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새(驪州郡鳥) 백로가 힘차게 날아오릅니다.
이제 곧 시가 되어 여주 목(牧)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힘차게 비상하는 백로의 날갯짓입니다.
차창밖으로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 전면에 조성된 소공원에 설치된
여주군의 상징적인 새, 백로 조형물을 보며
오전 걷기를 멈춘 우만리로 돌아갑니다.
점봉교차로를 지나 점봉천을 건너 점말에서 멱곡으로,
멱곡에서 우만리로 돌아왔습니다.
살기좋은 마을 우만리
그 표석옆에서 차에서 내립니다.
우만리 나루터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우만리는 여강을 따라 여주읍의 동쪽에 길게 터잡은 마을입니다.
조선시대 판서와 찬성을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을 하지 않고
여강변에서 조용히 살던 학고 이장곤이 잠시 호를 우만으로 바꿨다고 하니
그 시대에도 우만리가 있었나 봅니다.
우만리의 원위치는 지금 표석이 있는 곳이 아니고
우리가 가는 강변 나루터 주변에 있었습니다.
순경이 근무하고 푸줏간이 두 개나 자리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1972년 대홍수 이후 마을주민들 상당수는 외지로 나갔고,
남아있던 주민은 1977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지금의 표석있는 곳으로 이주해서 마을을 다시 형성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남한강교 넘어서 보게되는 그림같은 집이 바로 이집입니다.
오늘은 그집앞에서 남한강교를 봅니다.
남한강교보다는 느티나무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만리 마을입구에서 강변을 향해 난 길의 끝에 있습니다.
이 나무가 서있는 자리 그 옆이 옛 우만이나루터입니다.
나무는 당시 마을의 보호수였으며 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홍수로 마을을 옮긴 후 마을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에 뚫려있는 큰 구멍에서 어느날 길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구렁이가 툭 떨어져 있더랍니다.
무슨 일인지 이미 죽어있는 구렁이였는데 나무의 주인이 틀림 없었다고 합니다.
워낙 거대한 구렁이인지라 주민들은 묻어줄 엄두를 못내고 강에 띄워 혼을 달래주었지만...
그 후 사시사철 건강하던 나무는 그 해 겨울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거의 죽어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여주군이 나서 1982년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고 나무를 살려냈다고 하네요.
사람의 발길이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민예총지부에서 세운 장승4기와 솟대 12본이 서 있습니다.
나무도 건강하게 자라고 강물도 평온하게 흐르고 마을도 안녕하기를 빌어봅니다.
탑돌이하듯 나무 주변을 빙빙돌며 셔터를 누릅니다.
강천보가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지 않게 합니다.
그 자리에 만들어 졌으니 당연히 눈에 들어오겠지요.
내말은 ...
없던 자리에 뭔가가 만들어져서 자꾸 눈에 거슬린다는 뜻입니다만...
이제는 이미 만들어 진것 잘 활용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임덕연시인의 우만리 나루터 쯤이라는 시를 혼자 읊조립니다.
"여주 우만리 나루터쯤 흐르는
강물은 열일곱 소녀다.
다가가면 저만치 달아나는
새침한 열일곱이다.
저도 뻔히 나를 좋아하면서
자꾸
쪼르르 골목끝으로 사라지는
내 열일곱살을 안달나게 했던 소녀다.
비오는 날 아무 말 없이 불쑥
내 우산 속으로 들어 왔던
내 심장을 멎게 한 소녀다.
여주 우만리 나루터쯤 흐르는
강물은 여드름 투성이 내 열일곱살이다."
단현리 방향..
브라우나루방향으로 갑니다.
물속으로 들어가 있는 아주머니가 무언가를 얼심히 잡습니다.
뭐 잡으세요?
달팽이요.
예?
아니, 아니, 그 뭐드라... 그거 있잖아요.
예. 그게 있습니다.
숲속으로 접어듭니다.
길을 열때는 꽤나 정성껏 다듬은 숲길이지만 오고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간간히 바라보이는 물줄기가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이곳에도 초소가 꽤 많이 보이는군요.
다시 사용할 일없으면 이렇게 폐허를 만들지 말고 흙으로 아예 덮었으면 합니다만
군속성상 다시 쓸지모르니 보존해야 한다고 하겠지요.
숲을 흔드는 바람이 되어 숲을 지납니다.
길을 잘못들었다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부라우나루터표시는 없어지고 강천보방향표시가 나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계속 진행하다보니 회복의 집에서 설치한 휴게시설들이 나옵니다.
철망문 너머로 회복의 집 건물이 보입니다.
일대 강변 일만평정도 모두가 회복의 집 부지입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운용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를 위한 기도와 수련의 장소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부라우 나루터라고 하는 이 일대도 모두 온누리에서 그 땅을 매입했을 겁니다.
