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문화원 제주문화유산 탐방행사 역사유적 3. 제주목

하늘타리. 2014. 6. 17. 13:50

 

제주문화원 제주문화유산 탐방행사로 역사유적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날 제주목에 해당되는 지역중 몇곳을 갑니다.

 

 

문화원을 출발해 연북로를 타고 정실교차로 방향으로 달리던 차가 어우눌주변에서 멈춥니다.

 

 

조설대로 가기위해 어우눌마을길을 지나갑니다.

 

 

어우눌마을은 이제 없지요.
‘어우눌’과 인근 ‘해산이’는 오라리 연미마을에 속했던 자연마을입니다.
4.3당시 초토화 작전에 따라 연미마을과 함께 불타없어졌습니다.


연미마을은 뒤늦게 재건되었지만

연미에 딸린 작은 마을이던 ‘어우눌’과 인근 ‘해산이’는 끝내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2001년도에 다른 잃어버린 마을들과 같이 세워진 표석으로만 기억됩니다.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
여기는 1948년 초겨울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제주시 오라동의 한 자연마을, 어우눌마을터이다.

약 4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어우눌은 제주시 외각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1904년 문음서당(文陰書堂)이 개설되자 도내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향학열을 불태웠다.

마을 아랫녘에는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오라리의 이응호, 김좌겸 등

제주도 각 지역 유림 대표 12인이 모여 일제에의 결사항쟁을 맹약하며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조선의 치욕을 설원(雪怨)한다"는 의지를 바위에 새겨 넣은 조설대(朝雪臺)가 있어

마을의 기개를 지금까지도 드높여주고 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일부 주민들은 오라리 등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눈 덮인 벌판을 헤매야했다.

이 마을에서는 당시 주민 100여 명(호수 23호) 중 약 13명이 희생되었다.

4.3을 거치면서 오라동에서 잃어버린 마을은 어우눌 이외에도 고지레(13호), 선달뱅디(6호), 해산이(15호)가 있다.
다시는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옛 마을길을 따라 조설대로 갑니다.

 

 

조설대 담에 붙어 있는 2기의 비석

 

 

그 중 한기, 볼때마다 마음이 참 안쓰러워 집니다

조설대를 다녀와서 이야기 하기로 합니다.

 

 

조설대

 

 

 

 

조설대입구 집의계광복의사경모비

소암 현중화의 글씨입니다.


뒷면에 집의계선언문과 의거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연사와 조설대 안내문, 면암유배길 표식

 

조설대는 콥이설체라고 불리우는 곳에 큰 바위가 누워 있고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일제의 야욕에 맞서, 이응호 등 열 두 사람이 집의계를 모아 치욕을 씻고 나라를 광복하자 선언하고

그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바위에 조설대라 새기었다고 합니다.

 

'朝雪臺'라는 글씨는 현무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으며,

동산위에 '大韓光復義士' '朝雪臺'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또 이곳에는 신제주가 건설되며 도로가 확장되자

옛 군청앞 도로가 문연사터에 있었다는 귤암이선생비(橘巖李先生碑), 귤암(橘巖), 애교대(愛敎臺),

양부정(養 魚+付井), 우백헌(友柏軒), 종서포(種筮圃) 등의 마애를 옮겨다 놓고 문연사 이설비를 세웠습니다.

 

문연사는 제주시 오라동 2951번지 속칭 판관밧이라 하는 곳에 있었는데

신제주도시계획에 저촉되어 1977년 5월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문연사는 귤암(橘巖) 이기온(李基瑥)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꼭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끼어 넣습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참판의 유적과

귤암(橘巖) 이기온(李基瑥)선생의 유덕을 함께 추모한 제단이라는 것이지요.

이기온 선생은 면암이 해배되어 한라산을 유람할 때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익현의 기록에 이기온은 없습니다.

 

최익현의 몇몇 기록에 제주인사의 이름이 나오고 유한라산기에 사인 이기남은 나오지만

이기온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이기남이 이기온이라면 이름조차도 정확히 알지못하는 사이였다는 것인데...

