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블로거기자단팸투어

대구 동화사

하늘타리. 2013. 12. 11. 20:54

동화사를 갑니다.

 

연못 뒤로 부도군이 보입니다. 

그 뒤로 펼쳐지는 팔공산 자락들...

 

 

제일 위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판 앞으로 갑니다.

 

안내문에는 "493년(신라 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유가사로 불리었지만 832년(신라 흥덕왕 7년) 심지왕사가 사찰을 중창할 때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피어 동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고 쓰여있습니다만

절집 홈피에는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합니다.


절집 홈피에서의 연혁을 옮겨 봅니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 下安所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 惟政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尙崇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冠虛, 운구 雲丘, 낙빈 洛濱, 청월 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대웅전방향으로 갑니다.

 

옹호문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사천왕문이라 하는데

이곳에서만 옹호문이라 현판을 달았습니다

 

 

 

 

 

 

옹호문 내부에 걸린 '팔공산동화사옹호문중건기'에 따르면,

원래 옹호문은 지금 봉서루 자리에 있었던 것을 지금 자리로 옮겼고,

이 자리에 있던 일주문은 통일대전 앞 다리쯤으로 이건하였다고 합니다.

 

옹호문은 그 뒤 철거되었다가 2004년에 다시 새웠습니다.

 

 

봉서루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인악대사나무를 지납니다.

 

좋은 인연의 빛 터널을 지나

 

해탈교를 거꾸로 넘어

 

뒤돌아 보고...

 

통일대전으로 갑니다.

 

현재 재건중인 대견사에 모셔지기로 한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스리랑카에서 넘어와서 현재 동화사에서 보관중이며

통일대전앞 선체험관 법당에 가면 친견할 수 있다하여

진신사리를 친견하려 왔습니다.

 

먼저 통일대전으로 갑니다.

 

통일약사대불을 보며 통일대전안으로 들어갑니다.

 

통일대전창문을 통해서 보는 약사대불

 

통일대전 내부는 전면 마당의 약사여래불을 예불할 수 있도록 전면을 창호로 꾸몄으며

이로 인해 금강계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도입경과 설명

 

 

 

 

음수대

 

통일약사여래대불과 석탑

 

통일약사여래대불은 높이 33m, 둘레 16.5m로 1992년 11월에 완공되었습니다.

 몸체 앞에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를 세웠고

몸체안에는 미얀마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하러 선체험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확대경을 통해서 본 진신사리입니다.

 

 

들어왔으니 내부를 한번 돌아봅니다. 

 

 

 

고려천년의 귀향, 초조대장경

 

초조대장경의 활자를 복각하고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1년,

고려 현종은 잦은 외세의 침략에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던 중 초조대장경 조성을 발원했습니다.

불심으로 온 세상을 밝히기를 염원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현종의 발원에 따라 중국 송나라 때 처음 제작된 개보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초조대장경이 이 땅에서 조성됐습니다.

하지만 대구 부인사에 소장됐던 것으로 알려진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고 침략 당시 목판본이 모두 소실되면서 역사적 기록으로만 전해져왔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인쇄본이 국내외에서 발견되었고 

일본 교토 난레이사(南禮寺)에 1,715권이 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여

복원작업을 실시 2012년 일부를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11년과 2012년 약 1000년 세월을 일컬어 1000년의 귀향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려대장경은 팔만대장경의 조조(雕造: 목판에 새겨 만듦)를 말하는 것인데,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江華島)에 피난 중 그 병화(兵禍)를 불심으로 막아내고자 한 것이었으며,

또한 제1차 간행 조판(組版)이 없어졌기 때문에 대장경의 제작이 시급하였습니다.
1236년(고종 38)에 완성을 보았는데 총 81,137장으로 지금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조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일본의 다이쇼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저본(底本)이었으며,

동국대학교에서 영인본이 나왔습니다.

 

 

 

 

수기(守其)대사

화엄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開泰寺) 승통으로 고려대장경 조조(雕造: 목판에 새겨 만듦)책임자였습니다.

 

 

 

일반 사경실

 

 

 

 

 

 

심우도 이야기

 

 

 

이안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돌아나갑니다.

 

 

 

 

하, 시간이 없는데 선체험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통일대전아래 성보박물관은 문이 잠겨있어 못들어가고...

다시 법당쪽으로 올라갑니다.

