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6차. 2-1. 신륵사 그리고 영월루에서 양섬앞까지 강변로를 걷다

하늘타리. 2013. 9. 14. 22:21

한강 1300리를 걷다 기행 중 여섯번째의 둘째날입니다.


새벽 네시
신륵사입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절집 새벽예불시간에 맞춰 눈을 떴습니다.
대웅전 주변... 법당이 보이고 독경소리 들리는 곳에 앉았습니다.

단지 바라보면서 예불문을 옮겨 봅니다.

 

맑고 맑은 물 감로차 삼아 삼보님 전에 공양올리옵니다.
자비로서 받아주시옵소서.....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前
願垂哀納受
願垂哀納受
願垂慈悲哀納受....

 

동산 혜봉스님의 시 한수


"....
새벽 예불 목탁소리 하늘은 개이고
새벽별 요요하게 뜰을 밝히네

 

두 눈썹 일월(日月)은 밝아
조각달 허공에 흐르고..."

 

'조각달 허공에 흐르고" 부분입니다.

 

구룡루 주련입니다.


현판 좌우에 두줄만 보이는데 네줄을 이으면 이렇습니다.
梵王帝釋四天王 佛法門中誓願堅 自然神用護金仙 列立招提千萬世 

 

이 주련은 쌍계사 천왕문 주련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순서가 조금 바뀌는데요
梵王帝釋四天王 佛法門中誓願堅 列立招提千萬歲 自然神用護金仙의 순서가 됩니다.
원전인 화엄신장 옹호게후에도 이순서로 기술되고 음송됩니다.

신장들이 불법 수호의 서원을 견고히 하여 천만년 동안 신통과 묘용으로 부처님을 호위한다는 내용입니다.

 

숙소로 돌아가 점을 찍듯이 아침공양을 하고

 봉다리커피한잔을 맛있게 마십니다.

 

어제 회원들이 돌아보지 못한 보제존자 석종을 신정일선생이 안내하고 있습니다.

 

7시 반에 버스가 출발한다고 하니 절집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부근에 일주문 공사를 하는데 카메라를 계속 피하며

조포리 나루에 있으니 조포정이라 치고 꾹꾹... 

 

신륵사사적비 

 1985년 이항녕李恒寧에게 받은 비문을 당대의 명필인 김충현金忠顯이 써서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신륵사의 사적을 기록한 후 뒷면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새겨 두었네요.

 

신륵사 중수비.

 

흰색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통상 화강암을 이용하는데 이곳에서는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도 흰색 대리석입니다.

 

유명조선 신륵사라고 쓰여있습니다.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이지만 당시로는 자랑스러울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우리는 자주국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임금도 중국에서 인정을 해주어야 했고 공식문서 연호도 중국것을 썼지요.
명이 망한 후 조금 애매해 집니다.
오랑캐로 여기던 청을 상국으로 인정하기가 참 어려웠지요.

그래서 연호를 비공식적으로는 숭정후 얼마얼마라고 씁니다.


눈가리고 아웅..

 

 다시 중수비이야기로 돌아가서...

여기 비문인가 아니면 전탑 중수비인가에

고려말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부친인 한산군 이곡이 이 곳을 찾아 강물의 푸르름과 아름다움이 쪽빛색깔보다 곱고

절벽의 모양새가 굴레의 그것과 비슷하다 하여 신륵神勒이라 하였다고 쓰여있다고 합니다.

 

직접 읽지 못했으니 무어라 이야기하기 뭐합니다만

나옹선사는 입적이전에 이절과 관계가 없었고 그 이전에도 이절 이름은 신륵사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심정洗心亭에 센서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연꽃 모양의 돌에서 몇 줄기로 갈라져 약수가 흘러나옵니다

운치는 없지만 신기해서 목마르지도 않는데 물한모금 마셔봅니다.

 

 세심정이 만들어진 후 필요 없어진 감로수조


흙을 채워 화분으로 쓰는 듯한데 물빠짐이 애매한지 화초들이 자라지 못하는듯 합니다. 

 

강변을 따라 삼층석탑옆으로 갑니다.

