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 비석거리 앞을 지납니다.
제주의 마을을 다니다 보면 마을의 옛 중심지에 마을과 관련된 공덕을 남기신 분들의 공덕비가 몇개씩 서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나 이곳 화북은 일제때 건입포가 확장개설되기 전까지는 제주목사나 판관들이 이 곳을 거쳐 오거나 가던 곳입니다.
그래서 지방관들의 이임이 결정되면 마을에서 자진해서 혹은 아전들이 시켜서 이임시기에 맞추어 화북포구까지 가는 길 연변에 송덕비를 세웠다 합니다.
떠나는 지방관들은 자신의 공적이 미화, 과시되어 있으니 흐믓해 했겠죠.
그래서 그런지 화북성 여기저기에 13개나 되는 송덕비들이 흩어져 있어서 언젠가 지금의 이거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하나씩 보시지요
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碑 : 1818년(순조 18) 윤구동 목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牧使李公源達恤民善政碑 : 1840년(헌종 6) 이원달 목사의 구휼에 대한 선정비.
牧使李公玄功恤民善政碑 : 1853년(철종 4) 이현공 목사의 구휼을 기리는 선정비.
牧使白公希洙恤民善政碑 : 1854년(철종 5) 백희수 목사의 구휼을 기리는 선정비
牧使具公載龍恤民去思碑 : 1839년(헌종 5) 3월 ~ 1841(헌종 7) 윤 3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한 구재룡 목사를 추모하여 세운 비.
牧使洪公圭去思碑 : 1887년(고종 24) 4월 홍규목사를 기리며 세운 비
牧使沈相演淸德碑
牧使張公寅植恤民善政碑 : 1848년(헌종 14) 3월 ~ 1850년(철종 1) 6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한 장인식 목사의 제주민 구휼을 기리는 선정비
牧使任公憲大去思碑 : 1862년(철종 13) 2월 ~ 1862년(철종 13) 12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한 임헌대 목사의 거사비
察里使相公奎遠淸德碑 : 1891년(고종 28) 9월 ~ 1894년(고종 31) 8월 찰리사를 역임한 이규원을 기리는 비
判官高公景晙去思碑 : 1883년(고종 20) 8월 ~ 1885(고종 22) 4월까지 제주판관을 역임했던 고경준을 기리는 거사비로 1892년 6월에 세움.
助防將洪公在昱去思碑
□□□不忘碑
이 분들 중 선정을 베풀어 정치를 옳게 편 사람도 있겠지요.
한 예를 들면 察理李相公奎遠淸德碑에서의 이규원이라는 분은
조선 후기에 군사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관리로 1891년 8월,
김지의 난과 일본어민들의 제주 출몰로 혼란했던 제주도에 목사 겸 찰리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인의 제주연해 어업과 불법행위를 금지하였습니다.
또한 鄕賢祠遺墟碑를 세우고 蘆峯金先生興學碑를 삼천서당에 세웁니다.
1894년에는 제주에 흉년이 들자 還穀의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을 중앙조정에 건의하였으며,
민란으로 인해 제주 貢馬의 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건의하는 등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하면서
제주 재임기 동안 향교를 통한 愛士興學, 주민안정을 위한 세미경감과 진휼, 우리 영토에 대한 守土 등으로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하지만 위 비석들이 대개 수령권이 강화되었던 조선후기 것임을 생각해 보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碑도 없지 않겠지만 전임자들의 자기과시용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탐관오리일수록 공덕비에 집착합니다. 이런 공덕비가 곱게 보일 리 없었겠지요.
공덕비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 어느 골계집에서 본 건데요.
어느 고을의 사또가 떠난다 하자 마을 사람들은 공덕비를 세웠답니다.
그리고 귀퉁이에 조그맣게 이런 글도 새겼습니다. 今日送此盜(오늘 이 도둑놈을 보낸다).
전임 사또의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본 전임 사또는 화를 내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네요. 그리고 공덕비 뒷면에 이렇게 새겼다고 합니다.
明日他盜來(내일이면 다른 도둑놈이 온다).
그래서 그런지 비문에 새겨진 지방관의 성씨와 함자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비석거리를 지날 때마다 화풀이 삼아 비석을 발로 차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생긴 비석치기라는 놀이...
단계도 많았죠
선채로 맞추기, 한발.두발.세발 뛰어 맞추기, 도둑발로 맞추기, 도끼치기, 똥꼬로 치기, 막치기, 장군치기, 떡장수치기 등등
그런데 어느시기 제주에서는 비석치기의 새로운 경지가 나타납니다.
총알로 맞추기
조천읍 대흘1리 마을에서 한라산쪽으로 올라가면 번영로와 만나는 곳에 東院옛터가 있습니다.
(2003년도 성굽과 터가 남아 있을때의 사진)
조선시대 당시 제주목에서 정의현 가는 길에 쉬어가던 곳이 동원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았던 작은 마을이라는 이야기지요.
목사, 판관 등 고관이 쉬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편의를 도모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사거리에도 몇몇 지방관리들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86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와흘·선흘·대흘·와산 등 4개 마을 주민들이
목사와 판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동원 옛길변에 세운 것인데 몇년전 길을 확장하며 옮긴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석 4기에는 기이하게도 총탄 흔적이 수없이 많습니다.
4·3당시 동원주둔소에 주둔해 있던 토벌대들의 사격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사상 정기원거사비
사상 백공낙연 휼민선정비
판관 송공상순 영세불망비
판관 강공인호선정비
누가 무엇를 쏘았을까요?
이 비석을 겨냥해서 쏘았을까요?
아니면 이 비석이라도 이용해서 몸을 보호하려는 어떤 불쌍한 이들을 쏘았을까요?
학정과 수탈에 덧붙인 공권력의 잔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총탄에 의해 두조각으로 부러 진 것도 있습니다.
선흘 1리 마을회관구내에 두기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비
화북에서도 등장하신 전면 오른쪽 비의 주인공, 윤구동은 순조때의 제주목사입니다.
재임중 공피전 1천 8백냥을 마련하여 다른나라배가 표도하였을 때 공궤하는 비용으로 비치하였다가
뒤에 환곡의 모조 1천 88섬으로 바꾸어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답니다.
또 순조17년(1817년) 제주에 흉년이 들어 육지부 곡식을 옮겨서 도민을 구휼하였는데
이 때 환곡의 모조 2천 5백섬을 미리 준비하여 보관해 두게 하였다합니다.
목사구공재룡거사비. 이 분도 화북에서 등장하셨습니다.
헌종때 제주목사입니다.
헌종 6년(1840)에 목사 자신이 늠전 5백여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로 충당하게 하였다하고
정의현과 대정현의 수세곽과 제주의 일용곽을 폐지하게 하였답니다.
구재룡목사의 치정이 번거롭게 하지않고 요렴을 가볍게 부과하여 취렴이 적어서 백성들이 그를 애석하게 생각하여 거사비를 세워 기렸다고 하는 데...
바로 이 구재룡목사의 비가 4.3당시 총탄으로 인해 두조각으로 쪼개졌답니다.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가 1968년인가요? 당시 구자춘도지사가 선흘리를 지나간다 하자
구재룡은 구자춘지사의 선조라고 하여 어떻게든 합쳐서 다시 세운 것이라 합니다.
제주도민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또 어떻게 다가올가요?
생각의 흐름따라 차를 몰아 오다 보니 저녁입니다.
돌아가는길..
총맞은 비석이 있는 대흘리 사거리에서 차를 멈추고 이런 저런 생각에 담배한대 빼어 뭅니다.
Brahms
Piano Concerto No. 2 in B flat major, Op.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