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블로거기자단팸투어

비단뫼 금산 여행 5 진악산 보석사

하늘타리. 2015. 10. 4. 07:39

"이 포스팅은 금산향토음식 힐링여행, 문화 관광 맛집 농특산물을 알리기 위하여

충청남도 금산군농업기술센터 에서 초청하여 진행한 공공 팸투어에 참가하여 찍은 사진에

금산군청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개삼터에서 진악산을 올라 보석사를 갈 수도 있지만
오늘은 등산이 아니라
금산군농업기술센터 에서 초청하여 진행하는 공공 팸투어입니다.

 

편안한 버스로 진악산 둘레를 돌아 보석사앞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진악산 등산로 종합안내도를 보고 등산로를 가늠해 봅니다.

여기서 영천암삼거리를 지나 도구통바위로 간 다음
물굴봉, 관음봉, 비조봉을 오르내리고
덧메기재로 해서 개삼터 공원으로 갈 수가 있군요.


진악산보석사의 일주문입니다.

 

 

보석사 일주문을 지나면 전나무 숲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만나는  의병승장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승장 영규대사의 뜻을 기리는 비석으로
 숙종 5년인 1839년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웠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땅에 매설된 것을 해방 후 다시 복원하여 세웠다고 하네요.

 

영규대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후 영규대사는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는 청주 방어사 이옥의 관군이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 영규대사의 군대만이 홀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의병장 중봉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합군(合軍)하여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였습니다.

 

그 옆으로 몇기의 영세불망비

그중 민태호에 대한 영세불망비가 눈길을 잡아 끕니다.

 

명성왕후에게 이 절집을 원찰로 추천해준데 대한 감사표시이겠지요,


이 절은 통일신라 현강왕 12년인 88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고종 때인 1882년 민태호의 추천으로 명성왕후가 다시 세우고 원찰로 지정하였습니다.
당시에는  31본산 중 하나로 전북 일원의 33개 말사를 거느리기도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다시  마곡사의 말사로 있습니다.

 

폭이 좁아 더욱 아늑한 전나무숲길을 따라갑니다.

 

 

바라다보는 순간 압도당하게 되는 은행나무와 마주칩니다.

 

 

보석사 창건 무렵 조구대사가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가 34m, 가슴높이의 둘레가 10.72m의 크기라고 합니다.
나이는 1000살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찍은 사진 또 찍고 또 찍고
그저 꾹꾹 누르고만 있습니다.

 

 

 

보석사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영천암 삼거리로 향하면
물 맑게 흐르는 계곡이 삼거리까지 길 곁을 흐를 겁니다만 ...


다시 돌아내려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새로이 마련한 절집입구인 2층 누각으로 갑니다.

 

누각 2층 처마 아래 걸린 '보석사'라는 현판 글씨는
근대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라고 합니다.

 

 

누각아래를 지나 절집마당으로 들어서면
등운선원이라는 선원을 만나게 됩니다

 

주불전인 대웅전은 왼쪽으로 꺽어들어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앞면 두 칸 옆면 세 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다포계양식 입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로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셨습니다

 

 

 

 

내부에 탱화를 둘러보다가 감로탱을 만났습니다

아래부분에 영정사진이 있어 그 위를 찍었습니다.


이 감로탱은 모사본입니다.
원본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감로탱의 원본은 현존하는 감로탱중 다섯 번째로 오래된 작품이지만
국내에 있는 작품중에는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가장 오래된 감로탱은 현재 일본에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전면에 배치된 걸개 형태의 그림을 걸어놓고
그 앞에 제단을 차려서 불공의식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뒤로 칠여래와 관음, 세지보살이 둥글게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으며
좌우에 2대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아귀가 그려지고
하단 좌우로는 작반하는 의식승과 승속에 함께 제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표현하였으며
아울러 다양한 죽음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교학승들은
이 탱화가 그려진 시기가 임진왜란 끝난지 불과 50년이 채 안된 상태라
 전화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시기를 보여주듯
전쟁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들 전쟁에서 죽어간 고혼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특히 제의식에 감로탱을 그려 모시고 성대히 베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요.
아울러 인로왕보살이 상단에 위치하는 것과는 달리
제단 우측에 함께 배치하여
그 이후의 감로탱들과 그림의 상이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건물은 기허당입니다.

 

영각의 이름을 ‘기허당’이라 한 것은
기허당 영규대사의 법명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허당의 오른쪽 뒤 언덕에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산신각앞에서 전각들을 내려다보고

 

 의선각으로 갑니다.

이곳은 영규대사가 머물던 전각이라고 합니다.


본래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한 칸 크기의 전각이었는데
옆으로 몇칸을  더 달아내 지금은 'ㄴ' 자형 건물이 돼 있습니다.


현재 의선각은 종무소로 쓰고 있습니다.


몇개의 편액을 사진찍어 봅니다.


의선각

창녕위 김병주가 의병승장비를 쓰며 같이 쓴 글씨입니다.

 

김찬식의 글 제보석사

 

 

또 다른 제보석사

 

대웅전을 돌아보며 돌아나옵니다

 

나오면서 보니 2층누각의 윗부분은 종루였네요.

깨달음의 메아리가 멀리멀리 퍼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