 

 

안개 자욱한 물길을 조망하는 것은 그저 바라봄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수양함과 같습니다.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양이 않되는 이 몸은 찍은 자리 찍고 또 찍고 하는 킬링타임셔터놀이만을 합니다.

 

 

 

 

 

 

 

마당 바위에 앉아 ...

거북이와 이야기 하다가...

 

극락보전으로 갑니다. 

작별인사드리고...

 

조사전으로 갑니다. 

 

문득 생각나 대장각 뒤 소나무 길을 갑니다. 

  

 

안개낀 소나무길...
제법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그윽한 산내음
소리 없이 스며들어
청아한 목탁새 울음소리
산사에 울려 퍼지네

 

똑 똑 또르록
똑 똑 또르록

 

맑은 메아리
허공을 메우네
깨달음의 소리
지혜의 소리구나"

 

혜봉스님시 '목탁새 울음소리'에서... 

  

 

 

 

 

소나무길을 걸어 보제존자 석종에 왔습니다.

 

신륵사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고려의 선승이었던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나옹선사는 이절에서 시무하던 스님이 아닙니다.
양주 회암사주지로 있으면서

 당시 쇠약해져 가던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려 애쓰던 스님입니다.
1376년 우왕 2년에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친 나옹스님은 도리어 임금으로 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우왕이 명을 내립니다.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천사로 가라'.

당시 나옹선사는 몸이 엄청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회암사 열반문을 나서서 유배길에 오른 스님은 일주일 후 신륵사에 닿았습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수 없던 스님은 잠시 몸을 쉬러 왔던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삼층석탑자리에서 다비를 마친 스님의 유품들은 조용히 수습되어 어딘가에 보관됩니다.

 

그런데 이적이 일어나지요.
스님이 꼽아놓은 지팡이가 은행나무로 자라는 것입니다.


3년후인 1379년 우왕 5년에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禪覺眞堂을 세우게 됩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예종 1년인 1469년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성종 3년인 1472년에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현종때와 숙종때 중수했습니다.
철종 9년인 1858년에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또 중수했습니다.

 

최근 4대강 사업기간에도 많은 지원을 받아 극락보전을 해체보수하는 등 많은 중수를 했으며

일주문 등을 새로 만들고 있지요.

 

석종은 고려후기 부도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석등에 조각된 비천상과 용 조각이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석종비의 글씨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섬세하고 매우 선명합니다.

 

일곱시 삼십분 신륵사를 출발한 버스가 일곱시 삼십육분에 영월루 조각공원앞에서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영월루로 올라갑니다. 

 

 

 

 

 

 

조각공원을 지나고... 

 

 

  

참전기념비를 지나고 ...

 

두기의 삼층석탑옆을 지납니다. 

 

 

 

 

 

 

 

현충탑입니다

 

 

주변에 공덕비 등을 모아 놓은 비석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엉뚱한 이들이 있나 하나하나 둘러봅니다.
재대로 된 사람은 오래 기림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이는 비석치기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영월루 아래서 건너편을 봅니다.

 

 강 건너 저편이 신륵사가 있는 곳입니다.

역광이 너무 짙어 식별이 어려운 것이 아쉽군요.

 

 

영월루 공원 정상에 있는 누정樓亭 영월루입니다.  

 

 

영월루라는 이름은 지금의 장소로 옮겨질때 지어졌다고 합니다.

 

 

 

 

 

 

  

 

주변 산책로를 따라왔더니 남한강소식이라는 처음보고 듣는 노래의 가사비가 있습니다.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절벽에 암혈巖穴이 있는데 이 곳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이 지역의 이름을 황려黃驪라 칭하였다는 것이지요.

후에 여흥驪興이 되었고 지금의 여주입니다.

 

여주는 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요 군사적 요충지로 오래전부터 고대 역사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구려 땅으로 편입되어 골내근현이라 했고

서기 550년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신라 땅이 되어 황효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뒤 고려시대에 들어서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황려현이 되었습니다.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강원도 원주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경기도로 복귀되었고,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에 여흥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인 1401년(조선 태종 1년)에 음죽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고쳤고,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세종대왕릉을 현재의 능서면 왕대리로 옮기면서 천령현을 병합,

여주목으로 승격시키고 목사를 두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여주군이 되었고,

이달 말 부터는 여주시가 됩니다.


