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생애의 절반을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냈고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 때문에 1896년 교수직을 포기하고 뮌휀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그림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고는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아까운 그림들이 마구 버려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의 아내는 쓰레기통에서 그림을 꺼내어
원래 그리던 곳에 슬며시 걸어놓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다음날이 되면 자신이 버렸던
그림인줄도 모른 채 그림을 계속 그렸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그날도 이 화가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쓰레기통에 쑤셔 박아 넣고는 술집으로 갔고그의 아내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 그림을 쓰레기통에서 꺼내어 캔버스 위에다 얹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약간의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림을 거꾸로 걸어두었던 것입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의 그림이야?"
형태는 알아 볼 수 없고 색채만 어우러져 있는 그 그림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눈을 비비던 그는 한참만에야 그것이 자신의 그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까까지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림은 온데간데없고 평범한 풍경화 한 점이 거꾸로 걸려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하던 화가는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자연을 모방한 저 형태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리고 있었구나!"
그는 거꾸로 세워진 자신의 그림을 바라본 그 순간에 선명함과 강렬함으로 격정적인 감동을 느꼈던 것입니다.무슨 그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칸딘스키는 이를 통해 추상화를 탄생시키는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장 작업실로 달려가 아무렇게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캔버스에 물감을 찍어 바르기 시작했습니다.최초의 추상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서 완전히 제거한 추상화가가 되었습니다.
칸딘스키는 사물의 형태를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선명함과 강력함을 그림으로써 추상화의 세계를 열었습니다.그러나 아름다움은 형태 속에서 얼마든 발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 속에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속에는 그분을 닮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눈과 이를 표현하는 재능이 귀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46세 되던 해에 최초로 추상수채화를 발표한 사건은 미술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내부 세계의 직접적인 표현> 추상 수채화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표현주의나 입체파 혹은 미래파들의 시도를 더욱 발전시켰다.
칸딘스키에 있어서 추상화란 단순히 한번의 시도로 그치고 마는 원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2년 전 어느 날 해질 무렵에,
하루종일 한 주제를 놓고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그의 작업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순간 그는 한쪽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내적인 광채를 발하는 아름다운 그림 한폭을 발견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가지 형태와 색채로 구성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그림...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이런 명작을 여기에 가져다 놓았을까?"
한발짝 한발짝 그림 앞으로 다가가면서 칸딘스키의 이러한 궁금증은 곧 풀어졌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그림 하나가 거꾸로 돌려져 잘못 놓여져 있던 것이었다.
이즈음 그는 홍수라도 난 듯 넘쳐흐르는 색깔을 사용하여 자연의 주제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있었는데,
이렇게해서 그는 비로소 구상의 세계가 자기자신의 그림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늘 음악과 같은 내면의 예술을 지향해 왔던 칸딘스키는
그 당시에 이미 자신의 예술이 도달한 경지에 어느정도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이 거꾸로 돌려진 화폭의 일화 외에도 또 다른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추상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20대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짚더미>란 작품에 매혹당한적이 있는데, 이는 똑같은 사물이지만 햇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에 중점을 둔 작품 시리즈이다.
젊은 칸딘스키에게 있어서 이는 추상이나 다름없는 작품세계의 발견이었다.
그 이후로는 줄곧 "왜 화가들이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JAUNE ROUGE BLEU>
<COMPOSITION>
이와같은 그의 감정은 같은 해 극장에서 본 <로엔그린>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동안 그의 눈앞에 원초적인 선들이 떠올랐으며 바이올린이나 저음의 콘트라베이스 혹은 관악기들의 음색이 온갖 종류의 색채를 연상시켰다...
25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칸딘스키는 그 당시의 기억과 매혹감을 화폭에 옮겨담는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만약 칸딘스키가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보링거의 논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성큼 한 단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자주 거론되는 그 탁월한 논문은,
"추상화 경향은 바깥 세계와 대면해야 하는 인간의 내면적 동요를 표현하기 위한 결과"이며 "지식이 주는 교만함때문에 황폐하게 된 현대인은 다시금
지난 시대의 원시인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아무런 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말한다.
지난 시대에 우리들이 절대불변의 법칙에 의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도 현대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점차로 흔들리게 되었으며 칸딘스키는 이러한 사실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란 것이 기초부터 송두리채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자신이 스스로 발견하는 진리 외에는 어떠한 진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므로 칸딘스키는 "모든 기법은 그것이 내면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기만 하다면 모두 신성한 것이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며, 그의 이러한 견해는 뮌헨의 전위예술가 모임인 '신예술가 연합'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칸딘스키에게 색채란 물리적 지각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고 감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색의 음악을 보여주고자 그림을 그리는 칸딘스키.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그는 음악, 과학, 개념, 철학을
색과 도형, 그림으로 한 폭의 그림에 담고자 하였다.
형태를 없애고 순수한 추상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자연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선체와 선을 선택해서 감정을 표현하고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면
미술이 더욱 순수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시도한 사람.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배건하기를 바랬던 신비주의자.
그의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
이를테면 밝은 빨강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색체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로서 추상미술(abstrac art)가 처음 등장하였다.
"형태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선은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부드럽고 완만한 선은 느리고 조용한 리듬을 느끼게 하며,
색체에서 색조는 음색, 색상은 가락,
채도는 음의 크기를 연상시킨다."
by 칸딘스키
즉, 칸딘스키는 도형으로 여러가지 리듬과 크기를 나타냈다.
마치 악보 같은 느낌을 주는 그의 그림들...
<카자흐 인들>
색채와 선과 형태, 언덕과 창을 든 카자흐 인들이 한데 섞여 묘하게 매료시키는 반추상적인 작품을 이룬다.
단순한 구성 속에 커다란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운 붓 터치에서 기쁨이 느껴진다.
칸딘스키는 진정한 미술가라면 내면의 본질적인 감정만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원래 뮌헨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칸딘스키는 곧 자신의 진정한 재능이 미술에 있음을 알았고
최초의 그리고 가장 위대한 '순수' 추상미술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 1914년부터 1922년까지 머물렀고
러시아 아카데미를 설립햇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성상이나 민속미술과의 연관성은 러시아 미술의 영향이다.
한동안 바우하우스 현대 디자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칸딘스키는 어떤 추상적 그림에서 반짝이는 '비범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추상미술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그림은 다름 아닌 거꾸로 세워 놓은 자신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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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haus
바우하우스란 독일 발터그로피우스가 데사우에 설립한 뒤
나치의 탄압으로 폐쇄된 건축학으로서
미술과 기계 기술이 19세기처럼 분리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건축물과 가구의 설계를 실습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활용하고 대담하게 실험하되
그 설계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철제 와이프 의자나 이와 비슷한 일상용 가구가 처음 고안된 곳도
바로 이 학교에서였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그에 따라서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이다.
Kandinsky, Wassily
Autumn in Bavaria
1908; Oil on cardboard, 33x45cm;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Improvisation 7
1910 (180 Kb); Oil on canvas, 131 x 9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Composition IV
1911 (170 Kb); Oil on canvas, 159.5 x 250.5 cm (62 7/8 x 98 5/8 in);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len, Dusseldorf
Composition VIII
1923 (140 Kb); Oil on canvas, 140 x 201 cm (55 1/8 x 79 1/8 in);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Yellow, Red, Blue
1925; Oil on canvas, 127x200cm;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Composition X
1939 (160 Kb); Oil on canvas, 130 x 195 cm (51 1/8 x 76 3/4 in);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ussel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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