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경북 영주시 콩세계과학관 및 문화 관광 농촌관광 특산물 먹거리를 알리기 위하여
영주시청에서 초청 진행한 팸투어에 참가후 작성하였습니다."
소나무 수십 수백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소나무 수십 수백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서 있습니다.
소나무 숲에 비까지 내리니 분위기가 몽환적입니다.
이중 어느 한 나무가 국궁의 자세를 취하여 학자수라고 불리었으나
그 나무는 지금 없어지고
철조망에 둘리어 후계목 한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이 일대 나무들을 모두 합해서 학자수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소나무 숲을 지나 서원 쪽 오른쪽으로 숙수사(宿水寺)지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높이 3,910mm 폭 520mm 의 규모와 조각의 수준에서 보여주듯이
통일신라때 세워진 숙수사의 품격은 당시에 대단했을 것 으로 보입니다만
1457년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이 절도 점점 쇠락해 졌을 것이고 서원 창설당시에는 부지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유추됩니다.
사찰의 흔적은 건너편 영귀봉의 중턱에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숙수사의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주초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숙수사의 별대였으나 서원이 들어선 후 이 자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손님을 배웅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의 정문입니다.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진 관학이 중심이었습니다만
집현전 폐지와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관학이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계승하였습니다.
중종37년 1542년에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2년뒤 평소 흠모하던 고려말의 학자 안향선생을 안향선생이 어린시절 수학했던 순흥 숙수사 터에 배향하고
그 다음해 중국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 서원으로 개창하였습니다.
명종 1년 1546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의 노력으로
서원운영에 대한 다소의 기반 을 갖추게 되었읍니다.
그 2년뒤 19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1949년 이 서원에 대하여 중국의 예에 준한 조정의 지원을 해줄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허락한 명종은
명종5년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 쓰신 편액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하여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소수서원 정문앞 왼쪽으로
향사 전날 선택한 제물을 성생단 위에 올려두고
원내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의 합당여부를 검토하는
성생단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물이 강학당입니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입니다.
남향으로 배치한 강학단은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로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紹修書院’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강학당의 북쪽에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입니다.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년(순조5년)에 건축되었으며
전형적인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강학당과 사당의 배치와 직방재와 일신재의 배치 등을 보면
조선시대 서원배치가 뒤에 와서 완고해 진것이지
초기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입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합니다.
장서각(藏書閣)은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역할을 하던 곳으로 서원 건립당시 함께 지어진 건물입니다.
장서각 서쪽으로 문성공묘가 있습니다.
통상의 사당등과 같이 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는 둘러 볼 수가 없습니다
사당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당이 사(祠)라 칭하고
특정한 사당만이 묘(廟)라고 일컫습니다.
이 곳 소수서원의 시발이 안향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온 후
예전에 순흥도호부시절 순흥향교에 모셔지던 안향선생의 위패가
순흥도호부가 단종복위운동실패로 풍기군 예하지역으로 격하되어
향교가 없어져 사가에 모셔져 있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안향이 어릴 때 공부하던 숙수사 옛터에 사당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영정을 봉안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다음해에야 유생 3명을 받아들이면서 백운동서원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서원내에서의 문성공사당은 각별한 의미가 있으니 서원내에서 묘(廟)라고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안향선생은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에 이어 고려시대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과 함께 동방18현으로 선정되어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배향되고 있습니다.
통상의 사당등과 같이 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는 둘러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뒤로는 제사용 그릇들을 보관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 입니다.
영정각은 서원에 배향된 인물과는 관계없이
서원 내 보관하고 있던 중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목조건축물입니다.
중앙에는 주자와 안향,
오른쪽에는 주세붕 이덕형,
왼쪽에는 허목과 이원익의 영정 사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직사는 서원과 별도의 구역으로 민가형식의 건축물로
살림집 형식이며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사료관에는
사당에 봉안된 안향, 안축, 안보, 주세봉 선생에 대한 설명과
서원의 발생, 운영, 교육, 제향, 사회적 기능 등
당시 서원의 역할에 대한 도판을 제작,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서원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중수기적비
소수서원중수기적비 주변으로 숙수사 유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청주향교의 예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찰에서 서원으로서의 기능 전이는 문화교체에 따른 공간점유의 계승이라는 측면과 함께
새 질서의 수립을 공고히 하는 정책적 측면의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향교나 서원이 절집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을 겁니다.
관리사앞 문을 나서면 최근에 조성한 인공연못인 탁정지가 있습니다.
1593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류운용이 이곳을 참배한 후 대를 쌓고 못을 만들었다는 구전과
지락재에 걸린 류운용의 시판에 ‘못을 파고 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에 근거하여 지금의 장소를 시굴하여 보니 그 원형이 발견되어 복원한 것입니다.
서원담장과 탁정지를 사이를 걸어 서원 정문쪽으로 오면 경렴정을 만납니다.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입니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에서 濂자를 취했고 합니다.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詩宴)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이 걸려 있습니다.
경렴정앞을 흐르는 죽계천 너머에 아담한 정자가 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하였다고 합니다.
취한대옆에 죽계천에 몸을 드리운 바위에
윗부분에 "백운동" 아래부분에 "경"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닌 이황선생이
감히 선학 주세붕선생이 쓴 글씨위에 자기 글씨를 써서 새기게 했을까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敬자바위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덧붙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1457 세조3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슬픈 사연에 잠시 숙연해 있다가 물보라에 깜짝 놀랍니다.
수달이 물밖으로 몸을 나타냅니다.
한참동안 수달을 쳐다보다 비를 엄청 맞으며 돌아본 소수서원 경내를 나섭니다.
"이 포스팅은
경북 영주시 콩세계과학관 및 문화 관광 농촌관광 특산물 먹거리를 알리기 위하여
영주시청에서 초청 진행한 팸투어에 참가후 소수서원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블로거기자단팸투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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