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원에서 문화원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제주문화유산 탐방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역사, 신화 그리고 자연유산의 세가지 분야를 분야별 3일씩 답사하는 것으로 계획하여
먼저 역사분야에 대한 답사를 실시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도 옛날 사람이다 보니 집으로 전해져온 봉투에 담긴 편지로 가자고 권유하니
굳이 새로울 곳없는 답사지이지만
기분이 흐믓하여 다른 일정 제치고 따라 나섰습니다.
오늘은 정의현 지역을 답사합니다.
먼저 종달리와 시흥리가 연하는 모래사장으로 갑니다.
시흥리 송난포구에 차를 세우고 조가비박물관 앞 닫힌 문을 돌아 들어갑니다.
지금은 이 구역이 개인땅입니다만
시흥리 영등하르방이 있던 옛자리를 찾아갑니다.
왼쪽기둥 바깥 왼쪽으로 시흥리 영등하르방이 있었습니다.
해안도로가 생겨 바다가 잘리고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지점의 토지도 중국자본이 활성화 되기 이전에 들어온 중국자본에게 팔리어
2000년경 개인땅이 되었지요.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이곳에 계신 영등하르방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더니
2010년 어느날 마을의 공의로 하르방을 큰길가로 옮기었습니다.
옛 영등하르방자리에서 지미봉을 보고 두산봉을 봅니다.
새로이 옮기어져 있는 시흥리 영등하르방 옆으로 왔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돌하르방이 어쩌면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에 세워진 돌하르방 이전의 원형일 것이다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데...
새로이 위치한 주변 도로와 포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영등하르방은
옛 자리에서의 당당함을 나타낼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지 기단이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하르방을 당겨봅니다.
읍성하르방과 달리 입이 있고 치아가 보입니다.
지미봉을 봅니다.
지미봉을 포함한 종달리 지역은 지금은 제주시이고
우리가 서있는 이 포구는 성산읍이라 서귀포시이지만
조선시대때는 종달과 성산은 같은 행정구역인 정의현에 포함되어 있었지요.
제주목사 임진의 아들 임제가 과거에 급제한 후 제주를 유람할 때
이곳 시흥과 종달을 연하는 바다로 탐승을 나옵니다.
그 때를 맞추어 정의 현감이 기녀 세명에게 갓을 씌우고 가죽옷을 입혀 종달 모래사장에서 말을 타고 내닫게 합니다.
그것을 본 임제가 그의 기행문 남명소승에 쓴 글이 있습니다.
"전면에 포구가 있는데 마침 썰물때여서 십리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한없이 드넓었다...
홀연 세필의 날랜 말이 백사장 너머로 부터 질주하여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고라말을 타고 갓을 썻으며 붉은 가죽옷을 입고 전후로 내닫는 것이 실로 원숭이처럼 날렵했다.
자세히 보니 모두 여자들이다.
목관이 일부러 관기를 보내 그런 장난을 벌인 것이다. 1577년 11월."
송난포구 옛 멸치어장과 옛성창
송난포구는 1950년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송난코지에 이 포구가 만들어 지기전에는 우리가 영등하르방을 찾아간 곳에 배를 들여 매었었지요
새 포구를 만들었어도 샛바람 정면에 성창이 놓여있어
1960년대에 새성창을 축조했습니다.
오른쪽 배 두척 뒤에 보이는 사각형 건물이 개당입니다.
오조리에서 가지갈라온 족지할망을 모십니다.
오조리 오조포가 성산에 갑문이 생기면서 지금은 아무 기능을 못하지만
남사일록에 의하면
정의현내에서 큰배를 붙일수 있는 포구는 오조포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탐라순력도 수산성조에 세개의 돛대가 달린 범선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오조포구를 말하는 것이고
그 큰 포구에서 모시던 할망이니 작은 포구를 새로 만들면서 잘 그눌뤄주십서하며 가지갈라 왔습니다.
당집 내부에 자연석 현무암이 덮혀있는 석궤가 있습니다.
가볼까 하며 움직이다가 일행들이 버스를 탑니다.
멀리서만 바라보고 버스를 탑니다.
버스는 천미장으로 갑니다.
신천목장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차를 세웁니다.
일행들이 신천목장 안길을 걸어 팔운석을 보러 가고 있을때
잠시 방향을 틀어 일주도로변 조갱이굴로 갑니다.
