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동 한두기 마을로 갑니다.
제주의 마을 홈피에 의한 용담동 설명을 보면 ....
"태초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라산이 솟아오르고,
백록담에서 두줄기 큰 내(川)가 흘러 넘쳐, 다시 바다와 만나 용연을 이루어 마을이 형성된 곳 …."
이라고 용담동을 설명합니다.
기록된 설촌유래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먼저 용담1동 홈페이지의 내용입니다.
"옛날 삼성혈 서북 해안에 큰내(한내 : 대천, 한천)가 바다에 닿는 곳(용연, 용소,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음)에 몇몇
가구가 모여사는 한독(대독)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군락이 형성되어 한내 동측에는 동한두기 서측은 서한두기라 불렸으며
점차 가구 및 인구가 늘어나자 동·서 한두기를 통칭할 부락 이름의 필요성을 느끼자
용소(용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의미를 살려 용담이라 칭해 오던중 (약 100년전임)
1955년 8월 13일자 법률 제368호에의하여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자
동년 12월 13일자로 제주시 25개 리가 40개 동으로 개편됨에 따라
용담리는 병문천 서측과 한천 동측을 용담 1동,
한천과 도두동 다호부락과 용두암을 연결하는 용담 2동,
닥그네(수근동)와 어영부락을 용담 3동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 후 1962년 1월 1일부터 말단 행정기구의 강화에 따른 조치로 제주시 40개 동을 통합하여 14개 행정동으로 구분케 됨에 따라
법정동인 용담 1.2.3동을 용담동이라는 1개의 행정동으로 관리하다가,
1985년 10월 1일 제주시 조례 1034호로 용담 1.2동으로 분리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담 2동 홈페이지 내용입니다.
"용담동 지역에서는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B.C 10세기 ~ A.D 전후로 추정),
그리고 탐라전기에 속하는 주호시대(A.D 500년) 무덤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1985년 1월, 당시 제주대학교 민속박물관 조사단에 의하여 용담2동에서 발굴된 옹관.석관묘에서는
철제 장.단검, 화살촉, 철도끼, 마제석검, 홍옥 구슬 등의 부장품이 나온 바 있다.
용담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支石墓)에서도 돌화살촉, 돌칼, 돌도끼, 토기 등이 나왔다.
특히 용담동 지역의 고인돌들은 '한내(漢川.大川)'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오랜 옛날부터 '한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순조 27년(1827) 제주향교가 광양에서 지금의 용담1동 298번지로 이설되고,
1920년을 전후하여 제주읍성 밖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차츰 자연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록상 용담동 지역에서 설촌 역사가 가장 오랜 곳은 '한내'와 '병문내' 하류에 있는 '한두기[한데기]'다.
'용연'을 기점으로 동쪽을 '동한두기', 서쪽을 '서한두기'라 한다.
처음에는 '한독[大甕.大獨]'이라 하다가 마을이 커져 가자, 현재의 '동.서한두기' 지역을 통칭할 새로운 마을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큰 옹기처럼 생긴 갯가의 마을이란 뜻으로 '대덕개.대독개[大甕浦]'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후 '용(龍)이 사는 못'이라는 뜻을 지난 '용담(龍潭)'으로 개명했다.
이것은 '한내'하류에 있는 명승지 '용연[龍淵]'에서 유래한 것이다.
1955년 9월 1일자로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고,
같은해 12월 31일자로 읍 당시의 25개 법정리가 40개 행정동으로 개편되면서,
'용담리'는 3개동으로 나뉘어졌으며,
1962년 1월 1일 제주시 40개 동(洞)이 14개 행정동으로 통합되면서 용담1.2.3동이 '용담동'으로 개편되었다."
병문천이 흘러 내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 버렝이깍으로 왔습니다.
버렝이깍은 버렁개, 벌랑개, 벌랑포라고도 하지요.
증보탐라지에 의하면 "병문천은 제주읍 오등리에서 삼도리를 경유 입해하고 말류는 벌랑포가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해조海潮와 상응하여 밀물때는 물이 나오다가 썰물때에는 마른다라는 병문천泉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병문천에서 한천을 사이로 만들어 진 동네 한두기의 모습을 봅니다.
이 사진은 1970년대의 한두기 마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선반물 보수 기념비 옆에 세워진 마을 설촌 유래비를 읽는 것으로 마을을 둘러 보는 것을 대신 합니다.
설촌유래비에 쓰여있는 갈마수
지금은 남녀 목욕탕을 시간별로 나누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두기 마을에서 사용하던 병문천川변 물통은
병문천泉이라고도 하던 버렁이깍물을 제외하고도 크게 세군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한두기마을회관, 지금의 용담동 연합청년회관 정남향 웃녘에서 나오던 생이물,
두번째는 병문천川가에 있던 선반물.