 

이기온  스스로도 훌륭한 인물이니 굳이 연관이 없는 것을 자꾸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혹자는 들렁궤에 최익현 마애명옆에 쓰인 이기온이라는 각자를 가지고

서로 가깝게 교유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마애를 글씨 쓴 본인이  그자리에서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은 현장에서 한 획 휘호를 남기는 것이고

 따라간 각수에 의해서 새겨지거나 후일 그자리에 새겨지는 것이지요.


유한라산기를 보면, 최익현은 들렁궤에서 휘호를 남기었다는 기록도 없고

한라산에 오른 뒤에도 시간이 촉박하여

백록담 동쪽에 새겨진 옛 선인들의 각자(刻字)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동북벽쪽으로 가보질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백록담 동북벽 끄트머리 바위에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새기어 놨습니다.


들렁궤 마애도 최익현이 알던 모르건 누군가가 새겼을 것이고

최익현 참판이 이기온과 교류가 있었다 하여도

두이름이 그렇게 나란히 새겨도 될 정도의 평교는 아니었을 겁니다.

 

귤암

사장수 포차배

장인석 감무극

 

좌측면에 아들이름이 철호라고 스여 있습니다.

이기온 선생의 아들은 응호입니다.

왜 응호라 쓰지 않고 보명도 아명도 아닌 철호라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오른쪽 돌은 위 비석의 지문비이고

왼쪽 돌은 누구 글씨인지 모르나 우백헌(友柏軒), 종서포(種筮圃)라고 쓰여 있습니다

강(薑)자 같기도 합니다

 

양부정

 

조설대 마애 위 '大韓光復義士' '朝雪臺' 비석

 

뒷면

 

 

조설대 비문에서 무오년에 이응호가 이곳에서 동지 11인을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설대라 명명하고 이를 돌에 새겼다고 되어있습니다.
무오년이면 1918년인데

3.1만세운동보다 먼저 제주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제주도 주재 일본 순사들은 마음이 좋아서 못본척하고 아무런 제재조처도 없이 없는 일로 해주었을까요?

 

또 입구에 세워진 집의계 광복의사 경모비 뒷면 의거문이 1905년 3월에 쓰여진 것이라는데

그해 10월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언급되어 있고 그 훗날일인 경술국치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의계 12지사의 일원이라 하는 이응호와 김석익의 많은 저술중 어디에도

집의계와 조설대에 대해 쓰여진 것이 없으며,

조설대에 대하여 처음 알린 것은 1982년 8월 제주시에서 펴낸 "전통문화의뿌리"라는 글입니다.

이글에 집의계선서의 원문과 번역문이 '조설대와 문연사'라는 항목 속에 있었는데

이것을 비중있게 소개한 글이 1987년 판 김봉옥의 "제주통사"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 8월 3일에 제주시가 조설대를 제주도지정기념물로 신청하였으나

위작의 가능성과 고증 작업의 미비를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12월에 발간된 제주통사 증보판에는 집의계 내용이 저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년전 부터는 이자리에서 항일의사 12인을 기리는 경모식을 행하고 있고

여기다 오바의 극을 달리는 것은 이응호가 면암의 맥을 이었다고 면암유배길이 여기를 통과합니다.

 

 이기온의 아들 이응호는 최익현과 관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응호는 부해 안병택에게 사사받은 인물로

부해 안병택은 호남에서 활동하여 제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남에서는 손에 꼽는 학자 및 지사입니다.

 

궁금한것은 많지만 속에 집어 넣고...

 안내문을 한번 더 읽고

조설대를 나섭니다.

 

다시 보게 된

제주고씨영애위혼비

 

오라2동 고재오씨의 장녀로 1927년에 태어나 1944년에 간옹이익의 11대손 노술에게 시집왔는데...

1949년 1월 부역혐의로 끌려나가 피살되어 시신마저 찾지 못해 비를 세워 위로합니다.


18살에 시집와 아들하나 낳고 23살에 억울하게 죽은 천추의 한을 위로하고자 단을 쌓고 비를 세웠습니다.
그것도 1990년에야....

여기서도 간옹 이익이 나오는 군요.