일주도로에서 해안까지 800m 가량 뻗어 있는데
이 유적은 성산~표선 사이 도로 확장포장 구간 내에 위치하여 훼손 위기에 처했던 것을
2001년 5월 문화재청이 긴급구제발굴을 허가함으로써
제주문화예술재단 부설 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9월말부터 발굴조사를 하였습니다.
동굴 내부에서 지표상에서 수습된 기원전 5000년에 해당하는
남해안 돌산송도와 신암리 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는 가는선덧무늬토기를 비롯해
곽지리식토기와 고내리식토기 등 토기류,
조리용구와 관련된 다양한 크기의 현무암제 갈돌.부석.공이석기 등 석기류,
그리고 패총등이 나왔습니다.
이 동굴의 입구는 목장 안에서도 여러곳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일정치 않고 중간 중간 붕괴의 위험이 있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으나
전설에는 이 굴이 바다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도적이 숨어 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신천목장입구로 들어갑니다.
총각 도부장수가 처녀 물귀신에게 잡혀들어간 진질밭 곱은소 옆을 지나 갑니다
선돌이라고도 하는 이 바위
한때는 울부짖는 듯한 모습의 용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이해안 전체를 용머리 해안이라고 부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변 팔운석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하다보니 이름조차 잊혀졌습니다.
사람이나 바위나 자리를 잘 잡아야 합니다.
팔운석으로 갑니다.
어느날 소묵회 소풍길에 저 바위를 보고 흥에 겨운 소암이 글을 쓰고 소농이 후일 이 작은 바위에 각을 했다는데....
왜 팔운석八雲石이라고 하였는지...
왜 소암의 함자를 쓰지 않고 소묵회라고만 하였는지....
오늘 소농선생이 안내하고 있는데도...
소농선생이 그에 대한 말을 안하니 엉뚱한 이야기 한다고 할까봐 도리어 물어보질 못합니다.
바다로 내려가 팔운석을 돌아봅니다.
한개의 돌이 구멍난 것이 아니고
두개의 바위가 공간을 두고 머리부분이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팔八자모양의 운석雲石이라 팔운석이라 하였다라는 것이 가장 적절한 답일듯 싶습니다.
중국 원난(雲南) 지방에서 나는 옥돌인 雲石이 아니고 운치있는 돌 雲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운석이라는 아호를 쓰는 분들이 꽤 많았지요.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헌종 때부터 철종때까지 4차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이 있고
근대인물로는 장면부통령의 호가 운석이었습니다.
동네에서는 이 바위를 창곰덕 또는 고망난 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탐라지의 穿石과 남사록의 貫石이 지칭하는 바위가 바로 이것일 거라고 알고있습니다.
용궁올레로 갑니다.
용궁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야기인데.....
이 암맥앞의 바다는 그 깊이도 깊고 물살이 회오리지기 때문에 무척 위험한 곳이지요.
어느날 상군해녀 송씨가 전복을 찾다가 그만 이곳에서 물질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남해용궁까지 다다르고야 말았다고 합니다.
'내과오로 인해 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내가 죽으면 늙은 부모를 공양할 이가 없다'는
송씨 해녀의 눈물어린 하소에 남해 용왕이 그녀를 돌려보냅니다.
그녀가 물밖으로 나가자 마자 칼을 세운 것같은 바위들이 솟아올라 그녀가 나온 출구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칼선도리라고 하지요.
천미장을 돌아나갑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하목장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시대 진상직전의 말 중 가장 좋은 말들을 가려 여름에 방목했던 하목장(夏牧場)이었습니다.
17세기에 개린잠염자둔마목장(芥鱗潛鹽字屯馬牧場)으로 이용되다가
18세기 초반에는 천미장(川尾場)이라 하여 여름목장으로 운용했고,
19세기에 우장(牛場)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제주에는 국영목장인 말 목장(10개 소장)과 함께 소 목장(牛場)도 발달했습니다.
정조 17년 무렵엔 1소장 내의 구좌읍 덕천리 사근이오름 일대에 설치된 황태장을 비롯해
10소장내 이곳 천미장, 대정현 소재 모동장, 가파도의 별둔장 등 4개의 우장이 있었습니다.
‘제주삼읍지’ 목장조에 보이는 이들 4개소의 우장은
흑우 생산이 국가적인 관리하에서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조선 고종때 공마제도가 폐지된 후
이 마을 오장헌의 효행과 덕행을 칭찬하여 조정에서 이목장을 하사 하였으나
오장헌이 두번이상을 거절하였기에 신천리에 사는 향리에게 하사하였는데
마을의 공동목장이 되었다가 개인에게 매각되어
윗쪽은 신풍목장, 아래는 신천목장이 되었습니다.