지금은 병문천이 복개되면서 흔적조차 없어지고 돌하나 덩그러니 세워져 있지만
삼도동 무근성사람들도 떠먹을정도로 충분하게 나오던 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이물에서 흘러온 물과 선반물에서 흘러온 물길이 만나 큰 물통을 이루었다가 버렁이 깍으로 흘러들어가는 허덕물이 있었다고 하고
이 허덕물을 최근에 갈마수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절동산에 있던 해륜사에서 콩을 담가 불려먹은 물이라는 콩큰물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제주의 옛지명이라는 책에는 선반물 동북쪽 15미터쯤에 있었다고 하는데
선반물서쪽이면 몰라도 동쪽으로는 말이 않되는 듯 하네요.
그렇게 콩을 불려먹을 만큼 물통이 필요했을 정도로 절이 켰었다는 이야기를 만든 것일겁니다
선반물 표석앞에서 서자복이 있는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봅니다.
절집이름이 용화사였는데 아예 옛이야기에 나오는 해륜사로 바꾸었습니다.
작년 1월경 용화사 주지스님(성홍)이 지역 주민들의 안녕과 염원처로서의 역할을 해 왔던 옛 사찰인 해륜사海輪寺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만등 불사를 하더니
절집 이름까지 바꾸었나 봅니다.
이 자리 인근에 있던 해륜사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쇠퇴하다가
1702년(숙종28년) 제주절제사로 부임했던 이형상 제주목사에 의해 폐사되었다는 것은 역사기록에 있습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주성州城 동쪽에 만수사萬壽寺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가 있어서
각각 불상은 있으나 상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자체에서 한 사람을 정하여 돌보게 하고
또 4명절 때면 서로 모여서 예불할 따름이다.
나는 말하기를 점차 오래 둘 수 없으니 곧 두 사찰을 헐어서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지만 만수사터와 해륜사터에 미륵불이 조성되어 민간 신앙의 성지가 되어 있던 곳 중 해륜사터에서
1939년 초파일을 맞아 오이화 스님과 광제 스님, 화주 문공덕화 등의 노력으로 남아 있던 서자복 미륵을 모시고 개원 봉불식을 거행하여
1940년 9월 15일 조선사찰 대본산 대흥사 해륜포교소로 계출을 받았으며
이후 1960년대에 태고종으로 들어가면서 용화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어
반백년이상을 용화사라는 이름으로 있었는데
이제사 뜬금없이 해륜사로 바꾸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그냥 오버일 뿐입니다.
그런데 개인절집 이름 바꾸는 것 가지고 내가 뭐라 이야기할바 아니고 절집에 왔으니 부처님을 뵙습니다.
나름 해학적인 용과 눈을 맞춰 인사하고...법당으로 들어갑니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하여 칠보로 조성한 부처님을 대웅전에 모셨습니다.
주변 벽면의 탱화들도 둘러 봅니다.
서자복 미륵입니다.
설명문을 봅니다.
첫줄에 용담동 복신미륵은 제주성서쪽에 있는 자복이라 하여 서자복이라 불렀다.라고 쓰여 있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습니다.
설명이 굉장히 애매하다고 느껴집니다.
자복이라는 말의 정의부터 그렇습니다.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 된 이후 큰 도읍내의 사찰은 전부 폐하게 되고 산간으로 들어갑니다.
조선 태종7년 (1407년)에 주州 군郡 단위로 성밖으로 성인근에 자복시資福寺라 하여 복을 비는 사찰을 한곳 또는 두곳을 두기로 하였는데
아마 그 당시 제주에서는 만수사와 해륜사가 지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만수사가 동자복시, 서쪽에 있는 해륜사가 서자복시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태종8년(1408년)에 국가의 보호를 받던 법화사의 노비 280명, 수정사의 노비 130명을
다른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예에 따라 각각 30명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전농으로 퇴사시킴니다.
제주에서 절과 당을 이야기할때는 꼭 이형상목사가 등장합니다.
타지역에서는 굉장히 선량한 관리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 제주에서는 풍속을 파괴한 아주 나쁜 사람으로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게 꼭 그런것 만은 아니지요.
먼저 1530년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제주에 사찰이 15개로 나옵니다.
나열해 보면...