명성왕후 민비와 민씨 집안의 세력에 도전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홍영식,

그리고 이완용의 고향이 이곳 여주입니다.


공원을 나와 상리사거리 

 

골목을 지나 강변로로 갑니다.  

 

 

 

강변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여주대교를 돌아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중,고등학교를 봅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강을 보고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담장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젯밤에 본 그림이군요.
여주읍의 옛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남한강 절벽에 우뚝 자리잡은 영월루 아래로
여주의 새 백로가 날고 전통 모내기와 여주역 그리고 황포돛배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명 빵차라고 불리우던 협궤열차 수여선 증기열차가 종착지인 여주역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고개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주변풍광을 가슴에 넣습니다.

 

 

 

 

 

 

여주군청 모서리에 서있는 옛 여주 나루터 표석을 만납니다.

 

여주읍과 북내면 오학리 사이에 운영되던 나루로 학동나루, 앞나루, 여주나루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까지 번성했으나 1964년 여주대교의 개통으로 이용이 감소되었으며,

1972년 홍수이후 제방을 축조하면서 사라졌습니다.


1987년 12월 26일 경기도에서 뜬금없이 표석을 세웠습니다.

 

여주 나루터에는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오월의 어느 날,

여주 나루터를 떠난 한척의 배가 마암 앞에 떠 있었고

그 배에는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색은 이태조의 벼슬제의를 거절한 채 초야에 묻혀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며 시흥이 올랐을때 이색이 이성계가 보낸 술이라며 술한병을 꺼냈습니다.


그 술을 마신 이색은 그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색만 마신게 아닌데 이색만 죽었으니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나루가 어디에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하기 조차 어려우니 강물만 봅니다. 

 

 

 

 청심루터 표석

고려시대 이래로 시 쓰는 사람 치고 청심루를 다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남한강이 현재의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고,

여주군은 그 중심에 있었기에 객사에 머물다 가는 선비들이 청심루를 읊어서

고려 때의 이곡, 이색, 정몽주, 이승인과 조선조의 서거정, 신용개 등이 시를 지어 현판에 걸었답니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은 1490년 여주 청심루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어가를 따라온 2품 이상의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강산이 가장 좋으니 만약 어진 수령守令이 아니면 반드시 유람에 빠져서 백성의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할 것이니,

잘 선택하여 제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라고까지 하였답니다

.
또한 청심루는 성종·중종·숙종·영조·정조 등 여러 임금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특히 숙종의 어필이 걸려 있었으며,

임금 행차시 과거시험 및 수군사열 등 주요 국가적 행사가 개최되었었습니다.

 

해방 전까지도 관상목觀賞木이 많이 있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하나

1945년 8월 22일 군수 관사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그 화재는 제국주의 일본과 그 앞잡이들한테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이 일으킨 것인데

그때의 여주 군수였던 강진수가 그 앞잡이 노릇을 워낙 지독하게 했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청심루 곁에 붙어 있던 그의 사택에 불을 지른 것이

청심루에 옮겨붙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퇴계선생 시 한 수와 옛그림 한 장 참고로 올려놓습니다.


宿淸心樓
沙彌撞鐘一山暮. 江城鼓角迎歸櫓. 望中燭影撒如星. 淸心樓高啓窓戶.
使君置酒慰客愁. 笛聲憤怨霜飛秋. 酒?人散江月出. 夢騎白鶴遊蓬丘.

 

앞줄만 해석하지요.
"사미가 종을 치니 온 산이 어두워지고 돌아오는 배를 맞아 강성(江城: 여주)의 북소리와 나팔소리 울린다.

별처럼 흩뿌리는 촛불 빛속에서 청심루 높은 창문을 연다." 

 

청심루를 복원하자는 사람이 많다는데...
허망한 이야기이지요.
청심루가 중요한 게 아니고 청심루에서 바라본 주변풍광이 아름다웠다는 것인데

주변풍광을 복원해야지 왠 청심루를 복원합니까? 

