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블로거기자단팸투어

천년의 기도도량 태백산 부석사 - 영주시 투어

하늘타리. 2016. 10. 30. 20:25

"이 포스팅은

경북 영주시 콩세계과학관 및 문화 관광 농촌관광 특산물 먹거리를 알리기 위하여

영주시청에서 초청 진행한  팸투어에 참가후 작성하였습니다."


아직은 파란 잎을 메달고 서 있는 은행나무사이를 지나갑니다.


천년을 이어온 기도도량 부석사로 가는 길입니다.


태백산 부석사

부석사는 태백산의 줄기를 타고 내려온 봉황산에 있습니다.
 공원 구역을 정할때 봉황산을 소백산 도립공원에 포함해서 지정했을뿐

봉황산은 태백산의 한 봉우리이니,

부석사는 태백산 품에 앉겨 있습니다.


일주문

일주문 기둥에 금강역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이 나라연금강역사이고 왼쪽이 밀적금강역사입니다.

부석사에는 별도의 금강문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때문에 이 일주문이 산문겸 금강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통상의 사찰에서

금강문이 없을 경우 천왕문에 금강역사를 그려 넣는데 이곳은 조금 특이하네요.


일주문을 지나 중수기적비 앞을 지나면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인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랍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입니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당간지주는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특히 관련성이 많은 건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깃대와 깃발을 잃어 버린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습니다.


1980년에 조성한 천왕문입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입니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계단을 올라 또 하나의 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 좌우에서 자리를 취하고 있는 2기의 삼층석탑과 맞은편 범종루가 보입니다.


이 두탐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진 옛절터에 있던 것을 1966년에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범종루입니다.

봉황산부석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범종루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안양문이 보입니다.


안양문으로 다가 가는 길 좌우에 응향각 등 요사채가 있습니다.



'안양'은 극락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합니다.

이문을 지나면 이승의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2층에 부석사라고 쓰인 현판이 있습니다.

浮石寺라고 쓰인 현판은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글씨라고 합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부석사에 와 편액을 썼는데

글씨가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고 며칠 뒤 새로 써 보내왔다고 합니다.
누구의 글씨인가를 차치하고 글씨 자체만 본다면 ..
浮의 삼 수변이 목탁 두드리며 예불 드리는 스님의 옆모습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굳센 느낌이라는 평이 중론입니다.


안양문을 지납니다.


무량수전과 그 앞에 위치한 석등이 보입니다.



4개의 창에서 불빛이 나오게 하고 화사석 4면엔 연꽃 봉오리를 든 보살상 조각이 돋보입니다.
4개의 창에서 불빛이 나오게 하고 화사석 4면엔 연꽃 봉오리를 든 보살상 조각이 돋보입니다.



무량수전입니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입니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1358년 공민왕 7년에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1376년 우왕 2년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고 합니다.


이 무량수전앞에 오면 항상 떠오르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서"입니다.
책 내용 중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라는 부분도 모르고

저자도 모르더라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라는 제목들은 다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이 더 고전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불전안에는 중앙이 아닌 서쪽에 부처님이 앉아 계십니다.
국보 제45호인 소조아미타여래좌상입니다.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니 문밖에서 부처님모습을 사진기에 담습니다.
동향인 점도 그렇고

협시보살없이 독존으로만 계신것도 그렇고

 아미타여래상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것 등이 특이하게 다가옵니다.


무량수전 동쪽 약간 높은 곳에
3층 석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부석사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 절터에서 석불상과 함께 옮겨진 것입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입니다.


무량수전과 석탑 사이 보다 깊숙한 곳에 선묘각이 보입니다.
 
선묘각입니다.

지난해 왔을 때 보니 선묘의 영정이 예전과 다르게 바뀌어 있습니다.
그 때 옛 자료를 뒤져 찾아낸 그 몇년전 선묘각내 선묘의 영정입니다.


영정은 바뀌었지만 그 전설은 지금도 유효하겠지요.

"부석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학을 전교(傳敎)한 의상조사는 서기 625년 당시 귀족의 가정에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였다.