존자암(한라산 서령), 월계사(獨浦의 동남쪽), 수정사(도근천 西岸), 묘련사(제주 서쪽 25리), 문수암(제주 서남쪽 27리),
만수사(제주읍성 건입포 東岸), 해륜사(제주읍성 서쪽 獨浦), 강림사(제주 동쪽 함덕포구), 보문사 (巨口里岳 북쪽), 서천암(조공천),
소림사(제주 동남쪽 10리), 관음사(朝天館浦), 영천사(정의현 영천천 東岸), 법화사(대정현 동쪽 45리), 성불암(정의현 성불악)
그리고 1601년에 기록된 청음 김상헌의 남사록에
당시의 사찰로는 보문사와 수정사, 존자암만을 언급하고 나머지는 폐사지에 관해서만 전해집니다.
그리고 1651년에 기록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현존사찰로 존자암, 수정사, 문수암, 해륜사, 만수사, 강림사, 보문사, 서천암, 소림사, 관음사, 안심사, 원당사, 돈수암, 영천사, 굴사가 나오고
폐사지로 법화사, 곽지사, 월계사, 묘련사가 나옵니다.
드디어 1702년 봄 이형상이 등장합니다.
1702년 봄에 쓴 남환박물 중 풍속조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대로 된 절도 없고 중도 없고 비구니도 없다.
… 제주성 동쪽에 만수사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가 있다. 각각 불상은 있지만 상시 전수자(典守者)가 없어서 마을에서 한 사람을 정하여 돌보고 있다.
사명일四名日에 서로 모여서 예불할 뿐이다.
… 온 섬 5백 리에 지금은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니도 없고 또한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이라 말할 수 있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때 제주에서는 절집이 차츰 쇠퇴하여 제대로 된 절집과 승려가 없이 그냥 절집이 사당과 비슷하게 쓰여질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는 글이 나옵니다.
이형상은 절집 두곳을 헐고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하면서 신당의 훼철에 나섭니다.
제주도 무당은 흔히 '심방'이라고 부르는데, 간혹 여자도 있었지만, 대개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육지의 무당과는 달리 강신되지도 않은 자들이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존재로 이른바 종교적 권위를 갖고 있었고
육지 무당은 평시에는 천한 일에 라도 종사하며 생산적인 일을 하다가 굿 등의 제례에 있어서만 무당의 역할을 하는데 반해
제주의 심방들은 무위도식하다가 재앙과 불행이 닥치면 신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걷어들입니다.
게다가 제주의 심방들은 그들끼리 계契 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는데,
1000명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숫자도 많았다고 합니다.
헌종 7(1841)년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입춘굿' 기록을 보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던 농경의례를 향리 집단이 주관하고 있었으며,
의례 행렬의 맨 앞에는 무당들이 나서 전체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지방관으로 부임해 왔던 목사, 판관, 현감들도 무교 신앙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심방들의 조직을 쉽게 깨뜨리기 어려운 형세로 파악하였을 겁니다.
김정도 이런 것을 느끼면서도 감히 나서서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글만 썼지요.
'충암집' 제주풍토록에 "사당의 귀신을 지독하게 숭상하며, 남자 무당男巫이 매우 많다.
재앙과 불행한 일이 닥치면 사람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마구 빼앗는다.
제주 지방의 명절 초하루와 보름, 7일 17일 27일과 같은 삼칠일三七日에는 반드시 짐승을 죽여 희생으로 삼아 신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음사는 300개를 넘는데도 점점 증가하며, 요사스러움과 거짓이 날로 높아간다.
사람이 병이 걸려 심해져도 약 먹기를 두려워하며, 귀신이 화를 낸다고 하면서 죽을 지경이 되어도 깨닫지 못한다.
풍속에 뱀을 몹시 꺼리며, 신으로 모신다.
보았을 경우에는 술을 뿌리고 주문을 외우지만, 감히 잡아죽이지 못한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러한 악습과 부패를 끊으려 이형상이 칼을 높게 뽑아들어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불과 6개월여 만에 제주 지역의 신당 129개소를 불태우고
그 당에 메인 심방 200여명을 농사에 종사토록 하였으나
그가 가고 난 후 다시 당은 계속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속의 어느날 해륜사터와 만수사터에 미륵상이 선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생김새는 고려시대석불입상의 모습일지는 모르나 생겨난 연대는 조선 후기쯤 일겁니다.
그 전에 있었다면 이형상이 아니라도 누군가의 기록에 미륵불이 기록이 되었을 것이고
김만덕이 금강산에 가서 불상을 처음 보았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을 겁니다.
하여간 이곳의 미륵은 기자신앙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서자복 옆에 있는 작은 미륵상은 동자불이라고 하는데
부인들이 거기에 걸터앉아 아들낳기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륵불뒤에서 한두기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 봅니다
절집을 나서 어쩌면 옛 해륜사자리일수도 있는 골목을 지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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