 

훈민정음표석

 만들어 세운 이유


주변이 허전해서....

 

마을쪽으로 옛담벽이 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대로사입니다.
대로사비가 있는 쪽 홍살문 아래 문은 잠겨져 있습니다.

 

문위로 사진 몇장찍고

 

 

빙돌아서 대로사 정문으로 들어갑니다.

 

대로사 기적비와 대로사 추양재 기실비.

 

추양재.  

 

 

내삼문인 장린문長隣門 

 

 장린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사당 정면에는 1785년 사액받을때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정각제학 김종수가 써서 내려준 대로사大老祠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방향이 효종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대로사란 정조가 친히 지은 이름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입니다.

 

실록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대로(大老)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명칭이 붙게 된 연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철폐할 때

전국에 있던 송시열의 서원 ·사우 44개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어

대원군이 남겨놓은 47서원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강한사라는 편액은 강당 안쪽에 걸려있습니다.

 

 

 

 

 

대로사 비각.

 

대로사 비

 

송시열이 태어난 후 세번째 맞는 회갑년 즉 1787년에 이를 기념하고자 대로사비를 건립했습니다.

비 앞면에는 대로사비라는 제목이 있고, 

비신의 좌측면에서 뒷면을 거쳐 우측면으로 돌아가면서 쓴 비문은 정조가 친히 짓고 쓴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실 뒷쪽 평가가 더 적합할 만큼 송시열이후의 당쟁의 참화는 지금까지도 그 폐단이 상존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효종과 북벌을 의논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상이몽이었습니다.
효종은 실질적인 북벌론을 꾀했고 송시열은 단지 존명배청의 논리로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효종의 북벌론에 맞장구만 쳤을 뿐이지

본인은 단지 어찌 청나라오랑캐가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무너뜨릴수 있느냐 따위의 생각만을 한것이지요.
그래서 효종이 1659년의 기해독대에서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에는 당황하여

수신제가후 치국이 북벌의 선제조건이라는 등 뜬구름잡는 이야기만 늘어 놓지요.


가장 믿었던 송시열의 실체를 알게된 효종은 열받게 되고 두어달 뒤 숨을 거둡니다.
사실 정권의 실세로 임금을 우습게 알던 송시열은 효종의 관을 시신보다 작게 만들게 하고

장지도 지관들의 건의를 뿌리치고 자기마음데로 정하여 10년 조금지나 왕의 능에 빗물이 스며들고야 맙니다.
세상 거리낄 것 없이 영화를 누리며 정권을 주름잡던 송시열은 훗날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송시열이 죽은 100년 후 정조가 송시열의 사당을 짓도록 왕명을 내립니다.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지을 수 있게 한데에는

그때까지도 실권을 휘두르고 있는 노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는 정치적 제스츄어였지요.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 전면에 다시 등장한 노론 세력이 정조에게 큰 도움을 준것은 없습니다.
온나라에 송시열의 사당만을 잔뜩세웠고

송시열의 치열한 학문적 자세는 제껴두고 나쁜 영향만을 온 조선에 뿌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 학계나 정계에서는 학문적, 정치적 차이에 대한 건전한 토론이나 절충은 없고

나를 비판하는 자는 사문난적이거나 역적이니 죽여야 한다고 상대편을 매도합니다.

 

왔던 길을 돌아나가 천도교 여주교구앞을 지납니다.

천도교는 1860년 교조 최제우에 의해 창건된 종교이지요.

원래 창건 때의 이름은 동학이었으며

천도교라는 이름은 3대교주 손병희에 의해 1905년 12월 1일에 붙여진 것입니다.


여주는 동학활동을 하던 2대교주 최시형이 이곳에서 잡혀

이교 반란의 죄목으로 처형된 슬픔의 장소입니다. 

