할석을 정연하게 둘러 마무리 한 도내에서 보기드믄 유형이라 합니다.
산에서 떼어낸 큰 돌을 현장으로 가져오면 쓸 수 있는 용도에 맞게 쐐기를 박아 割石을 합니다.
할석이라는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결과 절리를 따라서 해야 하는데 현무암은 그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고인돌 주변에서 1~3세기의 탐라시대전기토기들이 발견되었다 하는데
이 토기가 쓰일 때는 이미 육지부에서는 고인돌이 사라진 시기라고 하여 제주에서는 고인돌이 육지보다 늦게 만들어 졌다고 추정한답니다.
지서모르고인돌
고인돌로 추정되나 고인돌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서모르라는 지명이 지석모르가 변음된 것일것이라는 추측과 넓은 돌의 형태가 고인돌과 유사하여 주변을 발굴하였으나
지석으로 볼만한 석재나 유물이 없다 합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하나
이 고인돌에 누가 묻혔을까요?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당연히 부족장이나 그 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높은 사람일 것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모여있는 고인돌 무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전북 고창 매산 마을 산기슭 고인돌은 동서로 1.5km까지 이어져 있는데, 그 곳만 해도 고인돌이 한 1000개 남짓 몰려 있거든요.
어느 것은 아주 작고, 어느 것은 좀 크고, 또 어떤 것은 아주 크고. 이런 고인돌 무더기를 보면, 고인돌이 다 족장의 무덤일 리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남 화순이나 가파도 고인돌 무리를 보아도 그 곳에 함께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의 공동 묘지가 아니었나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족장도, 어린아이도, 여자도, 남자도 모두 거기에 묻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야말로 누구한테나 평등한 공동 묘지였다는 겁니다.
더구나 누가 죽으면 모두 힘을 합쳐 무덤을 써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작은 무덤이라 할지라도 힘을 합쳐야 쓸 수 있으니까요.
신례2리 조물꼭지궤 바위그늘집자리입니다.
흔히 계곡에 있는 하천 급류에 의한 침식과 풍식에 의한 자연동굴입니다.
그런데 바위그늘집자리여부를 알기위한 시굴에서 곽지조개무지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적갈색토기편이 발견되었답니다.
이것은 서기300년이 되기 전 것이라 하고요
그위에 조선시대것으로 판단되는 도기와 자기층이 덮혀 있었답니다.
그래서 일반 동굴에서 유적으로 승격이 되었습니다만
관리면에서는 특별한 것이 없네요.
돌아오는 길 월라봉기슭에 들렀습니다.
효돈동 삼호석이 서있습니다.
다시 여신이 제주를 지키던 시절로 돌아온것 같네요
왜냐구요?
한 바위는 절앞에서 끝부분만 보이니 모르겠지만
두 바위중 하나는 구덕찬 여인, 또 하나는 애기엎은(안은) 여인의 모습입니다.
삼호석 그러니까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 셋 중 둘이 여인의 모습인걸 보니 여신이 제주를 지키던 시절이 그래도 제주의 태평성대였나봅니다.
서귀포지경을 빠져나오며 서귀포쪽을 살펴주시는 하로산또에게 인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제주이야기 > 한라산 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 전시장 (0) | 2010.05.18 |
---|---|
교래 곶자왈 (0) | 2010.05.17 |
비석거리...비석치기 (0) | 2010.05.06 |
곤을동 (0) | 2010.04.30 |
도툴굴과 목시물굴 (0) | 2010.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