울부짖는 용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바위를 봅니다만....
뽀뽀해달라고 입을 내미는 여인의 얼굴 같습니다
주변에 한놈이 나도 이름지어 달라고 한눈을 찡긋합니다.
너는 패쓰
신풍리마을입구
도로포장기념비
도로변에 무슨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고 있습니다.
옛 기념비석이 넘어지지 말라고 뒤에 큰 나무와 함께 묶었습니다.
농촌 향토음식체험 마을 '어멍아방잔치마을'
신풍리, 신천리, 하천리 세 마을을 본디 '내끼'라 했는데 이는 내(川)의 끄트머리라는 뜻입니다.
처사 오억령의 묘비와 호장 강필번의 묘비에 <천미촌(川尾村 > <川尾理 >라 기록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있으나,
본디 한자어로는 <개로천(介路川) >이라했고 <진순내 >라고도 불리워 졌습니다.
'신풍리(新豊里)'란 이름은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을 지향하여
그렇게 뜻을 둬 조선조 철종(서기 1840년)때 이 마을 사람 오진우(吳眞祐)에 의해 명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마을지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서귀포시 성산읍인 고성과는 12km이지만 표선과는 5km밖에 되지 않고
5일장을 같이 보기 때문에 행정구역은 성산읍이지만 생활권은 표선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어멍아방잔치마을을 운영중입니다.
마을 공원입구 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공원에서 잠시 쉰 후에 삼달리 강씨묘로 갔습니다.
한때는 제주도 강씨 중 가장 오래된 묘역이라고 했으나 그렇지는 않고요.
부부의 묘가 나란히 있으면서 남편의 묘는 방묘이고 부인의 묘는 원묘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남편의 묘 네 구석에 모서리가 보입니다.
몰년을 참고하여 분묘제도 연구에 큰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개비한 후 이전 비석을 산담의 한 부분으로 활용했습니다.
통오름 뒤쪽 분지에 있는 영산이골 강씨묘를 찾아갑니다.
난산리에 있는 유건에 오름이 보이네요.
표고 190.2m에 비고 비고 75m뿐이 않되는 오름인데 이곳이 분지이다 보니 꽤 높아 보입니다.
높고 낮은 것, 좋고 싫은 것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오름의 모양이 유생들이 쓰는 유건처럼 생겼다 하여 유건에오름 또는 유건이오름이라 부른다고 하나
말을 위한 말이고
`이기네오름` 또는 `이근이오름'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영산이골 강씨묘.
김만일의 처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입니다.
사실 김만일이 조정에 바친 말은 이무덤에 누워계신 분이 늘린 말들로 거의 처가의 말입니다.
김만일본인은 그 보답으로 영예를 얻었고
가문 대대로 영화를 누렸지요.
하지만 강씨가문에는 아무런 은급이 없어서 강씨가문에서는 불만이 다소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목동 영산이가 자리 잡아준 이 묘소는 잘쓴 묘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네요.
이곳 강씨묘소에는 비석을 고쳐세우면서 옛 비석을 산담구석으로 옮겨 놨는데
그 비석은 묘갈의 변천과정을 알수 있게 해주고
제주도에 대원大元을 본으로 하는 성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대원을 관향으로 하던 성씨들이 조선 후기를 지내오면서 타 본으로 편입이 된것이지요.
사진을 멍청하게 찍어 막상 대원이라는 글씨는 잘 보이질 않습니다.
비음을 읽어봅니다.
묘앞에 서서 전방을 봅니다.
부근에 이 무덤자리를 잡아준 영산이 묘도 있고
강성지묘라고 쓰여있는 묘비의 묘도 있어 들러보면 좋겠는데 다들 돌아나갑니다.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 나갑니다.
수산초등학교입니다.
수산진성 水山鎭城 안에 있는 학교입니다.
수산진성은 원래 정의현성의 관리하에 있다가
1910년에 표선면 성읍리 정의보통학교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안의 토지 일부를 인근 사람들이 점유하여 집을 짓고 살기도 하고 토지를 농경지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수산초등학교를 건립하게 되자 성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이주토록 하고
수산리민들이 자력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교사(校舍)로 개축하였습니다.
그후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와 인근 유지들의 찬조롤 학교시설을 확충했습니다.
