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클림트

하늘타리. 2008. 11. 14. 16:26
클림트의 풍경그림
클림트는 모두 22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1/4이 풍경화이다. 대부분 클림트가 1900년에서 1916년까지 플리게 자매들과 함께 여름을 보냈던 오스트리아 북부의 아터 호숫가의 풍경을 담고 있다.
비온뒤의 풍경 그런데 이 그림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단조로운 시골생활 속에서 일상의 동기부여를 위해 그린 것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클림트의 풍경화 속에는 이야기도 없고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원근법은 교묘하게 비틀려 있고 빛의 방향조차 일정하지 않다.
고요한 호수 단지 빛의 확산과 관조적인 울림만이 있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고요함은 인간의 행위나 동적인 에너지가 끼어들 여지를 아예 없앤다. 클림트 풍경화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정사각현 형태가 이 집요한 정적을 강조한다. 움직임과 방향성의 결여는 그림 속 풍경을 초시간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고 물리적 자연을 넘어선 영적인 자연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은 어떤 모습 인가. 숲 깊숙한 곳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수평선이 높게 잡힌 호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떨림. 캔버스 가득 펼쳐지는 초원에 피어 있는 꽃과 풀의 반짝임. 사람의 자취는 없이 자연 정경만이 펼쳐지는 풍경화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이 부족하다. 풍경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사람의 자취 적어도 "나" 라는 일인칭 자아에 의해 굴절된 풍경을 바란다면. 그래서 내면의 갈망과 외침이 뚝뚝 묻어나기를 바란다면 클림트의 풍경화는 분명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클림트의 풍경화를 그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 1/4이 보여주는 풍부한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을 미리 닫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클림트 특유의 감성이 가득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클림트가 인물화나 다른 주제의 그림 배경으로 풍경을 사용하지 않았고 풍경속에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의 풍경화가 지닌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클림트는 여인들을 그렸을 때처럼 풍경화에서도 정교한 세련미를 보여주며 여인의 초상화와 풍경화가 서로 겹쳐지지 않는 것도 각자가 가진 의미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위기밖에 없다." 는 그의 초기 풍경화에서도 상징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숲 깊숙한 곳에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나무들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고독감과 닮았다
숲에 떨어진 낙엽이나 나무 껍질을 묘사한 갈색과 회색의 물결은 자연의 순환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우울한 마음을 담아낸 듯하다. 어둡다 못해 음침한 느낌까지 드는 늪과 호수는 또 어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을 연상시킨다. 호수 표면이나 들판 가득 피어 있는 꽃잎들 위로 반짝이는 빛은 덧없이 사라지는 삶의 순간들이 연상된다. 물론 클림트 초기 풍경화는 우울한 분위기만 느끼게 한다는 말도 틀리진 않다. 그 세계가 보여주는 자연 낯설고 음산하여 우리를 몹시 감상적이고 우울하게 만든다. 우리 삶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고 이승의 모든 것을 포기한 지친 영혼이 택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산도 하늘도 별도 구름도 없는 자연이다. 나무와 호수, 초원만이 바라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대상인 듯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작정 셔터를 눌러서 찍은 사진처럼 임의적이고 우발적인 느낌,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하는 공간구성. 원근법을 무시하고 멀리있는 것을 가깝게 묘사한 평면적 구성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방향 등은 그림 전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위해 계산된 것이다. 클림트는 소재 선정이나 작업틀을 잡기 위해 카메라 뷰파인더 기능을 하는 사각틀을 사용했으며 원경을 근경처럼 그리기 위해 망원경이나 오페라 글라스를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클림트 특유의 구획 선택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어쨌든 사람들이 그의 풍경화 앞에서 시선을 어디로 둘지몰라 당황해 하면서도 그림이 가진 섬세한 분위기에 끌리는 것은 이 우발적으로 보이는 세밀한 의도 때문이다. 1900년대로 접어 들면서 클림트는 초기의 인상주의적인 풍경화들, 특히 숲 그림에서 멀어졌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한 순간을 포착하고 강조하는 따위의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신 단조롭게 표현된 풍경의 세부묘사와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두움의 대조를 극대화하여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한 부분을 포착했다. 이에 따라 기묘하게 그려진 황량한 정경도 차츰 사라졌다.
