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동백꽃, 지다
어머니는 뒤뜰의 동백나무를 잘라버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뎅겅 죽어버린 아버지 생각에
동백꽃보다 붉은 눈물을 흘리며
동백나무의 등걸을 자르셨지요.
계절은 빠르게 봄을 횡단(橫斷)하는데,
끊임없이 꽃을 떨구는 동백,
붉은 눈물 떨구는 어머니, 동백꽃
목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중략)..
봄이었구요,
아직도 한라산 자락에 잔설(殘雪)이 남은 4월이었구요.
글 변종태
그림 강요배 (동백꽃지다)
......................
4월이 갑니다.
올해가 4.3 발생 60년..
아직도 제주어 그대로 속솜하고 있습니다.
4월을 보내며 4월의 첫머리에 있는 4.3을 추념하며
도툴굴/반못굴과 목시물굴을 둘러 봅니다.
도툴굴/반못굴입니다.
도툴굴(반못굴)
" 선흘리 초토화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했다가 희생당한 곳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탔다.
일부 주민들은 함덕, 조천 등지의 해안마을로 피난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선흘곶에 있는 이곳 도툴굴과 인근 목시물굴 등지에 분산해 숨어 살았다.
우마와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갈 수 없었던 주민들은 ‘며칠만 숨어 있으면 사태가 끝나겠지’하는 생각으로
마을과 가까운 천연의 피신처인 선흘곶의 동굴로 임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소박한 주민들의 바램은 처참한 피해로 다가왔다.
도툴굴에 숨어지낸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 굴이 토벌대에 발각된 것이다.
도툴굴엔 젊은 청년들 중심으로 25명 정도 숨어 있었다.
그날 선흘곶 주위를 포위해 사방을 감시하던 군인들은 마침 굴을 나와있었던 주민 1명을 붙잡아 마을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대라고 윽박질렀다.
죽이겠다는 위협 앞에 그 굴의 위치는 알려졌고, 함덕 주둔 군인들은 바로 그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군인들의 총격으로 굴 안에서 희생됐다.
혼비백산 한 청년들은 총을 쏘며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모두 체포됐다.
그 과정에서 안모씨는 굴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버려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밖으로 끌려나온 주민들의 일부는 도툴굴 인근에서 곧바로 총살됐다. "
(제주4.3유적 1권 중에서...제주 4.3연구소 발간)
중간에 첨언하는 곁가지 하나 : 나이 아주 많으신 몇몇 분은
지금 반못굴/도틀굴이라 하여 철조망으로 꽁꽁 싸둔곳은 반못굴도 도툴굴도 아니라 합니다.
도툴굴은 표지판 북쪽 곶자왈 안에 있고(이 입구를 아시는 분도 몇 있고 그 분들은 반못굴의 또 다른 출구라 알고 계십니다만
도툴굴에 또 다른 출구가 있다는 증언은 없습니다.
반못굴은 현재 철조망으로 쌓여 있는 굴 남쪽 농장 철조망 너머 빌레밑에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음식해먹은 흔적과 깨진 그릇등이 여기서 나왔다 합니다.
작년 8월에 찍은 사진
그럼 지금 반못굴 또는 도툴굴이라 하는데는 무엇이냐고요?
굴 입구 바로 밑에 맑은 물이 있어서 선녀물궤라하여 이 물길을 따라가면 만장굴 나온다 하면서 식수로 사용하던 곳이랍니다.
전문가들이 탐사했을때도 입구를 들어서자
굴입구 바로 밑 까지 맑은 물이 고여 있었고
깊이는 1에서 2미터,
길이는 20미터로 막혀 있다 했다는데
왜 선녀물궤를 꽁꽁싸놓고
반못굴/도툴굴이라 하면서 당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답니다.
도틀굴 /반못굴이라 불리우는 굴 옆에 있는
반못
뒤에는 바메기
쇠백로..
반대쪽..
여기는 식수
여기는 설겆이와 빨래
다시 목시물굴
들어서는 초입에 있는 거욱대
선흘리 초토화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했다가 희생당한 곳입니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탄 이후 선흘리민들은 선흘곶 일대의 곶자왈과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는데
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른 곳입니다.
"1948년 11월 25일 목시물굴에서 1㎞ 남짓 동쪽에 이웃에 있던 도툴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목시물굴의 존재를 토해냈다.
1월 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날 도툴굴에서의 희생소식을 이 날 아침에야 감지한 주민들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더러는 식사준비를 하던 중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토벌대는 선흘곶을 향해 박격포를 쏘며 묵시물굴로 향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목시물굴로 들어갔다. 일부는 인근 숲속으로 뛰었다.
목시물굴은 도툴굴보다 작은 굴이지만 200여명 이상 대부분의 선흘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이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음이 뻔한 것을 안 주민들은 버텼다.
결국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이 모여지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굴 밖에는 총살당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한아무개도 현장에서 총살됐다.
이 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40여명이다.
군인들은 총살에서 제외된 주민들을 GMC 차량에 태우고 함덕 대대본부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고문을 받고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인근 대섭이굴과 벤뱅듸굴 등을 안내한 후 총살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억물에서도 15명 이상이 집단학살 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제주 4.3유적1권 중에서..제주4.3연구소 발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숨막힐 듯 하여
돌아 나갑니다.
굴밖 움막터
주변이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 때문에 식사등 대부분의 생활은 주로 밖에서 했답니다.
이 광풍이 지나고 태어났을 먼나무
생달나무
목시물굴 또 다른 출입구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약 100m 정도 됩니다.
이쪽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누워서 들어갈 정도입니다.
돌아 갑니다.
서경식 도코 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4.3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알지 못해도 되는 사건이 아니며 알 필요가 없는 사건도 아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강요배 화백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보리) 추천의 말에서 ...
스쳐 지나간 초입에 있는 참가시나무를 한번 쓰다듬어 주며
잘 지내라고 하고
산이와 죽은이 모두의 해원상생을 기원하며
오늘을 마무리 합니다.
Frederic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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