이기온도 간옹 이익의 후손이지요.
오라동 그 중 연미미을 아래  사평마을은

간옹 이익의 3대손 이중발과 수원 백씨 홍남이 이곳에 정착해 마을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간옹 이익은 제주에 유배 오면서 12살 된 아들 인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후 김만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인실을 키우게 하면서 아들 인제를 낳았습니다.
유배에서 풀리면서 아들 인실만을 데리고 육지로 간 후 다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제주에 남겨진 당시 세살인 아들 인제는 고홍진과 김진용의 보호는 받았으나 평범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고

인제의 아들 윤은 어렵게 진鎭의 조방장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숙종비 인경왕후의 조카 김진구가 제주에 유배되어 오자 김진구를 모셨고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이 제주에 유배되어 올 때 산지천변 집주인이 되었지요.
이 인연으로 윤의 아들 중발은 고만첨, 오정빈과 같이 김진구에게 배울 수 있었고

당대 최고문장가의 한사람인 김춘택과 교유 할 수 있었습니다.
윤이 죽자 아들 중발은 아비의 무덤을 신효동 월라봉 남쪽에 마련하고

김춘택에게 아비의 묘비명을 부탁하였습니다.
중발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후 이곳 오라동 사평마을로 이주해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고

중발이 죽어 장사를 치른 후

오라동 중발의 묘역 옆으로 증조모 경주 김씨의 묘가 이설되었습니다.

 

그 후손이 이기온, 이응호 그리고 항은 다르겠지만 이 묘비에 나오는 이노술 등입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왔습니다.
박물관 앞 돌하르방입니다.

 

우째 돌하르방이 네기가 있습니다.
대학전체에 네기가 있는 것은 맞지만

두기는 정문앞에 있고 두기가 박물관 앞에 있어야 되는데 몽땅 모았는가 봅니다.

 

앞에 있는 두기가 정문에서 옮겨왔다면 제주읍성 동문밖에서 가져온 것이고

 

박물관쪽으로 있는 두기 중 하나는 서문 또 하나는 남문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앞에 두기는 여기로 옮겨 놓았을때는 받침돌이 없었는데 지금은 받침돌이 있네요.

서문에서 가져왔다는 돌하르방 중 하나는 관덕정 뒤뜰 남쪽(좌)에 있는 것과 같이

가슴이 젖무덤처럼 볼록하고 모자 위쪽에 도드라지게 조각된 테두리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들 가운데 정의현성의 동, 서, 남문을 지키던 돌하르방은 거의 원래의 위치에 놓여져 있다하고

대정현성의 것들도 원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만

제주읍성을 지키던 24기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현재 제주도에는 제주시내 21기, 정의(성읍)에 12기, 대정에 12기 전체 45기의 돌하르방이 남아 있고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제주시의 돌하르방 2기가 옮겨져 있어

전체 48기의 돌하르방 가운데 1기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제주도 전체 돌하르방의 개수는 48기인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주목은 동, 서, 남문 밖의 2곳에 4기씩 나눠서 한 성문 밖에 8기씩 세워 전체 24기에다

북수구문에 4기가 더 있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벅수와 장승(1990년, 김두하 저)」의 내용을 보면

일정초기에 동, 서, 남문 밖에 24기와 북수구문에 4기를 더해 전체 28기의 돌하르방이 있었다고 되어있습니다.

1963년 현용준의 보고에서는 전체 25기의 위치가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1968년 이후의 여러 보고에는 23기의 위치만 밝혀져 있습니다.


제주대학교 4기, 관덕정 4기와 근래 제주공항에서 이전해온 제주목관아 내 화단 2기,

삼성혈 4기,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2기, 제주시청 2기, 제주 KBS방송국 2기,

탐라목석원에서 이전해간 제주 돌문화공원 1기 등 21기가 남아있고

서울 경북궁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제주시에서 이전된 2기가 있습니다만...
전부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제주도에서 2015년까지 돌하르방을 원래 위치로 옮기는 사업을 추진중이라고 합니다.
그 일환으로 2011년에 공항주차장 확장공사를 하면서 공항 입구에 있던 2기를 제주목관아지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최근 시민복지타운으로 이전한 KBS 구청사에 있던 돌하르방 2기를

제주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목관아지로의 이전을 KBS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KBS신청사로 이전되어 갔습니다.
소유권이 KBS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관아지도 제자리는 아니기 때문이지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1층은 학교역사실을 제외하고는 약간의 왜색이 흐릅니다.

