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다시 남한강을 넘어 갑니다.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으로 건너왔다 다시 건너가면서
부론면 사무소 앞을 지나 개치나루터 옆을 지났습니다.
아쉽게도 내가 차창밖을 바라보는 방향이 아니고 반대쪽 남쪽에 있습니다.
신경림의 시 '개치나루에서'로 대신하지요.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다
그 해 봄에 꽃가루가 날리고
꽃바람 타고 역병이 찾아와
마을과 나루가 죽음으로 덮이던 고장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
내 외로운 친구 숨죽여 떠돌다가
저 느티나무 아래
몰매로 묻힌 고장이다
바람아 다 잊었구나
늙은 나무에 굵은 살구꽃이 달려도
봄이 와서 내 친구 꽃에 붙어 울어도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지만
죽음 위에 꽃가루 날리던 나루이지만
원통하게 내 친구 묻힌 고장이지만
모두 다 잊어버린 장바닥을 돌라
한산한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읍내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그 설움만 잊은 것이 아니고
그곳에 나루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혀지고 단지 박제된 스토리만 남은 것이지요.
그나마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개치나루 건너 충청도 땅의 강변마을과 나루는 이름 조차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흔적도 없지요.
옛 마을 이름은 의암마을이고, 마을 앞에 버렁말나루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잊혀진 충청북도의 한 곳을 지나고 ...
경기도 여주군 땅인 삼합리를 지나 삼합교를 넘어 갑니다.
다리를 건너 차가 섭니다.
점동면 장안리 재짓말 들에서 삼합교를 돌아봅니다.
지나온 마을 삼합리는
삼 강(남한강·청미천·섬강)과 삼 도(강원·경기·충청도)가 한곳에서 만난다 하여 삼합리라고 합니다.
삼합리 북서쪽에서 청미천과 남한강이 만나고
그 보다 앞서 삼합리 북동쪽에서 섬강과 남한강이 만났지요.
섬강과 청미천이 만나는 그 건너가 강원도이고
삼합리마을 남쪽 소너미고개를 넘어서 충청도 충주땅에서 경기도 여주로 들어왔습니다.
남한강을 향해 달려가는 청미천을 따라 갑니다.
하천 넘어 삼합리마을도 힐긋거려보고
뒤돌아보기도 하며 강변을 걷습니다.
건장이 마을 방향으로 갑니다.
여강길 2코스를 거꾸로 걷는게 되는군요.
건장이마을방향으로 들어와서 얼마 안걸었는데
건장이마을 방향표시는 사라지고 중군이봉 방향표시가 나옵니다.
아마도 여기가 건장이 마을이라는 것일텐데
그 표시가 없으니 아는 사람만 아는 표지가 되어 버립니다.
두어채의 집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한참 오르막을 오르는 중간에 서있는 방향표시판
이 아이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아직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이니 여기가 중군이봉은 아닐테고
느닷없이 도리마을회관 방향표시가 나타납니다.
15분 이상을 헉헉거리며 올라갑니다.
여기가 정상부이니 중군이봉이 되겠지요.
15분정도 내려 와서 만난 또 다른 표시판...
그 표시판을 지나 도리마을방향으로 갑니다.
펄럭이는 현수막들을 만납니다.
몇장의 현수막을 지나 다가갑니다.
바보숲 느림보강 등불학교, 바보숲 명상농원이라고 문패를 달고 있습니다.
아... 그 토종닭을 키우는 부자가 된 시인의 농장이구나
들은 바에 의하면 글을 쓰며 자신을 뒤돌아 보려 내려 왔다는데...
일대에 조류인플레인자가 돌아 가금류를 폐사시켜야 할 때
후배가 폐사시키지 않고 빼돌려 가져다준 토종닭 다섯마리를 키우기 시작한게
돈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겠다고 찾아왔는데
내려온지 얼마 않되어 한강변 큰공사가 진행되었죠.
하루 종일 계속되는 소음으로 이곳을 버리고 타지를 떠돌았답니다.
돌보는 이 없으니 기르던 닭들도 죽었겠지요.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나를 고민하던 어느날
사라진 닭이 병아리를 이끌고 돌아왔답니다.
지역신문과 인터뷰한 시인의 글에 의하면
"어느 숲에선가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고 낳고 기르면서 고통을 이겨낸 닭들에게 부끄럽고 눈물 났다.
