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문화원 제주문화유산 탐방행사 역사유적 2. 대정현지역

하늘타리. 2014. 6. 16. 08:16

제주문화원 제주문화유산 탐방행사로 역사유적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정현지역을 갑니다.

 

감산리 복지회관입니다.

 

임징하의 적려유허비를 찾아 왔습니다.

 

임징하선생 유허비는 적려지인 속칭 '묵은터' 고제영의 집 앞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감산리 마을회관 북쪽으로 300m쯤 돌아간 곳 개인 집 입구로 옮겨 세웠고,

1998년을 전후하여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서재 임징하 선생은 숙종-영조(1686-1730) 때의 인물로서

1713년 27세에 사마양시 갑오 문과에 합격하였습니다.
노론이 집권하자 장령掌令으로 등용되어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며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순안에 유배되었고

 1727년에 다시 대정현 감산리로 위리안치되었습니다.
1728년에 한양으로 입송되어 투옥된 뒤 1730년 7월 옥사하였습니다.

 

제주도에 귀양와서는 감산리 고제영高濟英 댁에 적려하면서

인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글을 쓰곤 하였습니다.
사후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복권되었고 1809년(순조 9) 이조참판에 특증되었습니다.


서재 사망후 130여년이 지나 서재 선생의 5대손인 임헌대任憲大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인 1862년에

5대 종손인 임헌회가 비문을 짓고 임헌대가 비기를 써서 유허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문을 옮깁니다.
嗚呼此濟州之大靜縣柑山村者卽我五代叔祖西齋先生謫廬遺址也

先生姓任氏諱徵夏字聖能西河人西齋其號也 肅廟丁卯生癸巳司馬兩試甲午文科 英廟丙午以掌令 

陳辛壬義理辨 聖誣討亂賊爲凶黨所構 順安丁未 棘于此其屋主高濟英也

 戊申逮王府備經毒楚竟以庚戌七月二十四日卒 正廟丙申伸雪丹書 純廟己巳特贈吏曹參判 嗚呼先生精忠大節當與天壤同其不 

而惟此地乃在絶海中易致久而迷所 先生沒後百三十餘年五代孫憲大爲本州牧爲是之懼建碑而表之屬憲晦識其顚末 嗚呼始先生之被合手也

有詩曰讀聖賢書所也要使此心俯仰無愧從古以來人誰不死橘林在傍百世可俟斯足以知先生因幷記之百世之下過此者尙有感慕而致敬者矣

崇禎四壬戌四月日 從五代孫經 官憲晦謹述 五代孫通政大夫行濟州牧使憲大謹書

 


1970년대에 마을에 도움을 주신분들의 비석입니다.

 

 

안내자가 유허비앞에서 설명을 하는 동안 잠시 회관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몇년전에 발간한 감산리 마을지를 뒤적 뒤적 넘기는데

 이 마을에 양헌수제폐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책에는 비석의 소재지가 적혀있지 않아서 이 책을 들고 리사무장에게,

회관앞에 서있는 두명의 마을어르신에게

혹시 이비석이 어디있는지 알고 계시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습니다.
리사무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합니다.
외지사람은 모를거라고 답이 오고..

.다시... 말해주면 찾을수 있으니 대략이라도 일러달라 부탁하니

 결국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가만...이거...

목관아에 있는 창천리에서 옮겨 왔다는 양헌수적폐비를 이야기 하는 듯합니다.

 


목관아내에 양헌수의 비석이 두개가 있지요.
하나는 使相梁公憲洙永世不忘碑인데 同治六年三月 日 營牧鄕將吏及各廳’이라 새기고 있어

고종4년(1867)에 牧府內의 각관청이 합동으로 건립한 비석이고
또 하나는 牧使梁公憲洙除弊碑인데 施惠筆債 防弊戶還라고 쓰여있고 

 同治九年 庚午 中面 倉川里 八里가 세웠다는 비석으로

안내문에 창천리도로공사로 2003년 5월에 옮겨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비석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행정구역상 해당지역도 아니니 옮겨 갔는지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최근에 발간했다는 마을지에 이것을 왜 포함시켰나 모르겠습니다.

 

회관 뒷쪽 골목 올레를 사진찍는 등 룰루랄라하며 이전 유허비있던곳으로 가고 있는데

임징하선생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다음 장소 사진을 올리기 전에

임징하선생 유허비로 오기전에 들른 임관주 선생의 마애를 찾아가는 길의 사진입니다.

 


임관주마애명 설명 안내판 있는 곳에서 계단을 따라 창고천으로 내려가다 보니

 좁은 길이라 많은 사람으로 인해 지체현상이 생깁니다.

