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보 한강문화관옆에서 버스를 탑니다.
고달사지로 갑니다.
여주대교를 지납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유배길을 떠나는 16살의 단종이 생각납니다.
고달사지를 가기위해서는 블루헤런 골프장을 가로지른 도로를 지나야 합니다.
말을 정확히 하면 골프장에서 도로를 가운데로 하여 이스트코스, 웨스트코스를 설계하였지요.
하여간 골프장을 지나가면 차창밖으로 부도가 보이고 삼층석탑도 있습니다.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이라고 하고
부도에는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인명이 몸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기에 과거부터 있던 것이라하고, 누군가는 어디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재적 가치가 없지는 않음에도 단순한 골프장 장식물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없애지 않는 것이 고마운 것인가요?
그리고 이 골프장안에는 남한강을 따라와 이포나루에서 내린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이곳 상구리고갯길에서 만난 샘에서 물을 마셨다하여 어수정이라고 이름붙여진 향토유적이 있습니다.
여주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만
영업하는 골프장안에 있어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골프장 관리실에서 사전 양해도 구해야 하고
그린을 피해 빙글빙글 돌다보면 시간도 꽤 걸립니다.
그렇게 찾아가면 만나는 샘, 어수정.
2단 석축으로 둘러쌓아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기는 합니다만
조그마한 산골짝의 옹달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옹달샘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때 이곳에서 물을 마시자고 다짐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해피엔딩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어수정 자료사진 한장 올립니다.
이곳에서 목을 축인 단종의 귀양행렬은 고달사를 지났습니다.
고달사를 지나 부론면 흥원창, 법천사, 거돈사를 지나
지금은 폐교된 단강초등학교 내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어가니 그곳이 단정지입니다.
단종임금이 쉬어 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수령 약 600년이 된 느티나무는
강원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하여 강원나무 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유배행렬은 계속 산길을 넘어 신림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싸리치를 넘어 주천면을 지나 군등치를 넘어 영월땅, 배일치에 도달했고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소나기재를 넘어 청령포에 도착하게 됩니다.
앞서 가는 단종의 행렬을 눈물로 배웅하고 우리는 고달사지에서 멈춥니다.
400년이 지났다는 나무가 고달사의 천왕노릇을 하며 입구를 지킵니다.
종합안내판을 한번 보고
옛터를 봅니다.
절은 사라지고 명맥만 남은 곳
사라진 것들과 이야기합니다.
이건청시인이 이야기하는 '폐사지에 사는 부처님" 한번 들어보세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혜목산 아래 고달사지가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세웠던 절은 무너지고 깨져 그 잔해가 풀밭에 흩어져 있다.
국보 4호인 고달사지 부도는 뽕나무 숲을 지나 야트막한 능선위에 서 있다.
매년 오디가 익을 때 나는 아내와 함께 거기 가 오디를 따먹곤 했는데,
요즘은 뽕나무 잎이 지고 오디가 흔적도 없는 겨울에도 봄에도 거길 가서 앉았다 오곤 한다.
오디가 없어도 거길 갔다 오면 눈도 귀도 한결 맑아지곤 한다.
내가 나이 들어 평생직장을 내려놓고 편히 살게 된 어느 가을날,
그냥 하이얀 맘으로 다시 거길 가니 깨지고 무너진 폐사지 풀숲 한 켠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놀라워라, 무성한 잡초더미에서 부처가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부처는 까아맣게 여문 풀씨마다에서 선연하였다.
목탁도 독경도 없는 폐사지,
거기 환한 햇빛 속에서 맑게 웃고 계셨다."
우리는 부도 탑 쪽으로 갑니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원종대사의 성은 김 씨이고 자는 도광입니다.
고달사를 당시 제일의 사찰로 일군 고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종대사는 23살에 송나라로 들어가 고승대덕을 찾아다니며 법을 배우고 52살이 되어서야 귀국하여 여주 고달사에 주석했는데,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배움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식설명을 옮깁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 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 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 받침돌을 네모 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충분히 감탄하고 충분히 놀란 후 산기슭으로 올라갑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입니다.
공식설명을 옮깁니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고달사지 승탑은 그동안 고려시대 초기인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종대사혜인탑으로 알려져왔으나
그보다 100년 가량 앞서 세워진 원감대사의 묘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단부의 일부가 사각의 평면이면서 중대에 용과 구름 무늬를 새긴 점이나,
지붕에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잘 이룬 기법이 신라 하대의 조형양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엉뚱한 생각하나.
