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6차. 2-2. 입암에서 여주보, 그리고 계신리 마애석불까지

하늘타리. 2013. 9. 15. 22:22

 여주 하리 양섬옆 남한강변을 지나갑니다. 

 

양섬을 감아돌던 여강물이 길이 막혀 되돌아 나옵니다.

이 물길은 고려 우왕이 마지막 거쳐간 길입니다.

그래서 그 슬픔을 되뇌이려 합니다.

 

왼쪽 산기슭 

 

 

덩그러니 봉우리 하나만 남았습니다.

 

 

 

 

 

건너편 천남리 사비나루터를 봅니다.  

 

저 나루와 양섬 사이가 제비여울입니다.

 

지금은 그 위로 세종대교가 지나갑니다.

 

선왕등고개 옆 강쪽으로 연결한 자전거도로를 걸어갑니다.

 

왼쪽에 보이는 돌출된 바위구릉의 이름을 외계수라고 합니다.

 

영릉입구에서 부터 북성산의 맥을 이어 남한강변까지 연해 있습니다.

  

 

 

 

 

커브를 돌면 강변과 만나는 곳이 보입니다.

  

강변과 만나는 곳을 입암층암笠岩層岩이라고 합니다.

 

입암층암은 삿갓 모양의 층층이 겹쳐진 바위로

18세기 중반 해동지도海東地圖 및 19세기 전반 광여도廣輿圖에 옛 여주팔경 중 6경六景으로 지정될 만큼

여주의 대표적인 아름답고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기록됐던 곳입니다.

 

 

 

 

 

이곳은 마암馬巖과 함께 여강가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유적이었으나

접근이 어려운 위치에 있어 그동안 방치돼왔었습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으로 조성된 자전거길이 입암 바로 앞을 지나게 되자

주변을 정리 했습니다. 

 

4대강 유역 몇 않되는 수혜지역 중 하나입니다.

 

 

여주보가 보입니다.

 

왼쪽

 

오른쪽

저 건너가 천남리 용머리들과 선옥골이 있는 곳인데...

그 곳 강변의 넒은 들과 너럭바위가 정말 멋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다시 여주보.

 

세종대왕 발명품을 형상화한 여주보 주변으로

갈대언덕과 야생초화원, 사계절테라스가든, 세종광장, 피크닉장을 조성한다고 하던데....


뭘 그렇게 만든다는 건지...
물론 이것 저것 파고 뒤집고 해야 토목, 건설 계통이 돈을 법니다만...

 

만들때 벌고,

부술때 벌고,

다시 만들때 벌고...

 

단조로운 좌우의 모습.


습관성 꾹꾹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갑니다.

 

예전의 남한강은 강물 주변으로 은빛 모래밭과 갈대숲이 조화롭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웠던 곳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래밭은 흔적도 없고

습지와 갈대밭이 있던 자리에는 강과 인간을 차단하는 둔치의 단조로운 정적만이 깔려있습니다.

 

걷기에 가장 적합했던 길을 가장 부적합하게 만들어 놓은 현장을

허탈함을 억누르며 걷고 있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걷기에 부적합하더라도 4대강 추진시 표방한 그 목적을 달성해달라는 것이지요.

 

건너편에 낮선 정자가 보입니다.

남는 흙으로 동산을 만들고 그 곳에 정자를 세웠나 봅니다. 

 

 

 

 

 

  

 

 

여주보로 다가가면서 사전학습을 합니다.

 

여주보는 총 길이가 252m 이며, 높이는 2~3m, 수문은 12기가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
수문은 유압식 승강장치에 의해 수위가 변할 때 마다 그에 걸맞게 운용되며,

홍수때나 수량이 증가하면 유압을 이용해 수문을 들어올려 통수를 한다고 합니다.

 

공업용수 취수장이 있는데 충분한 수량이 확보돼 있어 안정적인 수자원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며

보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인공어도, 우측에는 자연형어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주보는 한강살리기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남한강 8경 중 4경에 해당됩니다.

 

신 남한강 8경은 1경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2경은 양평 억새림, 3경은 이포보와 수변공원,

4경은 여주보와 물억새 군락지,

5경은 강천보와 황포돛배, 6경은 단양쑥부쟁이 자생지,

7경은 충주 능암리섬, 8경은 탄금대와 용섬 등이라고 합니다.