 

 

임관주 마애명을 않보신분들 먼저 가서 설명을 들으시라 하고

 계단이 동서로 갈리는 곳에서 서쪽으로 갑니다.

 

 

창천리 본향 닥밧일뤠당으로 가는 길이지요.

 

 

 

창천리 본향 닥밧일뤠당

 

 

당신은 감산리의 도그새미 일뤠당에서 가지갈라 모셔온‘닥밧 일뤠중저’입니다.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차지하는 토주관이시면서 산육과 치병을 맡고 있습니다.

제일은 1월 17일, 5월 17일, 8월 17일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당궐이 다닌 흔적이 있는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당입니다.

 

당을 나와 임관주의 마애가 쓰여 있는 석벽으로 갑니다.

 

임관주는 1767년(영조 43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삼상논책상소문을 올렸다가

도리어 임금의 노여움을 받아 대정현으로 귀양을 갑니다.
창천에 적거가 정해진 그는 가시덤블이 둘러져 있는 처소에서 독서에 열중합니다.
창천에 온지 두달만에 해배가 됩니다.
해배된 다음날 창천 안덕계곡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한라산 백록담, 천제연, 산방굴사 등지를 유람하며 한수씩 남깁니다.

 

유배가 끝난 다음날 둘러본 창고천 석벽에 남아있는 시입니다.
"始出荊門日 처음으로 가시나무로 만든 문을 나서던 날에
先尋枕下川 베개 밑 시냇물을 먼저 찾았네.
蒼巖三曲立 푸른 바위 세 굽이 둘러섰는데
短瀑晩楓邊 늦가을 단풍가에 작은 폭포가 걸려 있네."

 

마애에서 상류쪽으로 조금 옮겨서 사진 몇장 찍고 계곡을 나옵니다.

 

 

 

화순 '보막은 소' 윗쪽 '올리소'의 주변 풍광입니다.

 

 

 

그 옆으로 만들어진 도수로입니다.

 

이 수로를 따라 내려가 김광종영세불망비로 가려 했는데

 참는게 좋을 듯해서

다시 올라와 좋게 좋게 김광종영세불망비로 갑니다.

 

김광종은 한경면 저지리 사람으로 안덕면 화순리 황개천 바위를 뚫고

화순리 넓은 땅에 물을 끌어다 논밭을 만들어

 논농사가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1832년(순조 32) 3월부터 1841년(헌종7) 9월까지 약 10년에 걸쳐,

바위를 뚫고 물을 끌어들여 1만여평의 땅을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오직 자신의 재산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고가 '중국 한漢나라의 소신召信의 선정善政과 비길 만하다' 하여

이민里民들이 그를 전조田祖로 모셔 제사 지내는 한편,

1938년 5월 화순리 답회畓會가 후손들과 협의하여 비를 세웠습니다.

 

앞면에는 가운데 큰 글씨로 '金海金光宗永世不忘碑'

작은 글씨로 '穿山引水 多費己財 漢西開始 以裕後世 食我香稻 功擬召父 賴公德基 歲祈田祖'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가운데 조금 큰 글씨로 '昭和十三年五月五日和順畓會建設'

좌우에 작은 글씨로 '住楮旨里后曾孫龍仙良順世閏 玄孫斗炳, 會首 梁時權 發起 金雲玉 誌 姜師完 贊 池赫重'이라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큰 비석은 김광종의 후손들이 1960년대에 세운 것입니다. 

 

通政大夫金公光宗永世不忘碑'라고 되어 있고 한글로 행적을 소개하였습니다.

 

뒷면에는 옛비석 전면에 쓰여진 글을 옮기고

1938년 화순답회에서 건립한 비를 다시 세운다고 적혀있습니다.

 

불망비 있는곳에서 화순방향을 보고

 

상류방향을 봅니다.

 

이 자리에서 보막은 소의  둑이 보이지 않아

 

비석이 있는 곳에서 수로로 내려 가봅니다

 

 

사진 오른쪽으로 '보막은 소' 의 둑 일부가 보입니다.

보洑는 답畓과 같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한자로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을 뜻합니다.
가뭄이 들 경우 하류 황개창 지역의 아랫마을 1만여평의 논에 물을 대어 주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처음에는 진흙으로 막았다가 나중에는 시멘트로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沼는 계곡 같은 데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말하지요
제주에서도 논이 없다보니 보, 봇동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다보니

보막은 소라고 동어반복식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도수로를 살피며 다시 올라갑니다.

 

 

 

대정향교입니다.