그 뒤 그는 서울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입산수도를 했다.

입산한지 8년 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는 어느날 밤,

원효대사는 깨달은 바 있어 인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귀국한 후 계속 불교 연구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조사는 고구려 첩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650년에 다시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양주(楊州)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어느덧 그녀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한 조사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 주시고 가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락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 (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唐)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 임을 알고,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문무왕 11년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어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뒤좇아 산동성(山東省) 해안에 다다르니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기를

 "진심으로 조사님을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하였다.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랐던 대로 용이 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 5백여명이 점령하고 있으므로

수차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여 고심을 하고 있을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공중에서 바라보니 순리로는 조사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법력을 써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3차례나 하였더니,

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부석사이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세번이나 떴다는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러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묵중히 앉아 있다.

그리고 선묘룡(善妙龍)은 석용(石龍)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좌하여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 하므로 조사를 크게 감격케 하였다.

지면에서 2척 깊이에 묻혀있는 48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主佛)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 있다.

이 석룡은 '67년 5월에 신라 5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굴하여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다. "

이상이 절집 홈페이지 내용이고

석룡의 하반부 부분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무량수전 문앞에서 석등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묘에 대한 기록없이 의상이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지만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상대사 전기와 선묘와 관계된 부석사 창건설화가 자세히 전하고 있으며

일본 국보 「화엄종조사회전」그림에 의상과 선묘가 표현되어 있고,

교토박물관에는 선묘아가씨에 대한 목조상이 있습니다.


부석으로 갑니다.


선묘용이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서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하는데

어느 날, 어느 누가 새겼는지 '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택리지'의 이중환이 1723년에 와서 보고는

'실을 넣어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막힌 데가 없으니 정말 신기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시 무량수전앞을 지나 3층석탑 앞에서

안양루와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을 봅니다.

김삿갓이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까”라는 시를 남겼듯이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습니다.
오늘은 눈이 시리도록 밝은 역광이라 사진기에 제대로 닮지를 못합니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입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와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정면 벽에 기대어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선비화(禪扉花)’라 불리는 나무가 자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조사당 동쪽에 위치한 취현암입니다.

조선시대 사명대사의 수도처로 유명합니다만

현재 부석사 산내암자로서 쓰이고 있으며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응진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응진전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자인당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모셨씁니다.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모니불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입니다.



단하각입니다.


나무부처님을 태운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전각이라 유추하고 있으며

그래서 옛 선방 근처에 지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시 삼층석탑앞으로 내려와 무량수전을 보고


그 앞으로 늘어선 연봉을 봅니다.


부석옆에 좌정해 계신  돌부처를 지나


삼성각입니다.

원래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리우던 전각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후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시다가

1979년 부터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설법전까지 이어진 길을 걷습니다.








설법전 앞뜰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조감.


눈에, 가슴에 가득 담습니다.


범종각 범종


법종루로 가며


안양루를 다시 봅니다.


범종루 아래를 가로 질러서





동쪽 급수대 부근으로 와서 안양루를 다시 봅니다.

허공불(虛空佛)이라고도 하고 공포불이라고 도 하는 다섯분의 부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만...
봄날 오전중에만 다섯분의 부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장전입니다.


최근에 지어진 전각으로 지장삼존과 지장 후불탱을 모시고 있습니다.

부근에 선묘와 관계된 작은 우물이 있습니다.


이자리에서는 안양루와 무량수전 두 건물을 한건물처럼 볼 수 가 있습니다.



부석사 박물관입니다.
여섯 폭으로 그려진 조사당벽화가 이곳에 보존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월요일

휴관일 입니다.

아쉬움남기고 돌아섭니다.


절집을 나섭니다.



은행나무들과 탐스러운 빨간 사과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부석사 입구에 위치한 인공연못입니다.

순흥읍지에 부석사 산문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절의 누각이 투영되는 연못인 영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재현한 듯한 운치있는 연못이 무지개를 피우고 있습니다.

천년의 기도도량 부석사기행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