그리고 경이로운 생명에 머리가 숙여졌다.
비로소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결코 생명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닭이 나를 구원해줬다."라고 쓰여 있지요.
이후로 시인은 닭을 '닭님'이라고 부르며 귀히 대한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지 않고도 당연히 고마울 겁니다.
900여마리 이상으로 늘어난 토종닭이
귀농한지 6년만에 농촌진흥청으로부터 '강소농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현재의 경제적 여건을 마련해 주었고
그 들어오는 돈을 바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
시인에게 닭님 그 이상의 존재인 것이지요.
사실 나는 식용동물을 기르면서
기르는 동물을 자식같이 생각한다는 등의 말을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아니, 자식을 길러서 잡아 먹으라고 돈 받고 팝니까?
식용동물을 건강하게,
그리고 무게가 더 나가게 기르는 것은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소위 바보숲농장에서 닭을 방목해서 키운다고 자랑하는데
그렇게 해서 육질이 더 좋다고 가격을 더 받을 것 아닌가요.
그렇게 닭님으로 귀하게 모신다면
자연수명 되어 스스로 이세상을 떠날때까지 놓아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곡식이나 야채를 기르는 사람이 생명운동을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잡아먹으라고 길러서 파는 식용동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생명운동한다는게 나는 그냥 조금 우스울뿐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요지경이니 이런사람 저런사람 살아가는 것이고...
어쨓든 돈을 버니 돈이 있으면 존경이 따라오는 세상에서는 큰소리칠만하지요.
한강
참 이상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 물먹이고, 여러사람 띄웁니다.
그런데 무언가 길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니 길이 바뀌었습니다.
중군이봉에서 신선바위를 지나 산에서 내려와
청미천과 남한강합수지점을 지나 도리마을회관으로 가야 하는데
표시를 따라오다보니 루트를 바꾸었는지
바보숲농원 옆으로 내려와 회관으로 가지 않고 사장골로 바로 빠지도록 했습니다.
지나가기만 하는 뜨네기들이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것 같습니다.
내려온 산을 뒤돌아 봅니다.
그리고...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이름 그대로의 채송화
시멘트 갈라진 한 틈에서 나와 악착같이 버팁니다.
단순히 버틸뿐아니라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습니다.
須於花上看生理 꽃에서 생명의 이치를 보아야 하니
然後方爲看得花 그래야 꽃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꽃과 나무로 관심사를 옮깁니다.
강둑으로 갑니다.
도리 마을 강둑으로 올라 섰습니다.
막힌 마을이면서도 나루가 없는 마을
이제는 마을 이름을 바꾸어야 할 듯 합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하나뿐이라서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 나가야 했기에
지역어로 되레라고 하던 곳이 도리라는 마을이름으로 정착되었습니다...만..
이렇게 우리처럼 중군이봉을 넘어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제는 막힌 마을이 아니지요.
아, 아니구나. 지금도 차길로는 막힌마을이구나 .
여주에서 들어오건,
충주에서 들어오건
점동면 장안리의 승안교회에서 부터 이곳 도리까지는 길이 하나뿐이 없습니다.
아, 그래서 큰길이 돌아가는 마을이라는 거구나.
건너편 강천리의 강천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따라 흘러야 할 강을 봅니다.
강변에 모래사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사장골이라고 이름 붙여진
도리의 남한강 하류쪽 방향으로 갑니다..
예전부터 아홉사리길이 있는데 도리마을이 왜 막힌마을이냐고 생각했었는데
아홉사리길도 발로만 다닐 수 있는 길이지요.
도리 사장골에서 흔암리를 잇는 소무산 산길이 아홉사리길입니다.
좁고 험하며 아홉 굽이를 구불구불 돌아나가게 되어있어 아홉사리라지요.
본래 ‘사리’는 ‘국수 혹은 새끼 사리'와 같이 구불구불한 길이나
고랑을 뜻하며,
고개 단위로는 가장 작은 단위라 합니다.
예전에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뱃길로 편안하게 강을 건너 한양으로 갔겠지요.
돈이 없는 사람은 이런 구비구비 국수사리처럼 이어진 산길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즐겁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청운의 꿈을 꿀 수 라도 있으니...
