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리를 갑니다.
본향당 본풀이에 의하면 이 마을 최초의 정착지가 궤네기동굴이라 하는 곳
그 궤네기동굴에서 초기철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한 2천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곳.
검은 돌담에 누런 곡식, 파란 밭작물이 어우러 지는 곳.
펼쳐진 백사장을 따라 푸른 바다가 길게 따라오는 곳.
고살미에서 이어지는 넓은 곶자왈이 있던곳..
시외버스터미널입니다.
꽤나 자주 이앞을 지나다니면서도
터미널을 깨끗이 정비한 지는 몰랐네요.
거슬리는 것은 금방 눈에 띄지만 좋은 것은 잘 모르고 지나가나봅니다.
비가 옵니다.
계속 가야 하나, 아니면 돌아가야 하나...우물쭈물 하면서 차창밖을 처다봅니다.
제주시청앞입니다.
차창에 어리는 빗물탓인가요? 건물외관 디자인은 제법 괜찮네요.
제주시청 벤처마루라는 곳입니다. 제주시내에서는 제법 높은 건물입니다.
갑자기 드는 엉뚱한 생각
제주올레아카데미할때 교육과정을 책임지는 올레사무국직원인 젊은 여선생님한분이 계십니다.
제주올레때문에 직장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이곳으로 주거를 옮기셨는데
안덕면 대평리에 사신답니다.
교육기간중 어느 점심시간에 그선생님이 앉은 식탁에 누구신지 모르는 제주 토박이 어르신이 같이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어디사느냐고 묻고 대평리라 답하자
아 난드르.. 한라산도 안보이는 동네. 왜 그런데 사느냐고 하시더군요.
선생님 대답하길 우리집에서는 한라산 보이는데요...
그말이 그 뜻이 아니지요...
제주도 어르신들은 저처럼 육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만큼
제주도내에서도 어디사람인가에 대해 구분이 굉장히 심했고 타동네사람에 대한 이질감 또한 상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을 중심지에서 한라산이 안보인다고 말하는 고내, 곽지, 대평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마을이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한라산도 않보이는데 산다고 무시하듯이 말하곤 하시지요.
당신들께서는 한라산이 보이는 곳에서 영산 한라산의 기를 받고 산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시곤 하는 거지요.
그런데 지금 제주도에서 한라산이 온전하게 보이는 곳이 있나요?
일주도로에서 바다쪽으로는 건설행위제한이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한라산쪽으로는 높은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지요.
그리고 제주시내의 고도제한도 많이 완화된다고 하고
제주시 어딘가에 60층 이상의 빌딩, 서귀포 어딘가에 100층이상의 빌딩
그것도 모자라서 한라산에 콘크리트 범벅을 만들어 쇠말뚝을 고정하여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오는 사람들이 마천루 보러 올까요? 자연을 보러 올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주도정에서는
한라산과 비양도등 풍광이 좋은 곳은 케이블카이용해서 가볍게 觀光한문의 볼관자 그대로 보기만 하고
내국인 카지노에 들어 앉아 도박을 하다가
돈잃어 열난 가슴 식히러 바다를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도보로 바닷가 산책오래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완벽히 아스콘 포장된 제주의 해안도로를 차량으로 달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다가 김녕리에 내렸읍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주변을 둘레 둘레 보다보니까
방사탑위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곳 김녕은 제주에서도 토속신앙이 강한 곳이라서
다른 곳에서는 거의 훼손되어 가는 당이
이곳에서만큼은 여러곳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인데
어떻게 저렇게 높은 방사탑위에 예수님이 계실까?
깜짝 놀라 다가갑니다.
김녕리 성당입니다.
일단 예수님앞으로 다가 갑니다
2008년 여름 어느날 주입신부께서 성당마당 한가운데 높은 탑이 있는 꿈을 몇번 꾸셨답니다.
성령의 특별한 표징으로 보아 상징탑을 세우자 하였으나 신자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신자중 영향력 있는 분이 탑 건립을 위한 최종회의에서 예레미아서에 있는
깃발을 올리고 선포하라는 구절을 강조하여
이 말씀을 제주의 어느마을 보다 토속신앙이 강하여 선교에 어려움이 많은 이지역에 내려주는
특별한 말씀이라 믿고서
1년여의 기간동안 깃발대신 돌탐을 쌓아 예수님을 모심으로
예수성심 자비탑을 완공하였다 합니다.
제주도 토속신앙의 또 하나의 상징인 거욱대라고 불리우는 방사탑위에
새와 동자석자리에
서계시는 예수님..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혼란함을 달래러
성당안으로 들어가서
14처를 조용히 돌아 보겠습니다.
(성당 사진은 별도 블로깅 하겠습니다)
김녕 방호소 옛터입니다.
주민들에게 방호소옛터가 어디냐고 물으면 잘 모르십니다.
이미 관심에서 사라져 버린 거지요.
경로당이 어딥니까 하는 것이 제일 정확하겠군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서 마보병 153명을 주둔시켰던 방호소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 방호소는 1510년(중종 5년)에 당시 장림 목사에 의해 하도리 해안에 있는 별방진으로 옮겨 지게 됩니다.
김녕향사옛터로 가는 골목에서 본 부등호입니다.
처음에는 문패를 영문으로 만든지 알았습니다.
티벳은 중국이 아니다.
티벳은 중국이 아니지요.
이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 알려야 하는 현실이
힘없는 약자에게 주어진 형극이지요.
同病相憐의 심정으로 외칩니다.
독도는 다케시마가 아니다!!!
눈 앞에 고살미가 보입니다.
직선으로 2km정도인데
꼬블꼬블 돌아가다 보면 조금 더 걸리겠지요.
큰 길가에 마을 복지회관겸 새마을금고건물이 있습니다.
김녕리 설촌유래 안내판이 있군요.
고려 의종 7년인 1153년에 탐라군을 탐라縣으로 고치고 김녕을 비롯하여 14개 縣으로 나누웠다라고 표시되어 있네요.
조금 이상하네요.
짧은 상식으로 조금 정정해 보면
고려 숙종10년인 1105년에 탐라국호가 폐지되고 고려에 직접예속되어 탁라(부탁할 託에 말씀언 변을 띈 탁자)를 탐라군으로 고치고,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통치하지요.
그후 1153년에 耽羅郡을 耽羅縣으로 고쳤고 다시 1300년(충렬왕 26)에는, 탐라현을 없에고 탐라전체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어,
대촌(大村, 제주시 지역을 지칭)을 제외한 지역에 縣을 설치하였습니다. 김녕현은 당시 설치된 14개 현 가운데 하나였지요.
하여간 그 전부터 마을은 설촌되었다는 이야기니까 넘어 가기로 하지요.
어느 분의 공적추모비입니다.
비 측면에 보면 괴산악 농로 2km개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고살미에 농로 2km개설이라는 건데
고살미 중턱 어마어마한 크기의 모친 묘역을 만들면서 고살미를 둘러서 묘역으로 가는 길을 만든 것은 개인적인 일이지
공적부조는 아닌것 아닌가요?
하지만 그 다음에 써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동서김녕리 통합상징탑입니다..
동서 김녕리는 2000년 1월 1일에 통합되었습니다.
통합되기전 동서김녕리는 같은 김녕이면서도 이상하게 의견이 안맞는 마을이어서
오죽하면 통합상징탑까지 새웠겠냐 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 탑이 효과가 있는지
지금은 그 어느 마을보다 화합이 더 잘 된다 합니다.
그리고 기념탑 뒤에 마을금고 건물이 김녕현사가 있던 자리랍니다.
고살미가 빨리 오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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