 

여기 4경에서 보니 다른 곳의 모습도 유추됩니다.

 
자연이 사라진 인공의 모습들...

 

 


우려되고 눈물납니다.

 

 

   

여주보 입니다.

 

공도교를 흘끔보고 혼자 웃습니다.

 

물막이보 상층부의 개설된 다리는 일반명칭으로 어디나 공도교라고 부르는데

저렇게 문패까지 달 필요가 있었을까요?

 

소수력발전소 벽면에 조각된 훈민정음

 

 소수력발전소는 발전용량이 4,950KW이며 연간 발전량은 29,739MWh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전력량은 4인 기준으로 6,200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하네요.

 

훈민정음과 수력발전의 상관괸계를 논하시오!
누군가는 답을 쓸겁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남겨두었을까요? 

 

맛뵈기...

 

물시계(자격루)의 모양을 응용하여 구축했다는 보의 기둥 모습을 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지?

 

 머리를 짜봐야 쥐만 납니다.

 

전망타워에 올라가보고 싶은데...

 

회원들 중 누구하나 올라가는이 없습니다.

 

광장에서 보를 찍습니다.

 

누군가의 염장질

 

막상 여주보에 오니 내 마음은 이리도 울적한데 누군가는 하늘을 납니다.

 세상 모두 느낌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니 행위가 다릅니다.


누군가는 맛뵈기로 남겨놨지만 나는 이 바위섬이 애틋합니다.

 

Veolia

 세계적 수처리회사입니다.
국가 또는 지역의 상수도, 하수처리, 물 관련 토목건축공사를 시행하는 물다국적회사입니다.

 

이회사의 시설물이 여기서있는 까닭은?
불문가지입니다.
한숨만 나오고....

 

한가지 예만 든다면... 보에 물을 채우고 난 뒤 수질악화가 진행되면 이회사에서 수처리를 하겠지요.

물먹는 하마가 아니고 돈먹는 하마가 바로 4대강사업이고 그동네 왕서방들이 바로 바로 이런 회사들입니다.

 

둔치를 걷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내가 무슨생각을 하던...

아마  이곳에 살던 원주민은 이 부근 개발에 찬성했을 겁니다.

 

지금 이지역은 예전에 사람이 다니지 않던 길입니다.

 

 

효종대왕능 뒷산기슭에서 부터 강변으로 내려오며 아주 넓은 공동묘지가 있었고 강가로는 잡목만 우거져 있던 곳입니다.

 

 

건너편 백석리섬은 공군폭격훈련장이 있었습니다.

 

  

 

 1972년에 왕대리 들어가는 길목에 있던 왕나루가 없어진 후부터 인적이 끊겼던 강변인데

 하상 준설로 강의 생명은 끊겼어도 외관이라도 이제 깨끗하게 정비되었으니 마을사람들로서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발이라는 것이 입장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방아다리앞..

 

강 건너 대신면을 오고가던 왕대나루가 있던 곳를 지납니다.

길손이 머물던 주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막을 찾아든 길손 중
발길에 여유가 있는 이는 '여보게 주모~'하며 길게 불러 사람을 찾고
마음이 다급한 이는 '주모!'하며 짧게 불러 사람을 찾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찾으러 일부러 돈들여 나서 걷는길인데...
나는 왜 지금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을까요? 

  

 

 

 

 

 

 

 

 

 

 

 

 

 

 

내양교를 지나 내양리로 들어갑니다.

 내안리와 양화리가 합쳐 내양리입니다.

 

이 지붕없는 무대에서는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길손을 환영하는 것은 용도폐기된 초소뿐이 없네요.

 

부활을 꿈꾸지 말고 영원히 숨죽이고 있어야 할 시설들입니다.

  

 

느닫없는 뻥뻥 소리에 깜짝 놀라줍니다.

출처를 찾아보니 논 둑 오른쪽 한구석에 참새를 쫒는 빨간색 공포총이 설치되어 주기적으로 소리를 냅니다.

 

총은 총이되 새총이구나 하면서 웃음을 짓는데

건너편 군사훈련장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 궤도차랑들이 눈을 흘기며 쳐다 봅니다. 