학교내 기념비들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수산초등학교 울타리가 되어 있는 수산진성은 위치상으로나 축성 방식으로나 다른 진성과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수산진성은 세종21(서기1439)년에 축성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1164척이고 높이는 16척」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의 규모가 진성 중에서 4번째로 크며,
모양 또한 다른 진성이 타원형을 하고 있는데 비해 사각형을 하고 있습니다.
성벽 바깥으로 돌출시켜 만든 치성(雉城)과 치성 사이의 구간이 일직선으로 된 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 수산진성은
축조 방법이 2단식 석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성의 남쪽은 초등학교 교문으로 쓰기 위하여 20여m를 잘라내었고
교문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높이 3m, 길이 50m 정도 성벽이 남아 있는데,
창고로 이용되는 건물이 있던 중간 부분은 허물어져 있습니다.
동쪽 모서리와 남쪽 모서리가 만나는 구간은 원래는 치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찾아볼 수 있고
동쪽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원래 모습을 잃었고 그 안은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수산진성에서 보존이 잘된곳은 학교건물뒤편입니다.
지금은 나무가 들어차서 성벽 위로 올라가기는 힘듭니다.
외벽 높이는 바닥에서 4m이고 내벽은 2단으로 축성되었는데 하단 성벽은 바닥에서 1.2m, 상단 성벽은 3m, 폭은 하단·상단 모두 2m입니다.
그리고 상단 성벽에는 수산진성에서 유일하게 총구와 기타 무기류를 넣을 수 있도록
가로 25cm, 세로 50cm 가량의 사각형 구멍인 여장(女墻)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장은 탐라순력도에도 그려져 있다.
성의 내부에는 병사(兵舍) 및 객사(客舍)가 있었을 것이나 해방이전에 이미 철거되었고
성안의 남동쪽에 '진안물'이라 불리는 샘물이 근래 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메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본청앞 사열대 주변에 손을 댄듯한 암반이 있는데
혹자는 사장대라고 하나 진성 한가운데에 사장대가 위치할 수는 없지요.
함께 온 이들이 설왕설래 하고 있을때 혼자서 진안 할망당으로 갑니다.
진안할망당은 수산진성을 쌓을때에 생긴 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성을 쌓았는데 이 때 주민들이 모두 부역을 하고 공출을 내는데 한 홀어미만이 공출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리가 집에 찾아가 공출을 독촉하는데 아이가 울자 여인은 '집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아기라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공출관리는 어이없어 웃어넘기고 돌아왔지요.
그런데 성이 며칠 쌓으면 무너져 내리고 며칠 쌓으면 또 무너져 내리고...
이유없이 자꾸 무너져내립니다.
쌓는 방법에서 이상은 없는데 왜 그럴까?
고심을 하던 관리가 어느날 지나가던 스님에게 그냥 하소연조로 이일을 말하니
스님이 말하길 '왜 주겠다던 원숭이띠 아기를 받아다가 바치지 아니하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출관리는 그 여인의 집에 가서 아기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이제는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억지로 빼앗아 와서 아기를 성굽모서리 땅에 묻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을 쌓으니 과연 성은 무너지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성을 완성하고 난 후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동네의 한 하르방이 혹시 묻힌 아이가 배가 고파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며 음식을 그 자리에 갖다 놓고
자장가대신 '웡이자랑 웡이자랑 부예부예 부예부예' 라고 몇번 읊조리고 오니 아기 우는 소리가 그쳤다고 합니다 .
그때부터 그자리에 당을 세우고 그 아기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버린 민망함에 아즈망들은 당에 갈 수가 없다하여
옛날에는 이 당에 남자들만 다녔었다고 합니다.
남자 혼자서 밥차롱에 메와 고기·술 등의 제물을 차리고 와서 절을 하고 제를 지내고 가곤 했는데,
지금은 남녀 구별없이 입시를 치를 자녀를 둔 부모들이 모입니다.
마을로 이어지는 당올레
잡풀이 없는 것을 보니 꾸준히 다니는 당궐이 계신 듯 합니다.
버스로 돌아 갑니다.
1일차 답사가 끝났습니다.
안내자가 있는 답사인데....
안내자는 않따라다니고 혼자서만 주변을 도는 듯 해서...
어쩔까 하다가...
그래도 일부러 시간내서 오기는 힘든데 차에 앉으면 어딘가로 데려다 주니...
스스로 복습하는 의미로 내일도 오기로 합니다.
내일 만나요.
Isaac Albeniz
Suite Iberia
1. Evocation
2. El Corpus en Sevilla
3. Triana
4. El Puerto
5. El Albaicin
Minneapolis Symphony Orch
Antal Dorati,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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