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화북을 다녀왔습니다.
오늘 문화유산답사회 정기답사를 화북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오전에 다른 곳을 다녀오느라고 오후에 잠시 참가했습니다.
회원들이 오전 답사를 마치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하여 엉물머리개를 잠시 들릅니다.
큰이물에서 보는 엉물머리개입니다.
별도포구성창은 두군데 있지요.
엉물머릿개와 금돈지개입니다.
엉물머릿개를 예전부터 있어온 성창이라하여 묵은 성창이라 하고
금돈지앞포구는 새로 만든 성창이라 하여 새성창이라 합니다.
새로 만들었다는 것도 영조 11년이니까 1735년 까마득한 옛날이지요.
그 때 새성창이라고 불리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이름이 내려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이곳 별도포구에 김정이 수축했다는 새성창이 어딜까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함이 있습니다.
1702년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이 탐라의 주요 시설과 지역을 순력할 때 수행한 화공에 의해 그려졌다는 탐라순력도에 보면
지금 우리가 묵은성창이라고 하는 곳에는 포구가 없고
새성창이라 하는 곳에 포구가 있습니다.
일단 그림과 다음지도를 보세요.
탐라순력도 화북성조禾北城操 그림에 보면 진성 동쪽으로 연대가 있고
진성앞은 그냥 바다이며
진성 서쪽으로 별도포가 남쪽으로 파여 진성서문앞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는 진성 서쪽에 남쪽으로 움푹파인 포구에 추가하여
진성앞 아래에도 동쪽으로 움푹파인 포구가 있습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걸어 볼까요.
두그림을 비교하면 지금 묵은 성창이라 말하는 엉물머리개가 이형상시대에는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1737년 김정이 화북포를 정비할 때 올린 고유문告由文에도
“이 화북포구는... 암석이 들쑥날쑥 솟아 있고,
큰 물결이 찧어대며 거센바람이 격렬하게 부딪쳐서...라고 쓴 것으로 보아
북풍을 바로 맞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가 새성창이고 있지도 않던 곳이 묵은 성창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과 다툼이 생기고
답도 없이 감정만 상한채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또 평소에는 탐라순력도가 세밀하여 그것을 근거로 옛시설의 위치를 고증한다는 사람들이
이그림을 보면 순력도가 개념도이지 꼭 사실 그대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런가 봅니다.
요새 세상에 말만 되면 되지 그것이 꼭 사실에 부합할 필요는 없나봅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느냐가 논쟁의 대상이 되더니
요새는 스토리텔링이라해서 사실여부는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말만 그럴듯 하게 꾸며지면 되나 봅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비석들을 봅니다.
동동네 여기저기 있던 물통을 보수정비할때 출연했던 사람들의 기념비를 동부락회관 옆 한군데로 모아 놓고,
그것도 모자라 촌스럽다고 부수고 다시 만들어 세운 비석들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난, 그리고 그곳이 어디에 있었다는 표식도 없이
다시 만들어 한군데 모아놓은 비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엉물 앞에서 별도 연대를 포함한 동부락을 봅니다.
막상 엉물은 않찍혔네요. 사진 오른쪽 끝부분 뒤에 있습니다.
그리고 고래물로 갑니다.
물통옆에 가래(가는 아래아)가 있었다하여 가래(아래아), 고래물입니다.
지금 해녀의 집 앞부분 어딘가에 가래가 있었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서 이자리를 거쳐 엉물머리부분까지 방파제식연결도로를 쌓아놓아 흔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큰이물에서 엉물머리개를 본다고 했는데
그 물통이름이 큰이물이 아니고
큰이물은 화북포구 서쪽 길가에 있어서 큰질물, 큰이물, 서착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곳 동착에 모아둔 표석 세번째, 네번째가 큰이물표석입니다.
즉 큰이물이 동착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입니다.
그냥 몇몇이 하는 이야기가 검증도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이동네 이름도 그렇지요
화북동, 그리고 별도리.
1702년 탐라순력도에 두 이름이 함께 쓰입니다.
화북성조라는 제목으로 화북진성이 그려져 있고 포구입구에는 별도포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진성주변 마을도 별도포리라고 쓰여있지요.
그럼 화북과 별도 두이름이 같이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면서
진성의 이름은 화북진성이고 마을의 행정명은 별도포리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의 공식행사인 순력에 따라다니며 그린 그림에서의 지명을 임의로 쓸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진성은 이 마을이 화북이라고 불리었을때 지어져 화북진성이라 이름하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공식기록으로 별도라는 이름은 1601년 청음 김상헌이 기록한 ‘남사록’에서 처음 나옵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고 피역자들이 왕왕 배를 타고 육지로 도망가기 때문에
조천관, 별도포 두 곳에서만 배가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한 뒤,
입출항자를 철저히 감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1601년 당시에는 별도포로 불리우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
혹자는 1300년(고려 충렬왕6년 경자년) 제주에 현을 설치할 때
제주를 동서로 구분 를 설치하면서 처음 별도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1653년에 쓰여진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목 건치연혁에는 1300년에 제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었다 하였고
제주현 본읍을 중심으로 동도에 6개의 속현(신촌, 함덕, 김녕, 토산, 호아, 홍로),
서도에 9개의 속현(귀일, 고내, 애월, 곽지, 귀덕, 명월, 차귀, 산방, 예래)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1653년 조선 효종 4년 초 별도리를 화북리로 그 이름이 바꾸었습니다.