 

숲을 밀고 습지를 밀고 불도저는 달립니다.


그래도 군사훈련장을 밀고 달리지는 못하나 봅니다.
말 그대로 강한 놈한테는 굽신거리고 약한 놈앞에서는 위세를 뽐냅니다.

 

블도져도 할 말이 있습니다.
밀어 없엔다 한들 다른곳으로 또 들어설테니 마찬가지랍니다.

 

고개를 돌려 옥수수밭

 

그 맞은편에는 무한궤도차량

 

마을에서 강으로 나오는 지점...

강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지점...

표석이 두기 서있습니다.

 

양화나루터

 나루터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 양화나루, 양화진일겁니다.
버드나무가 많다는 이야기지요.


이 곳의 양화나루는 건너편의 대신면 초현리를 연결하던 나루로,

나루를 건너는 사람은 곡수장에 가려는 사람들이었는데,

곡수장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아서

당시 여주군 능서면 일부와 흥천면, 그리고 이천시 백사면과 부발읍에서 이곳 양화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여주의 마지막 나루였던 이포나루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통의 중심지였던 나루 어귀에 목사牧使 김공홍복金公弘福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서 있습니다.

 

생각나는 것 하나..

마을안쪽으로 들어가면 도로에서 들어오는 어귀에 불망비 하나가 있습니다.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지주地主 윤공광선尹公光善 영세불망永世不忘…”,

그 좌우에 작은 글씨로 “소작인小作人 일一…” “무인戊寅 이월二月…”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발적이었는지 제발 선처를 해달라는 바램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작인들이 지주를 기리기 위해서 고종 15년인 1878년에 영세불망비를 세운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이 일대 뿐이 아니고 1970년대까지 여주일대 거의 모든 비옥한 땅에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던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조선왕족인 이관, 이만선과 파평 윤씨 거부 윤광선 등 의 대지주가 

서울에 거주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소작시켰습니다.

수확기가 되어 쌀가마로 걷은 소작료를 양화나루를 통해 서울로 실어갔다고 합니다.

 

생각나는 것 둘...

조선 광해군 시절. 서얼을 차별하는 국법에 불만을 품은 이른바 여강칠우驪江七友가 있었습니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관찰사 심전의 서자 심우영,

선공감제조 박충간의 서자 박치인, 박치의 형제와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등이지요.


이들은 서얼금고법에 의해 족쇄를 달고 살아가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서자인 광해군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기대하여

 자신들과 같은 서자들도 다른 양반자제들과 마찬가지로 관리에 등용시켜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자 이곳 내양리 부근에 은둔합니다.


홍길동을 지은 허균,

허균의 스승이자 삼당시인으로 이름높은 이달의 아들 이재영과도 깊은 교분을 맺으면서 훗날을 도모했던 이들은

 자금의 확보를 위해 나무꾼이나 소금장수 또는 노비추쇄인으로 가장하여 화적질에 나서곤 하였습니다.


 광해 5년인 1613년 봄, 장사꾼 하나가 부산 동래에 가서 은을 무역해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문경 새재에서 은 수백냥을 빼앗기고 피살됐습니다.

죽은 사람의 노복이 이들의 뒤를 밟아 도리 아홉사리길을 지나 이곳 내양리까지 추적하여 거처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하니 이들은 결국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를 제거하기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의 빌미가 되었고

또한 인조반정 명분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아직까지 궤도가 달린 무기들이 납작 업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짐짓 외면하고 앞으로 갑니다.

  

 

양화천 아래 사주에 하상준설을 하고 무언가를 만들었습니다.

 

내려가 보면 무슨 설명이 있을텐데 한숨만 내쉬고 그냥 지나칩니다.

 

양화천 상류쪽 버드나무와 안녕을 나눕니다.  

 

양화교를 넘어갑니다.

 

흘러오는 양화천 물과

 

흘러가는 양화천을 봅니다.

 

남한강과 합류하겠지요. 

 

다시 한번 흘러 내려오는 물 

 

그리고 흘러가는 물을 봅니다. 

 

여강이 끝나는 것입니다.

