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멸망의 서러움과 허무함을 이보다 더 간명하고, 절절하게 표현한 시조는 없다.
퇴계 선생의 문집 제일 앞에
‘길 선생(吉先生)의 정려(旌閭)를 지나며’라는 시가 있다.
“아침에 길을 떠나 낙동강을 지나니/ 낙동강은 길고도 길구나/
낮에 쉬면서 금오산을 바라보니/ 금오산은 울창도 하구나/
맑은 물줄기가 두터운 땅 뚫었고/ 깎아지른 절벽은 하늘 높이 솟았으니/ 거기에 봉계마을이 있네./
산과 물에 둘러싸여 있네/ 선생이 거기서 숨어서 살았으니/ 조정의 영으로 정려를 표하였네/
대의가 흔들리지 않음이여/ 어찌 티끌세상 싫어서라 말하랴/
천년 이래 조대(釣臺·벼슬을 마다하고 고기 잡는)의 풍조여/ 또다시 동한(東韓) 땅에 울리게 되었구나/
나라를 지킴은 이미 미치지 못하였으니/ 절개라도 세움이 굳고 완전하도다/
장부는 큰 절개를 귀하게 여기네/ 평생 그를 아는 자 드물었네
/ 아아 그대 세상 사람들이여/ 부디 높은 벼슬을 좋아하지 말아라.”
길재의 삶이 퇴계 선생의 삶의 지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길재는 1383년(우왕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이유로 낙향한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3년 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2) 동문 수학한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천거하여 정종이 임명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그는 의례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적 체계를 실천한 셈이다.
세종이 즉위한 뒤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허락하였다.
길재의 고향인 구미 금오산 입구에는 금오서원이 있고 그를 기리는 정자인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채미’는 ‘고비’(들완두)를 캔다는 뜻으로,
은(殷)나라가 망하자 주(周)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고비를 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말하자면 길재가 조선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성하기 위해 낙향한 것을 빗댄 말이다.
영조 15년(1739년) 시호를 내렸으니 ‘충절(忠節)’이다.
이곳 금산에도 길재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청풍서원(淸風書院)이 있다.
금산은 그의 처가가 있었던 곳으로
초년에 시묘살이를 하였던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현종 12년(1671) 후손과 고을의 선비들이 함께 불이사(不二祠)를 창건하여
숙종 3년(1678)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영조 17년(1741)에 서원남설 금령에 저촉되어 훼철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에 금산군수 민백홍과 지방유림이 ‘백세청풍(百世淸風)’ 4자를 새긴 비를 유허에 세웠다.
이후 1804년 다시 사당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 또다시 철폐되었다.
1928년에 청풍비각, 청풍사, 청풍서원을 중수 복원하여
문화재 사료 16호,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10호로 지정하였고,
현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이곳 사우 앞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비와
‘선생의 충절이 황하의 급류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지주와 같다’는 뜻의 ‘지주중류(砥柱中流)’비가 서 있다.
특히 중국 명필 양청천의 글씨를 새긴 ‘지주중류비’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탁본한 것을
1948년 후세가 다시 탁본해 비석으로 세웠다.
이 마을의 이름도 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사모하기 위해
불이리(不二里)로 이름 붙였다 한다.
특히 충청남도로서는 청풍서원에서 유래한 ‘청풍’(淸風)과
길재의 차시에 나오는 ‘명월’(明月)이 합쳐져서
‘청풍명월’이란 쌀 브랜드를 짓게 되어 지방문화재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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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박정진의 차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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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청풍 百世淸風, 지주중류 砥柱中流
백세청풍에 해당하는 인물로
殷(은)나라가 망하자 의롭지 않은 周(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는 伯夷(백이)와 叔齊(숙제)를 든다.
그래서 백이숙제를 제사지내는 해주의 淸聖廟(청성묘) 앞에는
‘百世淸風夷齊之廟(백세청풍이제지묘)’라는 글이 새겨졌다.
이후 吉再(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사람들이 묘소 앞에는 “砥株中流(지주중류)‘라고 刻石(각석)하고,
살던 집에는 백세청풍이라고 각석하였다.
’지주중류‘는 중국 夷齊廟(이제묘)에 새겨진 성구이다.
砥株(지주)는 숫돌 모양의 돌기둥이고, 中流(중류)란 황하의 속을 의미 한다.
지주가 황하의 격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모양이
마치 난세와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인물의 행동을 연상하게 한다하여.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길재 선생을 은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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