이 교회에서 막으면 못간다는 것이지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사유화하는 이들이나
사유화를 인정한 이들이나
또 사유지임을 알면서도 그길을 지나는 이들이나 다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강변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시 몸을 돌려 강변을 따라 부라우나루로 갑니다.
부라우나루는 여주대교가 완공된 이후에도 몇 년간 이용되다가 1975년경 없어졌다고 합니다.
민참판댁 가옥이 있었다고 하는 고갯마루에서 바위 쪽으로 길이 나있고
강가 바위 위에는 육모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주춧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단암(丹嵓) 이라고 새겨진 각석 사진입니다.
또 한장의 자료사진
강에서 본 부라우바위의 모습입니다.
부라우바위에서 보는 건너편 가야리 대순진리회요양시설
나루에 메어살던 집들이 있던 느티나무아래로 돌아 갑니다.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니 강변으로는 더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느티나무 주변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갱도진지와 별장의 축대사이 좁은 길을 빠져나가 브라우나루를 벋어납니다.
단현리마을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마을길을 따라가다 마을회관앞 고목앞에서 우회전을 합니다.
우회전을 않하고 쭈욱가면 영양천을 건널것이고 신진역참이 있던 신진리로 나가겠지요.
강변 이천취수장으로 가는 길
강을 다시 만납니다.
한강하구로 부터 135Km
"한강 1300리를 걷다"가 135km만 더 가면 끝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만리에서 계속 보이던 강천보가 이제는 코앞입니다.
단현리에서 강천보가는 길에 있는 꽤 오래된 한식집 풍류정앞을 지납니다.
강천보
강천보
길 왼쪽에 보이는 무어장군다리 표석입니다.
1951년 6·25전쟁 도중 전사한 무어 장군의 이름으로 다리 명칭을 정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현리 마을의 강변에 세운 표석입니다만
언제부터인지 다리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표석의 앞면에 단정한 영문(英文) 장식체로 관련 기록을 새겼습니다만
그 옆에 세운 한글 안내판에는 에드워드무어 전적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 치고...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데 굳이 이자리에다 세운 강천보 상부 공도교를 무어다리라고 하는 것도 괞찮을 듯 싶습니다.
4대강 공사를 하면서 여주에는 3개의 보洑를 만들었습니다.
보洑는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에 끌어들이려고 둑을 쌓아 만든 저수시설인데...
이런 보가 필요하다. 필요없다. 공사가 끝난 지금도 말이 많습니다만
만들어진 형태만을 이야기하면
이포보는 비상하는 백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여주보는 측우기를 닮은 형상을 하였습니다.
이 곳 강천보는 황포돛배를 형상화하였습니다.
4대강 권역별로 하나씩...
한강권역에는 이곳 강천보에 세운 문화관을 힐긋 보며 강천보를 지납니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이호대교이겠지요.
아 그렇다.
일단 강천보에서 차가 기다린다고 했다
더 가면 않된다.
솟대를 지나 백로가 알을 품은 형상의 한강문화관으로 갑니다.
한강문화관 앞에 조성된 물이 흐르는 계단식 조형물은
물놀이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네요.
문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1층 전시관은 전국에 있는 16개 보들의 영상도 볼 수 있었고
한강의 역사, 문화유산, 4대강 사업, 물의 미래 등 주로 영상물 위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전시관에서는 독일 출신 미디어아티스트 율리어스 포프의 ‘bit.fall 4 Rivers’를 보여줍니다.
구글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를 수백 개의 물방울로 표현한 글자가 순간적으로 폭포수처럼 떨어지도록 고안한 작품으로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의 흐름을 물방울로 표현합니다.
전망대에 잠시 서있다가
다시 사진 전시하는 곳으로 갔다가 문화관을 나왔습니다.
누군가는 물을 잘 활용하는 것이 사회.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만큼,
한국의 4대강 사업이 미래비전을 가진 중요한 사업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전부 사기라고 하고요.
강천보 문화관에서 무언가 대답을 찾기를 바랬던 나는 역시...
나이를 헛먹은 청맹과니일뿐입니다.
멍하니 꽃보고 앉아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두꽃이 같은 꽃인데 색깔만 조금 다릅니다.
색깔에 따라 호불호가 나뉩니다.
결국 정책도 그런겁니다.
똑같은 전문가집단인데 어떤이는 찬성하고 어떤이는 반대합니다.
한미 FTA, 제주해군기지 등에서 보듯이
누가 기획하고 집행했느냐에 따라 좋고 싫은 게 나뉜 것이지
정책 그 자체때문이 아닌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일행과 버스를 찾아 주차장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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