 

1971년 8월 26일에 지방유형문화재 4호로  지정된 대정향교는

태종16년(1416) 조원趙原 목사 때 대정성내에 창건되었습니다

 

그 뒤 북성에서 동성 밖으로, 또 서성 안으로 옮겨다니다가

효종4년(1653) 이원진 목사 때 향교가 있는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경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은 현종10년(1669) 이연 목사 때 현감 조문혁이 중수하고,

숙종14년(1688) 목사 이희룡이 중수하였으며 헌종원년(1835) 목사 이장복李長復 때 현감 장시열張時悅이 중건하였습니다.

 

 

 

 

명륜당은 영조28년(1772) 현감 이빈李賓이 전사청·서재와 함께 중건하였습니다.
明倫堂이라는 액자는 순조 때 변경붕邊景鵬 현감이 주자 필筆을 본받아 게시하였습니다.

 

대정현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이 고장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에게 요청하여 疑問堂이라는 액자를 받아 게시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를 이루고 있으나 건물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입니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산에 올라 향교터의 풍수설에 따른 형국을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합니다만
안내자이신 오문복선생은 단산에 오르실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합니다.

 

짐작컨데는 이 대정향교의 풍수를 논하는 것이 좀 편치 않으실것이라 생각됩니다.

풍수를 논함에 있어 방법론적으로 내맥, 임수, 안산, 사각등을 살피어 논하게 되지만

이곳 대정 향교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이 나와도 민망할 듯 합니다.

 

조선시대 어느 지역이던 향교 자리는 모두 일대에서의 명당이라고 하는 곳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주도내 향교도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향교 터를 여러 번 옮기면서 선비를 출세시키려 했었습니다.
여기서 선비를 출세시킨다는 것은 급제자를 낸다는 것을 말하는데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인 제주향교와 문장투필형文章投筆形인 정의향교는 많은 수의 급제자를 배출했지만

이곳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자리에 위치한 대정향교는 이설 전이나 이설 후 모두 한명의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향교의 풍수를 논한다는 자체가 말이 않되는 것이지요.

 

문화원 백선생 인솔하 십여명의 인원이 단산을 올라 단산과 대정향교의 형국을 살피는 사이...

세미물을 둘러보고

 

 

새미물뒤로 바로 치고 올라갑니다.

 

 

 

 

 

 

 

산방산과 용머리 그리고 형제섬을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를 찾아 헤메다 내려옵니다.

 

 

 

 

 

 

 

 

 

 

내려오면서 공연히 민망하여 옥녀가 타는 거문고라는 금산琴山을 한번 바라봅니다.

 

모슬포 우체국앞입니다.

 

우체국 전면 좌우로 기둥같은 돌과

 

마을사람들이 극대라고 부르는 석상이 한기 씩 있습니다.

 

기둥의 형태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추하기가 너무 힘드니 논외로 하고

석상은 언제 어떤 용도로 만들어져 여기 서 있는 것일까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통상 제주에는 돌하르방 외에는 장승이나 벅수가 없다고 하나

민속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목선대장군과 모슬포 우체국 앞의 상모리석상 등은 장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정의현의 ‘벅수머리’조천읍의 '장생이빌레', 성산읍의 '장생잇포' 등의 마을 이름에서

 장승이나 벅수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슬포우체국 앞 화단에 있는 이 석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모슬리가 상모리와 하모리로 구분될 당시인 조선 영조25년(서기1749)으로 보는 것이 유력합니다.

 

지금 모슬포우체국이 있는 이 일대는 마을의 중심가가 되었지만

상하모리 분리 당시에는 조그만 하천이 있고 지대가 얕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외곽의 가장 허한곳을 보하는 의미에서

극대라고 하는 것을 세웠다고 구전되어 왔습니다.

 

그때부터 이 일대를 극대왓이라 하였다하나 해방무렵에 이 자리에 석상이 없었습니다.


1971년 우체국 신축을 위해 우체국 뒷편 육군 제1훈련소장관사터를 정비 중

 그 일대에서 석상의 몸통을 발견하였습니다.
모슬포우체국 건물 신축 관계자들이 씻어서 전방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 후 어느날 기둥같은 돌을 또 주변에서 발견하여 다른 한쪽에 세웁니다.
그러다 석상 머리부분을 발견하여 부근 자연석 현무암위에 올려놓았습니다
1990년 5월에 자연석 위에 놓여 있던 머리를 누군가가 들어 머리없이 서있는 몸통 부분에 올려 놓았습니다.
딱 맞는다는 것이 확인되어 그해 복원하였습니다.

이렇게 발견되고 복원된 상모리의 이 석상은 서있는 홀쭉한 사람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아직까지 조사된 돌하르방·거욱·동자석 등의 제주도 석상들 중에서 유일한 형태라서

그 실체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방산과 멀리 한라산 사이에서 날개를 접은 바구미오름을 보며 모슬포를 떠납니다.

Vaughan Williams
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Sir Adrian Boult, cond
(1985 Digital Re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