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용담동 제주향교와 그 주변

하늘타리. 2013. 6. 29. 22:33

6월 6일 
용담동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서문성당을 들렀다가 성당을 나오면서 한천을 바닦으로 내려가 건너서 내왓당자리라고 비정되는 곳을 가보고

선사유적지를 갔다가 몇곳의 고인돌을 보며 궁당까지 내려갔다가....

 

서문로타리로 다시 왔습니다.


내친김에 성안에서 서문을 나와 다니던 그 옛날의 용담동을 걸어보려 합니다.

서문로타리에서 옛 한질로 와서 그 입구에서 서문로터리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옛 한질

 

이길이 서문을 나와 제주도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큰길이었습니다.

 

쭈욱 길을 따라 가면 오른쪽 마을 부러리와 왼쪽 마을 새광양을 가르는 옛길을 지나

병문천을 넘어 병문천과 한천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용담동의 발상지인 한두기마을로 갈 수 있습니다만

몸을 왼쪽으로 틀어 옛 비룡못자리로 왔습니다.

 

향교로 가려고요.
지금이야 향교로 가려면 서문로타리에서 서문시장앞 큰 길 서문로를 이용 바로 향교로 가면 되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길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서문을 나와서 한질을 따라 오다가 비룡못을 지나 향교로 갔다고 하네요.


골목을 따라가다 만나는 해방직후까지 향교의 정문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의 향교앞을 지나는 서문로는 일정때부터 만들어진 길이지요.
이 사진은 1970년대의 향교앞, 지금의 서문로의 모습입니다.

 

옛 한질을 따라 무근성에서 부러리를 지나온 길과 만나는 지점을 가 봅니다.

 

몸을 다시 빠꾸해서 무근성에서 부러리로 올라오는 길로 가봅니다.

 

다시 비룡못이 있던 곳으로 왔습니다. 

 

향교의 정문이 있던 곳에서 중학교 운동장 건너 보이는 향교를 봅니다. 

 

제주향교

 

향교안내문을 보고...

 

향교대성문을 들어섭니다.

 

향교 안내판이 마음에 않듭니다.
그래서 향교는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와야 한다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왼쪽으로 들어갑니다. 

 

뭐가 마음에 않들었는가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정면으로 보이는 대성전의 측면을 보고...

 

 

왼쪽으로 이어지는 행단정과 명륜당을 봅니다.

 

다시 명륜당

 

 

행단정 

 

제주향교는 1392년 태조 원년인 임신壬申년에 발표된 향교설치교서鄕校設置敎書에 의하여

관덕정 동쪽 일리지一里地, 현 제주은행 자리 일대에 창건되었습니다.

 

누구는 그래서 제주향교가 태조원년에 창건되었다라고 하는데 그건 아닌것 같습니다.

 

태조원년에 발표된 향교설치교서에 따라 전국 각지 현 급 이상의 행정단위에서는 고을 수령의 주도하에 향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태조7년(1399년)에 한양에 성균관이 설치되었고

태종대에 이르러서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가 30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태종 몇년쯤 되어 제주향교가 세워졌겠지요.

 

제주에서 향교가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의 동문시장 입구 제주은행 앞인데,

1999년 12월 제주시에서 향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놓았습니다.

'가락천嘉樂川 동쪽 관덕정에서 1리경'이라는 기록과 남아있는 지명에 따른 것입니다.


선조 14년(1581) 김태정金泰廷 목사가 부임하면서 "성묘聖廟는 만세에 우러러보는 곳인데 여염집 사이에 끼어 있고,

또 사장射場 밑에 있어 숭경崇敬하는 뜻을 이룰 곳이 못 된다."

하여 가락천 동쪽의 고령전高齡田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이듬해에 옮기게 됩니다.


고령전에서 86년 동안 지탱하던 제주향교는 현종 9년(1668) 이인 목사에 의해

"본목本牧 향교의 옛터가 좁고 험하며 동·서무 간살의 얽이間架가 더욱 좁아서 위판을 병렬할 수가 없고,

묘정廟廷과 성첩城堞의 거리가 10보에 불과한 데다 큰 내가 바짝 닥쳐 가까워, 허물어져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하여

다시 옛터인 교동校洞에다 집을 짓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옮겨온 지 56년이 흐른 경종 4년(1724)에 성내의 큰불로 소실되었지요.
신유익愼惟益 목사는 서둘러 가락천 동쪽 옛터 고령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짓고

이듬해 3월에 옮겼습니다.


