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회천동 1

하늘타리. 2010. 3. 4. 21:57


물들어가는 앞산바라기 하며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마당에 똥을 싸며 지나갔다.

무슨 그리 급한 일이 있나
처음엔 웃고 말았는데
허허 웃고만 말았는데.

이리저리 구르는 돌들 주워 쌓아
울타리 된 곳을
이제껏 당신 마당이라 여겼건만
오늘에야 다시 보니
산언덕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았다.

떠나는 곳 미처 물을 틈도 없이
지나가는 자리마저 지워버리고 가버린 새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
그 새.

 

임길택님의 똥누고 가는 새라는 시입니다.

 

봉개동을 가로 질러 오는 데

문득 떠오르고

시 내용이 너무 심오해서 옮겨 보았습니다.

 

여기 서회천동의 옛이름인 가는새의 의의와는 전혀 관계없으니

혹시 이 글을 서회천동 주민이나 출신이신 분들이 시의 제목만 갖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는새마을

마을 주민 그 누구도 그 의미는 모릅니다.

예전에 그리 불리어 왔다 합니다.

 

 

작년봄에 이곳 효열비가

부서져 엎어져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한량이행숙처김씨효열지려

 

저 개인적으로는 충신과 열부라는 개념에 대해

무척 회의적입니다.

 

충신은 나라가 어지러워졌을때 나오게 되지요.

그럼 그렇게 나라가 어지러워 질때까지 그 높은 자리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충신의 말이 제대로 반영이 되었나요 ?

결국 개인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나서 한참지난후 보니 그게 충이었다...?

허무한 이야기지요.

충신보다 양신이 많은 나라.

양신이 많아서 충신이 필요없는 나라를 꿈꿉니다.

 

열녀도 그래요.

송시열이 쓴 책에 보면

양처는 남편이 열시앗을 보더라도 투기하면 않된다구요?

그런데 부인은 일부종사가 미덕이라..

서로의 의무는 균등해야 합니다.

여자가 한명의 남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면

남자도 한명의 처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굴레를 모두 여자한테만 메어두고

그것도 모지라서 남편이 죽은다음에도

꼼짝을 못하게 하니

이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가진자 있는자에게만 굴종시키려는 이데올로기의 표현이 바로 충신,열녀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후세를 사는 사람의 도리로

예전에 세워진 것들은

그 당시 사회상의 표현이기 때문에

현재의 논리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그 당시의 사회상을 알리고 그 개인의 질곡의 삶을 위무하는 의미에서만이라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곳 효열비는 부서진지 꽤 오래되어 있는데도

엎어져 있던 것들이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는 상태로 바뀌어져 있을 뿐

정비의 흔적은 없네요.

 

주변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몇장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 뒤로 교량확장중이라 오른쪽집도 곧 철거한다는데

이곳이 보존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회천분교가 있던 곳입니다.

삼양국민학교 회천분교.

1996년경 건물을 새로 단장하고 바로 폐교되었습니다.  

 지금은 민간에 불하되어 무슨 회사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 학교 터를 기증하고 교사를 짓는데 많은 희사를 하신 분들과 마을 전기사업에 기여하신 분의 공덕비들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효용가치가 없어져 아무도 기념해 주지 않는 이 외진 구석에 모여서 무슨 이야기들을 나눌까요?

 들판에 피고지는 꽃들에게 옛이야기 들려주세요

동회천마을입니다. 

 

 

예전버스정류장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한대 피우고

 화천사로 갑니다.

 

화천사 대웅전 뒤에는 현무암을 깍아 만든 작은 석상 5기가 모셔져 있습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제주에는 당오백 절오백이란 말이 나올 만큼 수많은 당과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300년 전 유학자였던 이형상이 목사로 부임해 미신타파를 외치며 모두 불태워 없앴고. 이 석상 5기만이 남았답니다.
이 석상은 마을의 신앙석으로 지금도 매년 정월에 제사를 봉행하고 있답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돌이끼등으로 뒤덮여 꽤 오래된 듯 보입니다.
얼굴 모양은 제주사람의 표준과는 좀 다르지만 조악한 손길로 깍다보니 그리 됐을 겁니다.
아니면 신의 모습이니 조금 다르게 표현하려 했을 수도 있고요.

 

 

 

 

 

 

 

제가 생각하는 제주불교의 특성은 巫佛倂合 또는 巫佛混合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제주 불교만의 특성이 아닌 한국 불교의 예전모습이지요.
단지 제주이외의 지방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주자학의 영향으로 巫도 깨지고 佛도 깨지게 되었고

그 후 불교를 재건하면서 스님들은 겉으로는 참선과 기도정진만이 불교의 바른 신행이다 하면서
한쪽으로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에 찾아오는 신도의 시주로 사찰운영의 큰부분을 담당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여 왔지만

제주의 주자학은 마을포제나 개인 제사의 형태 그리고 장례등에 따른 예법으로 별도의 규범을 이루었고

제주의 신앙형태는 순수 그 자체를 유지해 온것입니다.

그래서 육지의 재가신도들은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한 성당에 소속되어 그 성당 신부의 권위에 눌려있듯이
스님들에게 눌려 있지만

제주의 불교신도들은 여러사찰에 걸치고 당에도 다니면서 독립적으로 신행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스님이 어느 사찰을 세운경우보다 보살들이 자기 사비로 염불암을 만들고 이것이 사찰로 발전한 사례가 많이 나타납니다.
말그대로 종교 본연의 가치인 순수한 믿음을 보입니다.

 

화천사를 둘러보고 부처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화천사 정문앞 길이 엄청 넓어 졌습니다.

동회천 마을에서 아마도 도련으로 가는 길이 이 앞으로 뚤렸나 봅니다.

이제는 고즈녁한 절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습니다

 

 동회천의 옛이름인 새미마을의 상징인 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화천사 한쪽 옆에  이마을 4.3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언듯 보아도 60명이 넘는 이름이 쓰여 있군요

 여기저기 이렇게 위령비만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순리아닐까요?

 

새미천에서 뵙겠습니다.

 

Mozart  Concerto for Piano no 20 in D minor, K 466 I. All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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