 

 

 

비석군

 

인악대사비

 인악대사의 전기(傳記)를 기록한 비입니다.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점은 다른 비석들과 구별되는 특징인데

그 이유는 동화사의 지세가 봉황이 알을 품은 형세[鳳凰抱卵形]라고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비문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이 짓고 글씨도 썼는데,

왕희지 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합니다.

 

거사비

 

 

당간지주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두개의 지주(支柱)가 66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높이 310cm, 폭 75×34cm입니다.  

 

 

동화사사적비입니다.

 

 ‘조선불교선교양종 제일수찰 대본산 경상북도··· 동화사적비명[朝鮮佛敎禪敎兩宗 第一首刹 大本山 慶尙北道··· 桐華寺跡碑銘]’란 제목으로

동화사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대웅전 쪽으로 올라갑니다. 

 

 

 

 

인악대사나무 뒷모습

 

설법전

각종 법회와 행사를 치루며 하부에 지하층을 만들어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봉서루앞 봉황알

 

 

봉서루

동화사 주불전 정면에 있는 누각입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입니다.

 

범종루

 

 

 

대웅전

 

대웅전 앞 화엄당

 강원으로 쓰였습니다.

 

대웅전내부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부처님 좌우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계십니다.

 

 

 

영산전

 

‘ㄷ’자형으로 불단을 조성하여 중앙에 석가모니삼존상(釋迦牟尼三尊像)을 중심으로 양측에 16나한을 8나한씩 봉안하였습니다.

 뒷벽에는 중앙에 영취산(靈鷲山)에서의 석가여래의 설법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과

16나한탱(十六羅漢幀)이 모셔져 있는데 이 불화들은 1990년에 봉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산신각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단위 산신탱이 가려져 있습니다

 

조사전

 

27폭의 조사(祖師) 진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중 조선시대 중기에 제작된 보조국사진영(普照國師眞影), 사명당대장진영(泗溟堂大將眞影)이 있습니다.

 

 

칠성각

 

치성광여래와 일광· 월광보살

 

칠성각 오른편에는 수령 200년가량 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심지왕사(心地王師)를 기념하여 심지대사나무로 부르고 있습니다.

 

 

 

 

 

 

 

 

 

봉서루 뒷면

‘영남치영아문’이라고 쓰여있는 현판은  임진왜란 때 영남도총섭으로 활동한 사명대사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원음각

통일범종각이 만들어지기 전에 쓰였던 범종각입니다.

종 외에 운판(雲版), 목어(木魚)가 함께 있습니다.

원음각은 범종각의 다른 이름으로 부처님은 하나의 음성을 내지만 그 음성은 원음이 되어 울려 퍼지며,

모든 중생이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즉, 원음은 부처님의 음성을 뜻하며,

여기에 있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소리는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설법을 대변하는 셈입니다.

 

금당선원으로 갑니다.

 

금당선원 입구의 부도

 

 

이 부도는 동화사에서 약 1km 떨어진 도학동(道鶴洞) 내학(內鶴)마을에 있던 것을 동화사로 옮긴 것으로,

정확한 해당인물과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작 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되며, 보물 60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금당선원으로 들어갑니다.

 

 

 

 

 

금당선원

 

극락전

 

극락전 내부 아미타삼존불

 

극락전 내부에는 1700년대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목조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대세지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삼층석탑

 

극락전 양 옆에는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습니다.

동서 두 탑이 함께 보물 248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이 두 탑은 사찰창건 당시, 즉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마제전

 

극락전 뒤에 있는 당우입니다.

‘수마제(須摩提)’는 서방극락을 칭하는 별명(別名)으로 ‘묘의(妙意)· 호의(好意)’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수마제전 또한 극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대형 금동불로 알려져 있는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수마제전 아미타불좌상

 

 

 

 

오래간만에 동화사에 왔는데

차분하게 보질 못했습니다.

 

진신사리 친견에 마음이 급하여

동화사 동편입구에 있는 일주문 이라할 봉황문에도 가질 않았고

봉황문을 가지 않았으니

봉황문  동쪽 암벽에 서향으로 양각되어 있는 마애불좌상도 보지 못했고

이제 갈시간이 다되었는데

비로암에는 갈 시간이 없습니다.

 

비로암을 못가니

대적광전을 못갈것이요

당연히 비로자나불상과 칠성탱을 보지못하겠지요.

 

절집은 넓고 시간은 부족하니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살펴보는라

부처님의 가피하심을 느낄 여유가 없었음이 아쉽습니다.

 

빠른 시간안에 다시오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