영조 31년(1755) 홍태두洪泰斗 목사가 "향교 자리가 낮고 습기가 많다."는 전 목사의 말을 듣고

지금의 삼성초등학교가 있는 광양으로 옮겼는데,
광양에서 70년이 지나자 심영석沈英錫 목사가

 "광양 옛터는 산을 향하고 바다를 등져 지세가 전도되었고, 사나운 비바람으로 건물을 번번이 수리하는 역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는

장계를 올려 용담동 자리로 이건 허락을 받아냈고,

순조 27년(1827)에 부임한 이행교李行敎목사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있습니다.

 

명륜당과 행단정앞을 지나 먼저 대성전으로 왔습니다. 

 

이곳 제주 향교 대성전에는 5성위(孔子,顔子,曾子,子思,孟子)와 공문 10철(閔損, 苒耕, 苒雍, 宰予, 端木賜, 苒求, 仲由, 言偃, 卜商, 顓孫師),

송조6현(周敦頤, 程顥, 程頤, 邵雍, 張載, 朱熹)과

동국18현(薛聰, 崔致遠, 安裕, 鄭夢周,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 金麟厚,  李珥, 成渾, 金長生, 趙憲, 金集, 宋時烈, 宋浚吉, 朴世采)의 총 39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문묘는 공부자를 받드는 묘우로 문선왕묘 또는 공자묘라고도 합니다.

신라 성덕왕 16년(717) 9월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문선왕을 비롯하여 10철과 72제자의 도상을 모시고 와

왕명에 따라 국학에 안치한 것이 우리나라 문묘제도의 시초라고 합니다.

 

문묘의 제도는 공자를 모시는 본전을 대성전이라 하고 그 앞에 동서로 설치한 전우를 무라 하고

이곳에 공자의 제자와 기타 유학 진흥에 공이 있는 중국의 유현을 모시고 있는데 이를 종사라 합니다.

그리고 따로 강학하는 곳을 세워서 이를 명륜당이라 하고 그 부근에 학생들의 기숙사를 마련하여 이를 재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제주향교는 어쩐일인지 무도 없고 재도 없습니다.

 

현종 11년(1020) 8월에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에게 내사령을 추증하고 동왕 13년 5월에는 설총에게 홍유후를 추증하고 각각 분묘에 종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유학자를 문묘에 종사한 시초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공자를 정위로 하고 중국과 고려의 선현을 향사하였는데

태조 때 중국의 제도에 따르기로 하였으며 점차로 위차가 정돈된 것입니다.

 

태조 7년(1398)에 종래 화상으로 된 것을 위패로 고치고

태종 7년(1407)에 공자를 정위로 하고 안자, 증장, 자사자, 맹자 등 4성을 배향하고

공문십철을 동서에 각 5위씩 종사하고

고려 현종때 종사된 최치원, 설총과 충숙왕 6년(1338)에 종사한 안향을 대성전에서 양무로 옮겨 중국의 유현 뒤에 봉안하였습니다.

 

그 후 숙종 40년(1714)에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송나라의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대성전에 종사하였는데

이 분들을 송조육현이라 합니다.

이 중 程頤의 학설은 南宋의 朱熹에 의해서 계승되어 朱子學이 되었지요. 
朱熹가 수용한 대부분의 것이 程頤의 학설이므로, 朱子學을 程朱學이라고도 합니다.
이 정주학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이것을 받아들인 송시열같은 이의 완고함이 결국 학문과 정치의 동맥경화를 일으켰습니다만

이들 자체는 선현으로 모심받고 있지요.