국보 1호가 무엇? 남대문이라고 하는 숭례문. 하지만 그것은 이제 이미테이션일 뿐이고...
국보 2호가 무엇? 유리장안에 갇힌 원각사지십층석탑.
국보 3호는?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이게 참 애매한게...
마모되었거나 지워진 것을 김정희만 읽어 다시 새겼다고 하니
진흥왕순수비인지 김정희의 서각인지 알수가 없고...
드디어 국보 4호.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 승탑입니다.
용트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천
천의(天衣)를 입고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지붕돌 처마 밑의 비천
복스러운 얼굴과 통통한 몸매로 공양을 하는 비천의 모습이
얼마전 순례길 걷기에서 만난 완주 송광사 대웅전 천장의 비천처럼 인상적입니다.
사천왕
대웅전과 전각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터로 내려왔습니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고달사로 불리게 된 건 이 사찰의 석조 문화재를 만든 고달(高達)이라는 석공의 이름을 붙여 지은 것이랍니다.
고달이라는 석공이 이 모든 불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야 하는데 불사도중 가족은 굶어죽고 부인은 얼어죽었다지요.
고달이라는 석공은 이름 그대로 참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하필 절이름에 관한 스토리를 요따위로 만들었을까요.
툴툴거리며 앙징맞은 귀부 옆에 섰습니다.
감히 '앙징맞은'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공식자료를 옮깁니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수를 찬찬히 살피면 용의 발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촬영이 아니라 예불을 드립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이건청시인의 이야기를 또 떠올려 봅니다.
'폐사지 에서'
"거기, 아마 대웅전이 있었나보다.
대웅전 복판에서 부처님을 받들고 있었던 대석이 질경이 풀밭에 놓여 있다.
반쯤은 깨어져 있다.
연꽃무치를 가로 지르며 금이 가있다.
돌이끼가 푸릇푸릇 피어있다.
이따금 직박구리 몇마리 끼익 끼익울면서 부도쪽으로 스쳐간다.
부도탑옆 뽕나무 가지엔 오디 열매가 까아맣게 익고 있다.
오디 열매를 따먹은 직박구리 푸른똥이 구름무늬 탑신에 붙어 있다."
석조대좌앞으로 갑니다.
공식설명입니다.
"고달사지의 석불대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복판복련화문-겹꽃잎의 연꽃이 위로 향하고 있는 무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아래 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주 고달사지 경내 가장 중앙에 놓여 있는 이 대좌는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불상 없이 대좌만 남았는데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두기의 석조를 봅니다.
안내판은 장황한데 무엇에 쓰였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욕조로 쓰였다는 등 취사용 씽크대라는 등 나름 용도를 유추해 보니 그것도 재미있네요.
한때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불리며
도봉원, 희양원과 함께 신라이래의 유명한 3대 선원의 한곳으로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던 사찰이었던 만큼
그 공허의 넓이도 꽤나 넓습니다.
얼마나 화려했을지를 생각하는 만큼 황량함의 정도도 크지요.
절터를 나오면서 종합 안내판을 보는데 정호승이 떠오릅니다.
정호승은 이야기 합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이어서 말하길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며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고 합니다.
다시 남한강을 넘습니다.
차창밖으로 황혼이 내립니다.
시내로 들어와 소양천변 여주중앙교회옆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서니...
총무가 이야기 합니다.
시내구경할 사람들은 한바퀴 돌고 와도 된다고요.
십몇명이 두세명씩 짝을 지어 걸어갑니다.
뒤를 따라 혼자 걷다가 여주경찰서앞에서 강가로 갑니다.
시장앞과 군청옆을 지나
강변로 입니다.
여주대교 방향으로 걷습니다.
벽화가 있습니다.
협궤열차인 수려선의 종점인 여주역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돛배들과 황포돛배
돛배와 협궤열차타고 사람이 모이는 여주를 그린 것 같습니다.
여주대교 넘기 전의 건너편....
여주대교를 넘었습니다.
조금 더가 신륵사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평생학습센터앞을 지납니다.
에헴 하며 솟을삼문을 지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에헴소리에 나와보는 이 하나 없으니 도리어 뻘쭘합니다.
불없는 깜깜한 거리를 걸어 절집 문앞으로 왔습니다만 공사중이니 돌아가랍니다.
찍!
조용히 들어갑니다.
한강 6차 첫날을 마감합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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