출연자의 의도를 살리다 보니 그리되었을 겁니다.


2층으로 올라갑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제주의 자연, 풍속, 삶과 문화 등 제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주의 자연과 제주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담겨 있는 만농의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2층 제주의바다 상설전시실입니다.

 

발굴조사를 통해본 제주 역사연표, 선사인의 어로, 태우를 중심으로 갯가에서의 어로,

해녀들의 물질, 배를 이용한 어로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동자석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사이 돌코냉이입니다.

돌코냉이는 신엄리 마을에 세워졌던 것으로

풍수지리적으로 허약한 곳을 보강하고 재앙을 막는 수호신의 기능과

마을의 경계석 또는 과원을 알리는 표석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 형상으로 모두 4기가 있었으나

1970년대 2기는 분실되었고, 현재 신엄중학교 입구와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각각 1기씩 옮겨져 있습니다.

신엄중학교 앞의 석상은 개의 모습으로 보이고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것은 고양이로 보인다고 합니다.

 

조천석

동자석 비슷한 크기에 ‘조천(朝天-천제를 우러러 뵙는다)’이라는 명문이 있어 조천석이라 합니다.

큰 눈을 부릅뜨고 돌하르방과 달리 손이 없는 점으로 보아 육지의 벅수와 흡사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산지천이 자주 범람하여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을 때

산지천에 조천석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로는 범람하는 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현무암으로 제작된 조천석은 원래 산지천 광제교 옆 자연암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하천 정비시 유실될 뻔한 것을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가슴에는 '조천(朝天)' 뒷면에는 '경자춘우산서(庚子春牛山書)'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남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제주에 도임한 김영수 겸방어사(兼防禦使)가 1780년(경자년)에 세운 것입니다.

 

제주의 사람 전시실입니다.

 

제주인의 신앙과 문예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가중요민속자료 204호 내왓당 무신도를 중심으로 각종 무구와 민화,

그리고 제주를 빛낸 석학의 한시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땅 전시실입니다.

 

제주의 주생활, 농경, 목축, 수렵, 의생활을 살필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3층에는 올라가보지 못하고 제주대학교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산천단입니다.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

 

뒷면

 


“이 산천단은 한라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으로

조선 성종(成宗)때 목사 이약동 선생이 단소를 배설하였던 유서 깊은 자리다.
명산대천에 제(祭)를 지냄은 예로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중요한 나라 일의 하나로

한라산신제는 백록담에서 봉행되었는데

그때마다 적설과 한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새로 부임한 목사 이공은 인명의 희생까지 내면서 산 정상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받들게 하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세월이 오래되매 신단과 비는 마멸되고 내력만이 구전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이에 신단을 복원하여 그 경위를 밝히는 한편.

목사 이공이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린 자취와 내력을 기록하여 새기고자 한다.

이공의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휘는 약동(約東),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다.
1401년(태종 16) 남해현감(南海縣監) 덕손공(德孫公)의 아들로 태어나 1450년(문종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로 부임하기는 1469년(성종 원년)이었다.

좌임(左任)하는 삼 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도민의 복리증진에 크게 힘썼으니 이 산신단의 설립도 그 한 예로 꼽힌다.
관리로서의 청렴은 조선조를 통하여 공으로 표상되는 바니

제주를 떠날 때의 ‘문루에 채찍을 걸고 바다에 갑주를 던진(門樓掛鞭 海中投甲)’일화가 전해져

마침내 도민의 경앙(景仰)으로 생사당을 세워 기렸다고 한다.
더구나 대사간(大司諫)에 올라서도 제주를 사랑한 나머지 고마조달(故馬調達)의 적정과

수령의 민폐근절책(民弊根絶策)을 상주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었고

현명한 계책을 아뢰어 도민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공의 학문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점필재(点畢齋) 김종직(金宗直), 매계(梅溪) 조위(曹偉)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으니