 

우리나라 유현은 중종 12년(1517)에 문충공 정몽주를 무에 모신 것을 필두로

광해2년(1610)에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 이언적, 문순공 이황을,

 숙종 43년(1717)에 문원공 김장생을, 영조 32년(1756)에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을,

영조40년(1764)에 문순공 박세채를, 정조 20년(1796)에 문정공 김인후를,

고종 20년(1883)에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을 무에 종사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유현이 모두 18명으로 이를 동국 18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조 말 성균관 문묘에는 대성 전에 오성과 십철 그리고 송조육현등 21위를 봉안하고

동서 양무에 각기 공자의 제자 65인을 포함 한, 당, 송등 중국의 역대 유현 94인과 동국 18현을 봉안하여 모두 133위를 봉안하였고

별도로 계성사라는 사우를 설치하여 오성의 부위를 봉안하였습니다.

 

지방향교의 문묘에 봉안하는 위패수도 성균관 문묘와 같이 133위가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크고 작은 것을 감안하여 봉안 위패를 조절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각 고을 향교 중에서 주州, 부府, 군郡 즉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등 39위를 봉향하며,

현縣, 현령縣令,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설위小設位로

'5성,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 동국 18현' 등 27위를 봉향합니다

소설위 향교라 하여 위패수가 일정한 것은 아니었고

송조6현 중 소옹과 장재를 제외한 4현만 봉안한 향교가 있는가 하면

3현 또는 정호와 주희의 2현만 봉안한 향교도 있습니다.

 

국권피탈이후 한국 유교의 맥은 단절되었습니다.
성균관은 경학원이 되었고 일제는 경학원을 이용하여 석전제釋奠祭를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유교가 총독부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하고 ‘경학원’에 경성 및 지방 13도 강사를 임명하여 강연케 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에 활용하였으며,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經學院雜誌』를 발간하여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일본인의 논설, 정책 해설과 법령, 시국에 대한 성명을 게재,각지에 총독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이렇듯 유교는 왕조 패망에 이은 일제 식민통치 과정에서 '유교망국론'의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여전히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는 원죄성을 벗어버리고 있지 못합니다.

 

1945년 광복 후 유교사회의 개혁에 힘을 쏟던 심산 김창숙선생은 유도회 총본부위원장에 취임하자

1949년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여 5 성위와 송조 2현(정호, 주희)을 제외한 공문 10철위와

동, 서 양무에 봉안된 중국인 유현 94위를 매안하고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향교에도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안에 대하여 감히 중국 선현들에게 불경할 수 있느냐는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1961년 2월 23일 개최된 전국유림대회에서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은 복위하기로 결의하여

 대다수 향교 대성전에는 5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39위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향교의 봉안 위차를 살펴보면 동종위는 도국공 주돈이, 난국공 정이 뒤에 홍유후 설총이하 우리나라 9현을 봉안하고

서종위에는 예국공 정호, 휘국공 주희뒤에 문창후 최치원 이하 우리나라 9현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무, 서무없이 대성전에 위패를 몽땅 모아놓고 있는 제주향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위차는 사대주의의 관행입니다.

유학이 공자와 4성에 의하여 확립되고 1200여년 뒤 송조에 이르러 성리학이 대성하여 중국에 유학이 크게 발달되었다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유현이 없었다면 그것은 강 건너 불에 불과하였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최치원과 설총은 유학에 뛰어난 분들이나 그것은 당나라 유학이지 송나라의 주자학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뒤에 학문을 연구한 사람이 중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앞자리에 봉안되고

정작 먼저 공부하고 받아들여 우리나라에 들여온 사람들은 왜 뒤 구석에 있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최치원과 설총은 송조 6현에 비하여 시대도 먼저이고 그들의 학문과는 연관이 없음으로

동, 서종향위의 위차를 조정하여 양현을 수위로 하여

동종위는 홍유후 설 선생, 도국공 주염계, 낙국공 정이천, 문성공 회헌 안향, 문정공 환훤당 김굉필, 문정공 정암 조광조,

문순공 퇴계 이황, 문성공 율곡 이이, 문원공 사계 김장생, 문경공 신독재 김집,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 순위로 봉안하고,

서종위는 문창후 고운 최치원, 예국공 정명도, 휘국공 주회암, 문충공 포은 정몽주, 문헌공 일두 정여창, 문원공 회재 이언적,

문정공 하서 김인후, 문간공 우계 성혼, 문열공 중봉 조헌, 문정공 우암 송시열, 문순공 현석 박세채 순위로 봉안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유교계에서도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감히...라는 한마디를 조자룡 헌칼쓰듯 써먹는 이들에 의해 항상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지요.

