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광한루원에서의 공연 "광한루연가 춘향"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려고
다음날 아침 광한루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광한루원의 정문인 청허부입니다.
먼저 광한루원에 대한 설명을 봅니다.
청허부문
이 문은 1971년 최봉채 남원군수가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로
맞배지붕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어졌는데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습니다.
현 정문이 있는 자리는 1970년까지도 해방 전까지는 전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시장이였다는 남원시장과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우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읍니다만
당시 시장에 큰 화재가 나서 일대가 폐허가 되자 민가와 우시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청허부를 세우고 정문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북문대신 이 문을 정문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우아한 곡선과 자연스런 풍우판 등을 가진 청허부는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정면의 중앙에는 일중(一中) 김충현이 쓴 청허부란 현액이 걸려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면 500년되었다는 팽나무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완월정이 보입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에는 광한전이 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이 완월정은 달나라를 즐기기 위한 누각으로 세워져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선취각입니다.
선휘각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보고
선취각안을 둘러 봅니다.
월매의 집으로 갑니다.
춘향이 엄마가 월매이니까 당연히 춘향이가 살던집이지요.
물론 재현한 집입니다만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입니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해,
춘향이 살고 있는 이 집을 찾아와 부용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집입니다.
월매집에서 나와 완월정을 빙둘러 봅니다.
완월정은 1969년 기존 호수를 확장하여 인공 방장형 호수를 축조한 후 1971년 수중누각으로 신축한 2층 누각입니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입니다.
광한루로 갑니다.
오작교를 넘어가면서 방장정을 봅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 방장, 영주섬을 만들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만들었습니다.
광한루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습니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감탄하여 광한루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한 것입니다.
오작교아래 까치는 않보이고 엄청 큰 잉어들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습니다.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광한루 내부의 계관 편액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호남제일루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합니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습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옵니다.
남원일대에 산재해 있던 역대목민관들의 선정비를 모아두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여기저기서 천대를 받다보니 한군데 모였습니다.
널병(넓은)바위 또는 광암이라고 부르는 바위
본래 남원성 동문앞에 있었던 것을 1950년대 말에 비석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성안의 선정비
성춘향의 아버지라고 비정하고 있습니다.
춘향사당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었습니다.
면장 누구 시헤비
광한루원을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셨을 겁니다.
좌즉은 지리산 빨치산 공비토벌에 희생된 경찰충혼비고
우측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충혼불멸 휘호비석입니다.
공연히 춘향사당을 한번 더 들어가 봅니다.
영주각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었고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고 합니다.
완월정을 정면으로 보면서 팽나무쪽으로 다가갑니다.
조선 명종때 심어진것으로 광한루원 조성전 옛 남산관 마당에 있던 것을 기증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완월정을 보고 광한루원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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