덕업은 포은(圃隱), 야은(冶隱)의 유맥(遺脈)를 잇고

행실과 문장은 유림의 영수로 나아가고 물러섬이 도리에 벗어남이 없었다.
나이 78세에 별세하자 임금은 예조의 관리를 보내 제사하고 평정(平靖)의 시호를 내렸으며

이름이 청백리에 올랐다.
해동추로(海東鄒魯)라 일컫는 공의 고향 금산(金山)에서는 그 학덕을 기려

청백서원(淸白書院)과 경렴서원(景濂書院)에 향사하였고

제주에서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공이 간 지 496년이 지난 오늘 공의 남긴 덕을 길이 되새겨 삼가 이 비를 세운다.”

檀紀 四三二三年 十月 日 濟州大學校總長 文學博士 延州 玄平孝 謹撰 後學 安東 金膺顯 謹書
漢拏山神祭壇復元 및 紀蹟碑建立推進委員會謹竪

 

 

한라산신제사터

 

 

 

 

 

제사를 지내던 터 옆에 비석이 있습니다.

 

고선비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에

"새로 부임한 목사 이공은 인명의 희생까지 내면서 산정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봉제(奉祭)케 하고 비를 세우셨다 한다."라는

글귀 때문에 이 비석이 이약동이 세운비로 오해를 받습니다.

漢拏山神古墠(한라산신고선)은 예전에 한라산신에게 제사지내던 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약동 이전에는 한라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지냈으니

이약동이 고선비를 세우려면 한라산꼭대기에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제사를 지내게 했던 옛제사터(古墠)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입니다.
그럼 언제 누가 세운것인가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제사를 옮겨 갔으면 옮겨간 시기이후가 될 것이지만

제사를 옮겨간것이 아니고 구한말에 제사가 끊겼습니다.
그러면 제사가 끊긴 그 이후에 이 비석을 세운것이 되지요.

 

그 옆  비석을 봅니다.
근처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1978년에 홍순만 선생이 고선비와 함께 발굴하여 세웠다는 비입니다.

 

몇년전에 내가 제주대학교에 근무하던 시기

이곳 산천단에서 제사를 재현한 며칠후

당시에는 까페이름이 필연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점심을 먹고 대학으로 돌아오는 길에 까페를 들른다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비석에 다가왔는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비석 전면이 깨끗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자를 읽어보았지요.

 

한비석에 漢拏山下有一小山下....라고 쓰여진것이 보이고

 

한 비석에 卽 成宗元年庚寅...이라고 쓰여진 글이 보입니다.
같은 글자체에 글씨의 간격도 균일합니다.

 

두개를 이어서 읽어 봅니다.


漢拏山下有一小山下 ...卽 成宗元年庚寅
濟州牧李約東公之始設....朝家歲歲繼祭

滄桑一變享祀未繼 豈不寒心 余得閒詩偶過北地...

礎基堀得一石記變*****


대략 이런 글이 됩니다.
"한라산 아래 소산(오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이 있고 그 아래 산천단이 있네..

성종원년 경인에 목사 이약동이 산신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모시니 세월을 이어 제사지냈다.
상전벽해로 제향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우리가 한가한 시간을 얻어 우연히 이곳 북쪽을 지나 바닥에서

 글이 쓰인 비석을 파내었다 ...

 

누가 세웠는지 모르지만 제사가 중단된 후 고선비를 세웠고 훗날 유실되었던 것이지요. 

이 두개로 나뉜 비석은 유실되었던 고선비를 다시 찾은 이들이 세운 지문비이구나.

한기의 비석이 동강나있는 것을 두개로 보고 따로 세웠구나....

 

두번째 비석 왼쪽에 정두정鄭斗正, 홍순녕洪淳寧, 김진수(?). ??? 이렇게 4인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문헌상 알수 있는 인물은 홍순녕입니다.