 

그 감히 라고 이버릇처럼 하는 이들이 과연 소위 말하는 송조 6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궁금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동국 18현이라는 우리나라 배향공신도 공정한 잣대가 없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 사람을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현종 11년(1020) 8월이었습니다.
당시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했는데, 신라사람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2년 후인 현종 13년(1022) 1월에는 신라의 설총을 문묘에 배향했습니다.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에서 유교를 학습하고 실천한 설총의 공로가 인정된 것이 겠지요.
고려 말인 충숙왕 6년(1319)에는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공로가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게 끗발싸움이 됩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였습니다.
조선개국 이후 권근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요구가 줄기차게 있었지만, 결국은 정몽주가 중종 12년(1517) 9월 17일에 배향된 것입니다.

정몽주라고 하니까 아 공정하구나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정몽주는 고려조의 충신으로 죽었을 뿐이지 조선조 유학의 발전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부터 학문적 성취가 아니고 붕당의 입김에 의해 배향할 인물이 결정이 됩니다.


정몽주가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유교는 권근 계열의 실용적 유교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유교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은 모두가 경세가가 아닌 도학자들이 됩니다.

예컨대 광해군 2년(1610) 7월 16일에 문묘배향공신으로 결정된 이른바 5현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도학자이며 의리학자들이었습니다.


임진란 이후 당쟁이 격화 되면서 문묘배향 공신도 당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의 당파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문묘에 배향시키고자 합니다.

이 결과 당파가 바뀔 때는 문묘배향공신까지 바뀌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이와 성혼은 서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후 문묘배향공신이 되었지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힘을 잃으면서 문묘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 후 갑술환국에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한 이후 다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습니다.


숙종이후로는 박세채를 제외하면 모두가 노론계 인물들이 배향됩니다.
박세채의 경우는 탕평을 모색하던 숙종이 일찍이 탕평론을 주장한 박세채를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인물들, 즉 김인후,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 계열의 학문적, 정치적 연원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선현을 제사한다는 말도 그냥 말일 뿐이지요.

 

특히 이곳 제주향교에서 자랑하는 계성사는 더욱 황당합니다.

 

안내판에 다른 향교와 달리 계성사가 1854년에 창건되었는데 여기에는 5성의 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bla bla... 하며

아주 자랑스럽게 썼는데 이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요.

 

공자가 대단하다고, 자사가 대단하다고, 증자가 대단하다고, 안회가 대단하다고, 맹자가 대단하다고

그들의  아버지까지 제사 지낸준다는게 이게 옳은 일입니까?

 

공자를 비롯한 5성현의 아버지는 원래 대설위에서도 봉안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저기 향교에서 봉안을 하다가 중종 34년에 성균관 문묘에 배향을 하고 숙종 27년에 별채 건물인 '계성사'를 짓고 독립적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영조 15년(1739년)에는 제향을 올릴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州府의 큰고을에는 계성사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제주에서도 발빠른 사람들이 계성사를 창건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지만 성균관에서 허락하지 않다가

다른 향교에 계성사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더지난 철종 5년(1854년)에야

제주 향교내에 계성사를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후 1949년 전국유림대회에서 여러 결의에 추가하여 지방향교에 계성사가 있는 곳은 그 위패를 조용히 매안하기로 결정을 하고

서울에 있던 계성사는 성균관대학교를 지으면서 헐었고, 향사의 예도 폐하게 되었는데

'전주향교'와 '제주향교'에서는 절대 불가하다고 하여 지금도 계성사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 자랑거리가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릉향교에 가면 현재 봉안된 위패수는 매안 이전의 성균관의 133위 보다 3위가 많다고 자랑합니다.
대성전에 5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에 우리나라 9현과 중국인 42현, 서무에 우리나라 9현과 중국인 41현등 115위를 봉안하여 모두 136위를 봉안하고 있는데

계성사는 없앴지만 계성사에 봉안하였던 5성의 부위중 증자의 아버지 래무후 증정과 자사자의 아버지 사수후 공리를 동무에,

안자의 아버지 곡부후 안무를 서무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3위가 더 많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주향교에는 대성전에 5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을 봉안하고

양무에 우리나라 18현과 중국인 94현 중 평음후 유약, 승씨백 복승, 창려백 한유, 문정공 이동을 동무에,

단부후 복불제, 광천백 동중서, 온국공 사무광을 서무에 봉안하여 총 46위를 봉안하고 있으며

여기에 추가하여 계성사에 5위를 봉안하여 모두 51위를 봉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들어주는 이 없는 자기들끼리만의 자랑입니다.