 

여주팔경 驪州八景

 

신륵모종神勒暮鐘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마암어등馬巖漁燈 마암앞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학동모연鶴洞暮煙 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연탄귀범燕灘歸帆 강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양도낙안洋島落雁 양섬에 기러기떼 내려앉는 모습
팔수장림八數長林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이릉두견二陵杜鵑 영릉과 영릉사이의 두견새 우는 소리
파사과우婆娑過雨 파사성(婆娑城)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1980년대 말까지 가동했다는 경기실크 공장이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

잠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적극 육성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누에치기가 농촌에서는 소득 작목으로 큰 인기를 얻어

1976년에는 사상 최고기록인 4만 2천 톤의 누에고치를 생산하였으며

생산수출액도 매년 증가하여 1980년대에는 연간 5~6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여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제경기의 침체와 우리나라 농촌여건의 변화로

누에고치 생산은 매년 감산되어 최근에는 전량수입에 의존 가공수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주는 1976년까지만 해도 연간 누에고치생산량이 경기도에서 1위하던 지역입니다.
1960년대 142톤여의 누에고치 생산에서 1976년에 492톤까지 생산하였고

양잠조합,양잠연구소,실크공장이 있어 지역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었는데

1993년 누에고치 1.5톤 생산으로 여주의 양잠이 막을 내리게 되었지요. 

 

여주향교부근에 잠사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양잠에 관한 민속품과 자료 1천여점이 전시되어 있고,

누에치는 과정과 명주실 뽑기, 명주짜기 등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이 되기까지의 과정등을 실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양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여주의 노래 

 유달영 작사 김동진 작곡인데 효종의 북벌에 관한 이야기가 세종의 훈민정음보다 먼저 나오는 것 보니 산뜻합니다.

 

봉마다 푸른 솔에 싱싱히 어린
북벌의 칼을 갈던 우람한 뜻과
정음을 지어 펴신 어진 슬기가
봄하늘 태양으로 우릴 기른다
굽이쳐 흘러가는 무궁한 강물
강물처럼 무궁한 여주의 마음

 아까 여주팔경에도 이릉이라는 말이 나오고
여기 노래가사에서도 효종과 세종의 이야기가 함께 나오는데...
같이 걷던 분 중 왜 효종과 세종이 같이 언급되냐며 의아해 하는 분이 계셔서...

혹시??.. 해서 적어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방향 전방인 여주 왕대리에는 능이 두곳 있습니다.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합장릉인 영릉寧陵입니다.

 이 두곳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하고  사적 제195호로 관리합니다.

세종대왕과 그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은 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인 광주 헌릉에 있던 것을 1469년에 이장한 것이고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의 합장릉 영릉寧陵은 1673년 구리 건원릉 부근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습니다.

 

그런데 두 능의 이름이 같은 발음이고

사람들이 주로 세종대왕릉에만 가다보니

영릉은 세종대왕릉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지요.

 

청심루라는 표석이 또 나옵니다

 

표석이 아니고 박춘원이라는 조선의 문신이 청심루를 읊은 시입니다. 

 

남한강을 가로 지르는 지역 내 교량 중 가장 길다는 세종대교와

그 아래 밟혀있는 양섬을 봅니다.

 저 섬에 기러기 때 내려앉는 모습이 여주 8경중 5경입니다만

2006년 말 이 다리가 놓이면서 양도낙안羊島落雁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다리 자체에 조명시설을 잘 갖추겠다고 이야기는 하던데 누가 밤에 여기 다리 야경보러 올까요?


그리고 연탄귀범燕灘歸帆도 없어졌지요
양섬앞으로 흐르는 물길이 제비여울입니다.

이 제비여울로 돌아오는 배를 보며 연탄귀범燕灘歸帆을 노래 했는데

이제는 그 소재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南漢江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며 아낍니다.
여강은 여주를 신라말 고려초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명사전에서 이규보를 찾으면 본관이 황려라고 나오지요.
이규보 당시에도 황려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던 것입니다.

 

이규보는 황려라는 이름의 유래를

‘한쌍의 말이 기이하게 물속에서 나왔다하여 고을이름이 황려라 하네.

시인은 옛것을 즐겨 번거롭게 표현하지만

오고가는 어부야 어찌 알리오’라고 시로써 이르고 있습니다.