홍순녕은 홍종시의 아들로 제주여자중학교 교장을 하고

북제주갑 제헌국회의원을 한 인물인데 이 비석을 발굴했다는 홍순만의 형입니다.
국회의원생활 7개월만에 사망하셨으니 이 비석은 국회의원이 되기전인 1948년 이전에 세워졌다는 건데

그때는 홍순만선생이 한 15세 이전이라 모를 수 있기도 합니다만

형이 세운 비석이 실전되어 그것을 30년 정도 후에 동생이 다시 발굴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이 비석은 고색창연해 보여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고

광복전후에 세워진 비석인데 이리도 오래되어 보입니다.

 

이 이야기를 3~4년전에 문화계통에 종사하는 분에게 했습니다.
펄쩍 뛰더라구요.
무엇을 안다고 제주의 문화재를 폄하하느냐고...

 

폄하하는 게 아니고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실여부를 규명해보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비전문가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었고...
도리어 이비석들이 이약동때 세운것이라고해서 2011년 5월 9일에

고선비와 제단을 제주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좀 아니다 싶더라구요.

의미가 있다면 최근에 만들어 진것도 기념물이 될 수 있습니다만

신화면 신화, 사실이면 사실 확실한 구분을 한후에 신화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되

사실은 역사적 측면에서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를 거쳐야 합니다.
어째 신화는 사실여부를 따지고, 사실은 신화처럼 애매하게 받아들이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취미로 하던 답사가 피곤해 지고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무렵 퇴직하며 사무실 뺄때. 보유하던 관련자료를 받고자 하지도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부 넘겨줘서

이제는 제주도 관련 자료가 없습니다.

 

요사이 답사와 여행은 육지로 나가고 제주도에서는 경관만을 보고 다니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제주문화원 답사를 따라와서
오전, 조설대
오후, 산천단
제주인들이 환영하지 않을 이야기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사석에 왔습니다.

 

어떤 이가 묻습니다.
조선시대에 발견되어 모셨다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조선시대에 까지 있을수 있느냐?


화살을 세개 쐈다는데 왜 부서진 돌은 두개냐?

모르죠.
여기는 사실여부를 따지는 곳이 아니라 신화와 설화를 전해주는 곳입니다.

 

화북포구

화북포유지

 

이름자만 남은 김정의 비석

 

 

 

고유문

 

일행들은 오문복선생 안내로 별도연대로 갑니다.


뒤에서 쭐레쭐레 따라가다가

원형과 관계없이 쌓아올린 사각형 봉수의 빼족한 모서리를 만나기 싫어 그자리에 섰습니다.

 

화북 동동네 이곳 저곳에 있던 물통 옆에 세워진 물통을 만드는데 출연하신 분들의 기념비를 모두 모아

전부 새로 만들어 한곳에 새웠습니다.

 

물통은 메워져 없어 졌더라도 그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었으면 사료적 역할이라도 할텐데

이제는 보아주는 이없이 한구석에서 한숨들만 쉬고 있습니다.

 

저 멀리에는 화풍대비석이 와 있습니다.


1959년 화풍대를 만들때 누가 땅을 내고 누가 돈을 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육지부로 출타하는 관리들이 거센 바다를 바라보며 순풍이 불어오기만을 기원했던 후풍소(候風所)가 있던 자리에

대를 만들어 세웠던 곳에 세운 비석입니다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와 있습니다.

 

 

 

 

 

고래물, 큰이물, 새물 등 물통을 돌아보고 엉물이 있던곳으로 왔습니다.

엉물머릿개에 엉물을 메꾸고 엉물머릿당을 없에고 지은 동마을 복지회관앞에 서있는데 일행들이 내려옵니다.

이곳 답사를 끝으로 사흘간의 문화원 제주문화탐방행사를 마칩니다.


뚝 떨어져 혼자 어슬렁 거렸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게 해준 답사였습니다.


주관하고 관계하신 분들께 감사를 보냅니다.

 

Pablo Sarasate 

Zigeunerweisen (Aires Gitanos), 집시의 노래  Op. 20 

2. Caprice Basque,  바스크 기상곡 Op.24 
3. Danzas Españolas, Op.22  No.3 Romanza Andaluza,  스페인 무곡 제3번 안달루시아의 로망스
Julia Fischer, violin
Milana Chernyavska,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