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로베르 드와노

하늘타리. 2008. 11. 14. 15:59
로베르 드와노 - 파리를 사랑한 서민들의 사진가


마음 속에 심상(心像)을 가졌을 때에는

말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고, 너 자신을 분석하지도 말며,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말라.



로베르 드와노. 그는 다른 사진작가들처럼 유명 인물들을 대상으로 포트레이트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주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는 외국으로 촬영 여행을 가는 경우도 거의 없었을 정도로 파리의 일상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그는 파리지엔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인생의 향기가 담긴 단편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영상화하는 데 매달렸다. 그의 이런 작품들의 대부분은 유쾌한 유우머와 페이소스가 담긴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뿍 담겨 있는 것들이었다.

혹시 직접 카메라를 들고서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를 찍어보려고 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 안으로 들어 온 애완 동물을 바라볼 때 그들이 그냥 육안으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말 못하는 짐승도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긴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카메라를 들이댈 때 보이는 반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와 흡사하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인물 사진의 경우엔 피사체가 되는 인물과 카메라를 손에 쥔 사람 사이의 심리적 관계가 그만큼 가까워야 피사체에 대해 거부감 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만큼 자연스러운 사진이 담겨 나올 수 있다. 로베르 드와노는 파리지엔을 사랑했고, 파리지엔들 역시 그 어떤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들보다 로베르 드와노를 사랑했다.

그는 1912년 프랑스 파리 교외의 쟝띠에서 태어났다. 1926년부터 4년동안 파리 에스띠엔느 학교에서 석판 인쇄술을 배우고 졸업할 무렵에는 인쇄조각사 자격증을 얻었다. 학교를 마친 1930년에는 제약회사의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그는 이때 포스터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32년 그의 포토 스토리가 잡지사에 팔리면서 그는 사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드와노는 사진가 앙드레 비뇨의 조수로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의 길로 들어선다.

비뇨 밑에서 조수 생활을 하다가 1934년부터 그는 르노 자동차의 사진부에 취직하였으나 잦은 지각 때문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에 보병으로 징집되었으나,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항독 지하운동에 가담한다. 그는 이때 예전에 익혔던 석판 인쇄술과 사진술로 레지스탕스 동지들을 위해 가짜 여권이나 신분증명서 등을 위조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파리 해방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드와노는 사진작가로서 프리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쟁 후 그의 사진 세계는 더 널리 알려지며 특히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파리 시내를 오가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찍었다.

그는 산젤만에 있는 <카페 드 프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에는 실존주의자들을 비롯해서 무명의 시인, 화가, 그리고 노동자나 국적불명의 흑인들이 넘쳐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파리지엔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고, 격한 정치 토론이나 샹송을 부르고 한데 어울려 떠들고 사랑을 나누었다. 드와노는 이곳을 오랫동안 드나들며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곳 사람들도 드와노가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그들은 저마다 드와노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카메라에 모델이 되었다.

로베르 드와노는 한때 목숨을 걸고 나찌 독일에 대항해 싸웠지만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시사 사진 같은 것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작은 행운에도 행복을 느끼는 서민들의 모습을 사랑했고 그의 관심도 오직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나 명성을 얻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그는 항상 곤궁했고, 변변한 암실조차 갖추지 못해 공동화장실을 암실 대신에 사용하곤 했다. 그가 화장실을 암실로 사용하고 있는 심야의 시간에 누군가 용변을 보려고 그의 암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역시 불편함을 느끼긴 했겠지만 이런 불편에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1956년 사진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에인 <니에프스>상을 수상했다. 그렇다고 그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상을 받은 이후에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살았다.

Windshoes.new21.org 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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