 

이규보의 시를 보니 생각나는 한 수
이규보는 시문의 기재奇才일 뿐이 아니라 회문시回文詩에서도 탁월하였지요.
회문시回文詩는  순서대로 읽은 후,

끝 글자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문자까지 읽어도 뜻이 통하는 詩 형식입니다.


그리고 뜻이 통할뿐더러 운韻도 맞아야 시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美人怨 한 수

腸斷啼鶯春   꾀꼬리우는 봄날, 애간장이 타는데
落花紅簇地   떨어진 붉은 꽃잎들 땅을  덮었네
香衾曉枕孤   향내나는 이불속 새벽잠이 외로워
玉瞼雙流淚   옥같은 고운 뺨에 두 줄기 눈물흐르네
郎信薄如雲   못 믿을 님의 마음 얇은 구름 같으니
妾情搖似水   내 마음 물처럼 흔들리네
長日度與誰   기나긴 날을 누구와 지낼까
皺却愁眉翠   주름지는 눈썹, 수심으로 찡그리네

 

그리고 위시의 회문시는 다음과 같겠죠

翠眉愁却皺 誰與度日長 水似搖情妾 雲如薄信郞 淚流雙瞼玉 孤枕嚆衾香 地簇紅花落 春鶯啼斷腸


내용은 비슷합니다. 

 

자전거길 방향표시

여주보까지 자전거로는 금방이지만 걸어서는 한 40분 넘어 가야겠네요.


자전거타는 이들이 부럽기는 또 처음이네요.  

 

양섬을 밟고 있는 세종대교를 보고  

 

오래전 같은 자리에서 본 양섬을 봅니다. 

 

다시 양섬을 보며

지역시인 김용수가 노래한 '나의 양섬에 내리는 기러기'를 읊어 봅니다. 

 

"태양 쏟는 오후의 남한강
흰 물총새 떼 양섬으로 부양한다.
외떡잎 줄풀이 푸른 섬을 흔드는 배경
나도 한번은
바람 부는 수채화가 되고 싶다.

 

수줍은 달맞이꽃,
고백할 듯 벙근 나팔꽃
입술 보다 빨간 멍석 딸기를 익힌
바람이 깃든 잉어빛 양섬 위로
밤이면 강 속에 파고들어
살고 싶어 죽겠다고
쏟아지는 유혹의 별빛 화사하게 부서진다.

 

철새들도 못 잊는 양섬 대합실
풀빛 잇닿은 하늘의 가장자리
섬 속을 따라 거닐면
나는 아직 조용한 강 그림자가 된다. "

 

양섬은 여주 하리 북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입니다.

조선시대 가축방목지로 이용되었던 섬으로  양을 길렀다고 하여 양섬이라고 하지요.

원래 이름은 벌섬인데 벋은섬으로 변하고 다시 버들섬으로 변하여 일시 양섬楊島이라 하다가

현재 이름 양섬羊島으로 쓰이게 되었으며

 섬앞으로 흐르는 연자탄燕子灘에서 임진란 때 제비여울 전투가 치러졌습니다.

 

옛날 이야기이지요.
이제는 인조잔디로 조성된 2면의 야구전용 구장이 섬의 주인노릇을 합니다.
생활체육 야구동호회원아니면 이제는 그 섬에 갈일이 없지요.

 

그렇게 관심 않가지고 있는 사이

아까운 것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들이 하나 둘 우리곁을 사라져 갑니다.
 

그냥 고개를 뚤레뚤레 돌리며 주변을 봅니다.

 

 

 

 

성곽처럼 생긴 빌라

 

 

소양천을 넘어가는 보도교 

 

  

다시 양섬

 

 

 

 

발에 흙이 밟히지 않는 이 건조한 자전거도로를 내가 왜 걷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모를 화가 납니다.

 

 

 

 

혼자 열받다가 일행이 앞장서 걸어간 자전거루트를 벋어나

장자터로 넘어가는 삼림욕장공원으로 왔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면 너무 돌아갈 것이고

 

산길을 뒤지고 

 

풀숲을 헤치고 내려가 일행들 뒤를 따릅니다. 

잠시 뒤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