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많이 난 곳이라 하여 여사, 여슬, 내사라고도 불리는 이마을은
청주와 천안으로 이어지는 17번과 21번 국도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주민의 안녕과 쉼터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으며
그 옆 사충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충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정문은 충신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주(金天柱)와 그의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추(聲秋),조카 성옥(聲玉) 등 4명의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亂)을 일으켜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켰을 때
이지경(李之景)이 이 자칭 진천현감(鎭川縣監)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석리(士石里) 여사(如沙)마을에 거주하던 김천주(金天柱), 천장(天章)형제가
자질(子姪) 성추(聲秋) 성옥(聲玉) 과 함께 의거할 뜻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무기도 없이 농기구인 괭이·쇠스랑등을 메고 진천현을 탈환하기 위하여 습격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여 전사하였습니다.
난이 평정된후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은 정문을 내리고 향제(享祭)케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자질(子姪)인 성추 성옥도 고종(高宗) 22년(1885)에 병정(倂旌)케 하므로써
사충문(四忠門)이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싸울 때 쇠스랑으로 용전(勇戰)했다하여 속칭 [쇠스랑]충신이라고도 합니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그 규모는 2평 정도로 되어 있으며 1958년에 개축(改築) 하였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58년 개축한 것으로
정면 1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방을 홍살로 막고 주위에는 회와 돌을 섞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었습니다.
정면에는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고 쓴 편액을 단 일각 대문을 세웠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1886년(고종 23년)에 정문원(鄭文源)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 자료: 진천군 [文化財調書] [文化遺蹟總攬]p. 548
청주간 국도변 내 닉과 같은 이름의 식당
밥을 조금 전에 먹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뒤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 쌍암소류지를 거쳐 서한순효자문으로 가려다가...
조선(朝鮮) 헌종(憲宗) 14년(1848)에 태어나
순종(純宗) 3년(1909)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의 효행을
후세사람이 잊지않고
60여년이 지난 1971년에 지방유생에 의해 세워진 효자문을 보는 것도
의미있을것이라 생각했으나
길이 헷갈려 몸을 돌립니다.
정송강사로 가기 위하여
연곡저수지에서부터 흘러온 성암천을 건너갑니다.
사석교를건너 놋점행복마을로 접어듭니다.
Hugo Wolf
Eichendorff Lieder n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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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ra Streisand, Vocal
Claus Ogerman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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