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산천단이야기

하늘타리. 2014. 6. 14. 00:30

산천단입니다.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

 



뒷면

 




“이 산천단은 한라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으로

조선 성종(成宗)때 목사 이약동 선생이 단소를 배설하였던 유서 깊은 자리다.
명산대천에 제(祭)를 지냄은 예로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중요한 나라 일의 하나로

한라산신제는 백록담에서 봉행되었는데

그때마다 적설과 한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새로 부임한 목사 이공은 인명의 희생까지 내면서 산 정상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받들게 하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세월이 오래되매 신단과 비는 마멸되고 내력만이 구전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이에 신단을 복원하여 그 경위를 밝히는 한편.

목사 이공이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린 자취와 내력을 기록하여 새기고자 한다.

이공의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휘는 약동(約東),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다.
1401년(태종 16) 남해현감(南海縣監) 덕손공(德孫公)의 아들로 태어나 1450년(문종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로 부임하기는 1469년(성종 원년)이었다.

좌임(左任)하는 삼 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도민의 복리증진에 크게 힘썼으니 이 산신단의 설립도 그 한 예로 꼽힌다.
관리로서의 청렴은 조선조를 통하여 공으로 표상되는 바니

제주를 떠날 때의 ‘문루에 채찍을 걸고 바다에 갑주를 던진(門樓掛鞭 海中投甲)’일화가 전해져

마침내 도민의 경앙(景仰)으로 생사당을 세워 기렸다고 한다.
더구나 대사간(大司諫)에 올라서도 제주를 사랑한 나머지 고마조달(故馬調達)의 적정과

수령의 민폐근절책(民弊根絶策)을 상주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었고

현명한 계책을 아뢰어 도민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공의 학문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점필재(点畢齋) 김종직(金宗直), 매계(梅溪) 조위(曹偉)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으니

덕업은 포은(圃隱), 야은(冶隱)의 유맥(遺脈)를 잇고

행실과 문장은 유림의 영수로 나아가고 물러섬이 도리에 벗어남이 없었다.
나이 78세에 별세하자 임금은 예조의 관리를 보내 제사하고 평정(平靖)의 시호를 내렸으며

이름이 청백리에 올랐다.
해동추로(海東鄒魯)라 일컫는 공의 고향 금산(金山)에서는 그 학덕을 기려

청백서원(淸白書院)과 경렴서원(景濂書院)에 향사하였고

제주에서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공이 간 지 496년이 지난 오늘 공의 남긴 덕을 길이 되새겨 삼가 이 비를 세운다.”

檀紀 四三二三年 十月 日 濟州大學校總長 文學博士 延州 玄平孝 謹撰 後學 安東 金膺顯 謹書
漢拏山神祭壇復元 및 紀蹟碑建立推進委員會謹竪

 



 



한라산신제사터

 



 



 




 




 



제사를 지내던 터 옆에 비석이 있습니다.

 



고선비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에

"새로 부임한 목사 이공은 인명의 희생까지 내면서 산정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봉제(奉祭)케 하고 비를 세우셨다 한다."라는

글귀 때문에 이 비석이 이약동이 세운비로 오해를 받습니다.

漢拏山神古墠(한라산신고선)은 예전에 한라산신에게 제사지내던 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약동 이전에는 한라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지냈으니

이약동이 고선비를 세우려면 한라산꼭대기에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제사를 지내게 했던 옛제사터(古墠)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입니다.
그럼 언제 누가 세운것인가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제사를 옮겨 갔으면 옮겨간 시기이후가 될 것이지만

제사를 옮겨간것이 아니고 구한말에 제사가 끊겼습니다.
그러면 제사가 끊긴 그 이후에 이 비석을 세운것이 되지요.

 



그 옆  비석을 봅니다.
근처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1978년에 홍순만 선생이 고선비와 함께 발굴하여 세웠다는 비입니다.

 



몇년전에 내가 제주대학교에 근무하던 시기

이곳 산천단에서 제사를 재현한 며칠후

당시에는 까페이름이 필연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점심을 먹고 대학으로 돌아오는 길에 까페를 들른다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비석에 다가왔는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비석 전면이 깨끗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자를 읽어보았지요.

 

한비석에 漢拏山下有一小山下....라고 쓰여진것이 보이고

 



한 비석에 卽 成宗元年庚寅...이라고 쓰여진 글이 보입니다.
같은 글자체에 글씨의 간격도 균일합니다.

 



두개를 이어서 읽어 봅니다.


漢拏山下有一小山下 ...卽 成宗元年庚寅
濟州牧李約東公之始設....朝家歲歲繼祭

滄桑一變享祀未繼 豈不寒心 余得閒詩偶過北地...

礎基堀得一石記變*****


대략 이런 글이 됩니다.
"한라산 아래 소산(오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이 있고 그 아래 산천단이 있네..

성종원년 경인에 목사 이약동이 산신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모시니 세월을 이어 제사지냈다.
상전벽해로 제향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우리가 한가한 시간을 얻어 우연히 이곳 북쪽을 지나 바닥에서

 글이 쓰인 비석을 파내었다 ...

 



누가 세웠는지 모르지만 제사가 중단된 후 고선비를 세웠고 훗날 유실되었던 것이지요. 

이 두개로 나뉜 비석은 유실되었던 고선비를 다시 찾은 이들이 세운 지문비이구나.

한기의 비석이 동강나있는 것을 두개로 보고 따로 세웠구나....

 



두번째 비석 왼쪽에 정두정鄭斗正, 홍순녕洪淳寧, 김진수(?). ??? 이렇게 4인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문헌상 알수 있는 인물은 홍순녕입니다.

홍순녕은 홍종시의 아들로 제주여자중학교 교장을 하고

북제주갑 제헌국회의원을 한 인물인데 이 비석을 발굴했다는 홍순만의 형입니다.
국회의원생활 7개월만에 사망하셨으니 이 비석은 국회의원이 되기전인 1948년 이전에 세워졌다는 건데

그때는 홍순만선생이 한 15세 이전이라 모를 수 있기도 합니다만

형이 세운 비석이 실전되어 그것을 30년 정도 후에 동생이 다시 발굴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이 비석은 고색창연해 보여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고

광복전후에 세워진 비석인데 이리도 오래되어 보입니다.

 



이 이야기를 3~4년전에 문화계통에 종사하는 분에게 했습니다.
펄쩍 뛰더라구요.
무엇을 안다고 제주의 문화재를 폄하하느냐고...

 



폄하하는 게 아니고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실여부를 규명해보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비전문가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었고...
도리어 이비석들이 이약동때 세운것이라고해서 2011년 5월 9일에

고선비와 제단을 제주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좀 아니다 싶더라구요.

의미가 있다면 최근에 만들어 진것도 기념물이 될 수 있습니다만

신화면 신화, 사실이면 사실 확실한 구분을 한후에 신화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되

사실은 역사적 측면에서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를 거쳐야 합니다.
어째 신화는 사실여부를 따지고, 사실은 신화처럼 애매하게 받아들이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취미로 하던 답사가 피곤해 지고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무렵 퇴직하며 사무실 뺄때. 보유하던 관련자료를 받고자 하지도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부 넘겨줘서

이제는 제주도 관련 자료가 없습니다.

 



요사이 답사와 여행은 육지로 나가고 제주도에서는 경관만을 보고 다니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제주문화원 답사를 따라와서
오전, 조설대
오후, 산천단
제주인들이 환영하지 않을 이야기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