 

문득 한말의 유학자 신채호의 유교 비판 글이 생각나서 몇자 옮겨봅니다.
"시대를 이끌었던 유교사상이 정체하자 국가도 정체하고 말았다.

본래 유교는 새로움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일찍이 공자도 노자에게 禮를 묻고 순자에게 樂을 물었고,

도가 다른 이단에게도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의 유자들은 새로운 학문, 새로운 이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유교 자체가 망국의 원인이 아니다.

유자들이 입으로는 孔孟과 顔曾을 말하나 그 뇌수에는 부귀만을 바라고,

외면으로는 인의예지를 말하나 그 속은 명예를 탐낼뿐이다.

진정한 정신은 계승하지 않고 형식과 문자와 외형만을 계승하고 있다."

 

1985년에 대성전 뒷 언덕에 건립한 공자동상입니다.

 

 

서북쪽 담장 옆 비석들

 

지방관들의 흥학비와 향교의 중수 보수에 돈을 낸 이들에 대한 감사비입니다.

 

지방관들의 흥학비

 

 

 

 

 

 

 

 

그리고 향교개교 600주년 기적비를 보고

 

보수한지 얼마 않된다는 전사청을 봅니다.

 

돌아나오는 길
꽤나 오래된 듯한 나무

나무 옆에서 비룡못을 지나 향교길로 해서 향교에 들어서면 만날수 있었다던 말물이 어디있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 샘물을 마시면 능히 백보를 날수 있다能解飛百步고 했는데....

 

향교를 나와 그 옆 제주중학교로 가서 초대제주중학교장이던 현경호선생의 송덕비를 봅니다

 

비석의 명의자는 1969년 비석 세울당시 이사장이자 제주중학교장이자 제주상고교장인 강석범입니다만

지금 이 학교의 주인은 아남학원의 강영민이지요.

 

향교와 제주중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비석을 빙돌아보고

향교땅인 운동장건너 아남학원 소유인 학교건물을 다시 한번 보고 문을 나섭니다.

 

 

 

제주중학교 문을 나서니 서문시장이 길건너에 보입니다.

 

옛날에는 소나무 밭이었던 궤가슭아래 양씨집안에서 보성군수를 한 사람의 묘가 있어 양묘전이라 하던 곳이

묘를 이전한 후 개발되어 1954년 시장이 개설되어 적십자부근에서 열리던 오일시장과 함께 한시절을 풍미했습니다.

 

1960년대, 서문시장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제주시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자리 잡으며 활기차게 발전하여 한때는 점포수가 200개가 넘을 정도로 번성기를 누렸지만

제주시청과 학교,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대거 이전하면서 판매부진에 시달리다 대부분의 점포가 폐업 혹은 이전하고

지금은 80여개 점포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2년전엔가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구입해 맞은편 식당가에서 구워먹을수 있게 하는 소고기 특화시장인가를 한다고 하더니

그것도 뜻대로 않되는지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최근 뉴스에 의하면 제주 서문공설시장이 중소기업청에서 주관하는 ‘2013년도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사업’에 선정돼

2년간 10억원의 국비를 지원받게 됐다고 하네요.

종자돈 삼아  번영하시길 바랍니다.

시장안을 지나쳐 양묘전이 끝나는 지점이자 궤가슬이 시작되던 지점에 있는 금성목욕탕옛터를 갑니다.

옛 버스차부쪽으로 갈까하다가

다시 길을 건너 향교앞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어

제사유적이 발굴되었던 지금의 용담1동 포제단 앞을 지나 한두기마을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