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동 성당입니다.
계산동 성당은 1902년 건축된 영남 최초의 고딕식 건축물로,
1911년 조선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되어 대구 경북지역 사목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이 성당은 故 김수환 추기경이 처음 세례를 받은 곳이자 후에 신학대학을 졸업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은 성당이며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방문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성당의 전신인 대구본당이 처음 자리잡은 곳은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경북 칠곡군의 신나무골입니다.
1886년 당시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본당이 설립된 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한국명 김보록 재임 1886∼1919)가
대구 읍내에서는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신나무골에 본당 거처를 임시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 후 본당은 1888년과 1891년 두 차례에 걸쳐
새방골(현 대구 상리동 일대) 대어벌(원대동 일대)로 옮겨진 후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한국식 팔각 기와 지붕을 이은 목조 십자형 성당을 신축하였씁니다.
1899년 루르드의 성모를 본당 주보로 모신 가운데 축성식을 거행하였지만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제대 위의 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성당은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다시 1년간의 공사 끝에 1902년 세운 성전이 영오늘날의 계산동성당입니다.
설계를 맡은 로베르 신부는 신축을 위해 전주 전동성당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색유리와 철물 등 공사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 주문한 뒤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진척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당 내부에 주교 강론대와 제단을 만드는 공사를 했고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전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종탑에는 두 개의 종이 있는데
이를 헌납한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김 젤마나의 세례명을 빌려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1981년 건축적으로 고딕식 벽돌조 건물로서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계산동성당은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바닥 원형은 보존한 채 대리석을 새로 깔았고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습니다.
성당 정문 앞 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재임 1911∼1938)가 교구장 부임 25돌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며,
교구장 부임 25돌은 곧 교구 설정 25돌이자 계산동성당이 주교좌가 된 지 스물 다섯 해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1986년 성당 마당 한 켠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면서
계산동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한국식 목조 성당을 건립했지만 3년 만에 예기치 않은 화재로 성당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은 채
다시 오늘날의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대구 경북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상 자료 : 가톨릭 Good News)
성당 내부에도 아름다운 교회 유산이 여기 저기서 나타납니다.
제대 중앙 뒤편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이 통례이지만
계산동성당은 다섯 개의 창문 중 가장 작은 가운데 창문 중앙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1899년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한국식 팔각 기와 지붕을 이은 목조 십자형으로 계산동성당을 지을 때
본당 주보로 루르드 성모를 모신 역사적 사실을 상징합니다.
본당 주보 성인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제대 뒤편 중앙 창문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신 것이지요.
또 성모상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902년 성당이 지어질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된 것으로
100년 동안 오색 찬연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습니다.
제대 양쪽 측면에 공관복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당 정문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문양의 대형 창문도
성당 건립 당시 그대로라고 합니다.
제대 양측 네 개의 창문 옆에 세워져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성 안토니오·예수성심·성 요셉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100년을 신자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고딕식 벽돌조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간에는
여느 성당에서 보기 힘든 둥근 모양의 붉은 십자가 패 12개(12사도를 상징)가 박혀 있는데
이것도 100살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패는 성당 축성식 때 크리스마 성유를 발랐던 것인데
오랜 보존을 위해 패 뒤에 벽돌을 붙여 기둥의 벽돌과 벽돌 사이에 끼워넣는
특이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성당 설립 당시 사용되던 제대는 1913년 제단 증축 공사를 하면서 걷어내 현재 관덕정 순교자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913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까지 사용되던 제대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나무 제대 뒷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벽을 향해 있던 공의회 이전 모습 그대로이며
제대 하단부 중앙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신자석 양 옆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199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본래는 단순한 색 유리만으로 이뤄진 창이었으나
교구 제2주보 성인인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10명의 한국 성인상을 덧붙였습니다.
계산성당 마당에 이인성나무가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대구가 낳은 천재적인 화가 이인성이 그린 ‘계산동성당’의 그림 속에 나오는 감나무를 시가 지정 보호한 것입니다.
작품에 등장한 감나무는 현재 살아 있지만 가지가 부실한 상태라 보통 이상으로 감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The Lord's Prayer
Albert Hay Malotte (1895 ~ 1964)
Gary Karr (Contrabass), Harmon Lewis (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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