하지만 수 없이 많은 낙방거사들은
돈떨어져, 신발떨어져 절둑 절둑 절며 끌며 이길을 되돌아 갑니다.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은 한양으로 시험보러 가는 길이니
아직은 의기양양하게 경사를 올라갑니다.
불쑥 불쑥 나타나는 군사용 참호가 신경에 무척 거슬립니다.
언제나 이런것들이 필요없는 세상이 올까요?
기대난망이겠지요.
의식적으로 숲만 보고 나무만 봅니다.
아홉사리 구비길이니 구비도 잘 보아야지요.
아까 중군봉에서와는 달리 이 아홉사리길 대부분에서는 여강을 보면서 걸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덕연 시인은 이 아홉사리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강물 허리안고 도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이라고
노래합니다
몇개의 조그만 계곡도 만날 수 있고요.
마음이 들뜰만 하면
간간히 나타나는 참호시설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군요.
아홉사리길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여강길 1코스 정방향으로 오면 아홉사리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지요.
그 지점을 표식하기 위해 장승이 서있습니다.
강 건너 목아불교박물관 관장님이 세웠다는데...
늘울지킴이,
얼물지킴이
늘울과 얼물...참 어렵네요.
늘울, 하늘의 울타리.
얼물, 얼이 흐르는 물.
그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흔암리마을길로 나왔습니다.
색깔이 흰 커다란 바위인 흔바위가 마을 입구에 있었다하여 흔암리입니다.
강천면 굴암리로 연결하던 흔암리 나루는 지금은 강천섬이라고도 하는
수중섬인 하중도 경작을 위한 농선이 주로 다니던 곳이지요.
1972년 나루주변 홍수로 인해 마을이 모두 이주하면서 나루의 기능도 없어졌습니다.
이백년이 넘은 홰나무가 흔암리 나루터를 혼자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오늘 흔암리나루터에서 우만리나루터까지의 길을 강변을 따라 걷는다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소나무속으로 오솔길이 나있고 그 길이 1Km가 넘는 길입니다.
솔밭옆으로 강물은 흐르고......
그런데... 선두가 나루터쪽으로 가지 않고 선사유적지쪽으로 발길을 잡습니다.
난감하지만 따라가야지요.
의미없는 사진이나마 꾹꾹 눌러봅니다.
그래도 이 길은 선사유적지를 둘러 볼 수 있어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 흔암리는 3천년이 된 ‘탄화미’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벼의 화석인 탄화미는 기원전 7세기 것으로 파악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미 벼농사를 지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발상지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움집도 발견되었고
이 주변 여강을 따라 흔암리 일대에는 많은 유적들이 나오고 있었다는데
이제는 말그대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선사주거지의 표시
안내판만 서있고 옛 주거지는 가까운 다른곳에 복원하였습니다.
마을중심부를 지나 움집을 복원한 곳으로 갑니다.
16기의 집자리가 발굴되었다는데
그 중 12번째 집에서 탄화미 등 5곡의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간단히 돌아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판을 참조하세요.
마을 길을 지나며 습관적인 사진을 계속 찍습니다.
어, 이논은 벌써 수확을 끝냈습니다.
오늘이 8월 24일
빨라도 너무 빠르네요.
누군가 사전 계약한 사람에게 꽤 비싼 값에 넘겼을 겁니다.
빨리 나와봐야 일반 사람은 맛도 못보고...
아니 구경도 못하고...
나온지도 모릅니다.
남의 이른 농사를 축하는 못해줄 망정 공연히 찝찝해 합니다.
나란 인간...써먹을데가 없네요.
멱곡삼거리
멱곡리는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
다른 마을에 비하여 논밭이 메말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여주땅인데 다른 곳보다는 뛰어난 토질입니다.
고속도로가 마을을 갈라 1리와 2리가 완전히 다른 마을입니다.
마을 우물옆에 250년된 향나무와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가 있는데
둘다 잎과 가지가 무성히 잘자라고 있었는데...
지금도 건강한지 궁금하네요
가까이 왔으면서도 가보지 못하니 조금 아쉽네요.
다가온 참새에게 안부 전해달라 부탁합니다.
아쉬운 마음에 공연히 사진기만 바쁩니다.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가 있고 그곳에서 버스가 기다립니다.
벌써 오후 한시가 넘었군요.
명성왕후 생가가 있는 능현리를 지나 어딘가로 한참 갑니다.
점심먹은 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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