남한강은 이곳에서 양화천을 합수한후 부터 금사면 진북리까지는 기류沂流라고 불리웁니다.
뭐 그냥 진북리까지 여강이라고 해도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리 건너편으로 정려각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 

 

그래서 논둑길을 지나야 하는데...

 

코스를 벋어나 다가가 봅니다.

 문성공 정인지의 후손인 하동정씨 가문 정규장鄭奎章, 1644~1731의 효자 정려문孝子 旌閭門입니다.


정려문판에 효자孝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규장지문(鄭奎章之門)”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상지십구년上之十九年 계해癸亥 정월正月 명정命旌”이라 새겨져 있고

문판상단에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조 19년인 1743년에 받은 정문입니다...만. ..

지금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듯 합니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강가로 가면 찬우물 나루가 있지만 그곳에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습니다.


큰길로 나와 완전한 패잔병의 모습이 되어 걷습니다.

 

상백교를 넘어 복하천을 건넙니다.

 

 

 

 

복하천은 용인 양지면 제일리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이천의 시내중심부를 지나 흘러내린후

이곳 여주 흥천면에서 남한강과 합류합니다.  

 

  흘러오는 동안 이천, 여주 일대에 평야를 잘 발달시켜 양질의 쌀이 생산되게 합니다.

 

다리를 넘으며 복하천이 발달시킨 사주를 보고 또 봅니다.

  

 
다리를 넘어와 오른쪽으로 갑니다.

 

 

 

 

 

복하천을 연해 가다가

 

 

 

 

 

계신리 석불암 표시를 만나 좌회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굴다리를 지나고...  

 

  

 

 

 

 

 

구불구불 마을길을 지나 석불암.

 

 

그 안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에서 그 아래로 흘러가는 삼산천에 눈을 뺏기다  느닷없이 만나는 절집

 

마음은 급하지만 대웅전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흘러오는 물길 너머의 풍광을 봅니다. 

 

 

이 풍광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안내판을 먼저 읽고

 

 

 마애석불에게로 갑니다. 

 

 

 

 

 

 

 

 

 계신리 마애석불은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암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옛날부터 한강 상류에서 뗏목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여기에 들러 안전을 빌고 갔다고 하는

남한강 물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주던 수호신노릇을 함께 하시는 부처님이십니다.
 
무학대사가 한양과 신륵사를 오가는 배 안에서 긴 삿대로 단숨에 새겼다고도 합니다만

 마애불의 양식은 훨씬 오래된 신라말 고려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귀는 어깨에 닿을 듯이 길게 표현하였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습니다
 
양 어깨에 두른 법의가 양 팔을 거쳐 발목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U자형 옷주름이 뛰어나게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속옷의 띠매듭이 보입니다.

 

오른손은 어깨쪽으로 올려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옆으로 펼치고 계십니다.

 

발 아래에는 연꽃무늬 대좌가 있고 머리 뒤편에는 세 겹으로 된 광배를 둘러싸고 있는 화염문(火炎紋)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강물이 철썩이는 곳에 새겨진 부처님이

강을 지나는 이의 눈에 부처님의 모습니 들러오면 강을 지나는 그 이가 이 부처님 속에서 쉴수 있을것 같은...

 

내가 부처님을 보면 부처님이 내가 쉴곳을 주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이 부처님이 나에게 주십니다.

 

예불에 가름하여 사진을 찍습니다.

 

 

 

 

 

 

가다 돌아와서

찍고 찍고 또 찍습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을로 나왔습니다.
마을안까지 버스가 들어와서 우리를 태워줍니다.

 

좁은 곳에서 버스를 돌리느라 기사는 식은땀을 흘리는데 나는 조롱박을 보다가....여주,

 

식물 여주에 필이 꽃혔습니다.

 

 박과 덩굴 식물입니다.
갈증 해소에 도움을 주고, 비타민 C가 많아 피부 미용에도 좋은 야채로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식물인슐린을 다량 함유하여 당뇨에 좋다고 소문이 많이 나있더라고요.
그건 잘 모르겠고 bitter melon이라고 하는 영문이름과 그 모양새에 갑자기 흥미가 생긴것이지요.

 
어찌 어찌 몸을 돌린 버스는 파사산성을 보면서 이포교를 넘어갑니다.

가장 중요한 행사인 밥먹으러 갑니다.


잘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