이것은 클림트의 다른 그림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지배하던 죽음의 그림자와 불확실성이 차츰 더 밝은 "기대"와 "충만"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자연을 지배하던 어두운 색조와 침울한 분위기도 사라졌다. 클림트의 후기 풍경화들은 여러 면에서 초기 풍경화와 다르다. 특히 후기에는 색채가 그림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로 강조된다. 이것은 풍경화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작품에서도 보이는 변화로 그가 역사주의 회화나 상징적 우화적 내용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회화적 자유를 얻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빡빡한 느낌이 들 정도로 두텁게 칠해진 물감층은 다양한 색채로 조밀하게 구성하여 그림 안 공간을 색의 장막으로 가린 느낌이다. 이 색의 장막 뒤로 펼쳐진 공간을 우리가 볼 수 있으므로 "투명한 베일" 이라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두께나 닫혀진 느낌 때문에 불투명한 장막이라는 말이 옳겠다.
클림트의 "모자이크 양식" 풍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아터 호숫가의 시골집(여름풍경)은 이 장막과 또 다른 배후를 훌륭하게 드러내 준다. 이 그림은 모자이크처럼 작은 붓질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의 붓질이 전체 구성에 거슬리기는 커녕 잘 융화되어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그림의 형식과 기법이 하나로 녹아 있는 이 아름다운 그림 앞쪽에 펼쳐진 초원은 세심하게 장식된 융단처럼 부드럽다.
나무들과 관목 덤불,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일까.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풍경이 모호하게 뒤섞인 듯한 이 그림에서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 줄 수 없는 어떤 것. 현상 배후에 있는 실제 혹은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이처럼 실재와 진실이 환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완벽한 조화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제와 진실은 결코 들추어서는 안 된다는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이시스 여신상이 가진 의미와 통한다. 이집트의 사이스에 있다는 이시스 여신상은 베일로 가려져 있다. 이 베일 뒤에는 진리가 숨겨져 있지만 베일을 걷어 올리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실러의 시 <베일로 가려진 이시스 상(1795)>이나 노발리스의 <사이스의 수련사(1798)>는 이 전설을 다루고 있다. 성스러운 베일을 들어올려 진리를 보는 일을 금지한 배후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진리가 두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여기서는 베일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아터 호숫가의 시골집>은 그림 전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장식적 막, 혹은 베일의 역할을 한다.
보는 이를 한눈에 매혹시키는 이 베일은 투명하게 그 뒤를 비쳐 보이는 듯하면서도 도저히 꿰뚫어볼 수 없게 한다. 유혹하면서 한편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을 감추는 이 베일이야말로 이시스 여신 상 앞에 드리울만하지 않은가. 클림트의 풍경화에는 문이 없다. 그림을 보면서 문을 찾던 우리는 어느새 그림에 갇힌 자신을 발견한다. 이시스의 베일 앞에서 바깥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던 우리가 어느 순간에 베일 안에 들어와 "입구 없음"이 "출구 없음" 이 되어버린 상황과 같다. 후기에 클림트는 물이나 나무, 초원 같은 순수한 자연보다는 건물들, 특히 아터 호수둑을 따라 형성된 촌락들을 묘사하는데 주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클림트가 인간적인 자연으로 시선을 돌렸다고 볼 수는 없다. 후기 풍경화 속의 세계 역시 인간과 무관하게 고유의 생명을 가진 우주이다. 그 우주에서도 하늘이나 구름, 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순수하고 근원적인 자연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풍경은 인간의 작업이나 인간의 행위를 묘사하기는 커녕 자연 속에 남겨지기 마련인 인간적 행위의 흔적조차도 제거하고 있다. 원래 인간의 흔적을 간직하게 마련인 밭이나 오솔길 심지어 건물들조차 손상될 수 없는 유기적 자연의 일부이거나 그것을 장식해 주는 이미지로 환원된다. 아터 호수 주변의 정경을 그린 여러 그림 중 하나인 아터 호숫가 운터라흐의 집들 은 여러 집들의 몸체가 모여 전체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원근법에 따른 원경과 근경의 차이는 거의 무시한 채 멀리 있는 것도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가까워 보이는 그 세계에 다가설 수가 없다. 이 그림에서는 원근법을 비틀어서 얻은 평면성이 베일의 역할을 한다. 다양한 색채로 촘촘하고 부드럽게 칠해진 지붕들은 다소 듬성듬성 채색된 나무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고 호수의 둑 위로 자잘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그려진 꽃들을 볼 수 있는데 손을 뻗어도 그 꽃을 만질 수가 없다. 이처럼 인간적인 공간이 인간과 무관하게 제시되었고 우리 삶과 무관할뿐더러 우리가 설자리 조차 없어 보이는 풍경 앞에 있건만 초조하지 않다. 우리 영혼의 또 다른 풍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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