별도가 볏뒤로 불리었다하여 벼禾 그리고 뒷쪽을 의미하는 北을 써서 화북이라하였다 하기도 하고
지금 화북의 원마을인 부록마을이 바다쪽으로 확장되는 중간지점인 거로일대에는 벼농사가 되었기 때문에
벼밭북쪽이라 하여 禾北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튼 이때부터 화북포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탐라지(耽羅志, 1653년 刊) 水戰所條에
현재 화북포에 있는 수전소에는 판옥선이 몇대이고 격군이 몇명이고 사포(포수)가 몇명이고 등 등...
그러다가 1678년인 숙종 4년에 최관목사가 성을 쌓습니다.
좀더 동쪽에 자리 잡았던 별방진別防鎭이나,
서쪽 끝에 있는 명월진明月鎭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이지요.
아마도 이성은 훗날 그려진 탐라순력도 화북성조를 보면 수전소를 확장 개축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여간 화북리라는 이름으로 있을때 성을 쌓아 화북진성입니다.
1843년, 조선헌종 9년에 다시 마을이름이 별도리로 돌아옵니다.
왜일까요?
이미 화북이라는 이름이 190년이나 쓰이고 있었는데 다시 별도리로 돌아온 것은
그 이름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겁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육지로 가는 배가 들고 나고 할 수 있는 곳은 조천과 화북뿐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천포구는 공사선이 모두 선창까지 들고 나지만 화북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큰배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들은 거룻배로 큰배까지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뉠別 거룻배刀를 써서 별도포라 이름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조천포구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조천포구로 배를 직접 댈수 없을때 거룻배가 준비되어 있는 이 포구를 사용한 것이지요.
1737년 김정이 화북포에서 한 일도 포구를 확장한 것이 아니고
선창이 낮아서 밀물때는 선창을 넘어 물이 밀려와서 배가 가라앉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선창을 높게 쌓는 일을 한 것이며
이 공사와 병행해서 건입포축항공사도 시작한 것입니다.
최근 2~3년 전에 문화관광해설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동시 다발적인 블로그포스팅으로 '별도는 뱃도의 한자차용어이고 뱃도는 배가 들고나는 입구(도)를 이야기 한다.
그래서 뱃도가 벳도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그냥 못들은 척 하였는데 이게 점점 더 전파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제주의 포구는 포구나 개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전부 뱃도, 벳도라고 써야합니다.
별도리는 조선시대에는 볏뒤마을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벳도리라고 불리운 것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일제강점기에서 부터입니다.
別刀里는 일본발음으로 べつとうり벳도리라고 불리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서 불리운, 그리고 강점기 일어사용으로 조선사람들이 부른 마을명칭이 벳도리이고
그 잔재가 남아서 벳도, 벳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別堂(べつとう), 短刀(たんとう), 三千里(さんぜんり)등의 용례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뒤 않맞는, 그져 그럴듯한 말 그대로의 스토리텔링입니다.
보덕사로 갑니다.
절집안에 안내판에 안봉려관이 이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1951년 백인홍이라는 스님이 절집을 창건하셨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었이 중요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안봉려관은 1908년 지금의 관음사앞 해월굴에서 3년간 관음기도를 드린후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고
통영 용화사 등지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와 관음사를 창건하고
그 후 제주 곳곳에 여러곳의 사찰을 세운 중흥조라고 합니다만
그 분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여기다 절을 지었다?
그것을 연기라고 할 수 있는지요.
보덕사는 이 절집 자체만으로도 마을 불교신앙의 중심지입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없는게 더 좋을 듯 싶네요.
청풍대로 갑니다.
청풍대는 화암 신홍석선생의 기적비가 세워지고 그 비석주변에 돌을 세우니 대가 되어
청풍이 불어 음률을 읊을만하다고 해서
기적비를 쓴 효산 이광렬이 몇년뒤 다시 청풍대비석을 세웠습니다.
기적비와 청풍대표지석비 모두 효산(曉山) 이광렬이 썼는데
효산 이광렬은 일제 강점기 호남을 대표하는 서화가로 일본 황실에서도 이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분은 호남의 창암선생의 맥을 이어받아
그 맥이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효산 이광렬을 거쳐 석전 황욱과 강암 송성용으로 이어진다고 할 만큼 대단한 분입니다.
기적비는 화암선생이 돌아가신 1920년에 쓰셨고
청풍대표지석비는 1941년에 썼는데
이 분이 1885년 생이니까
이 분은 화암선생과는 35살 차이로 교류가 없었을 것이고
화암선생의 아들 중 누군가가 당시 호남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에게 정중히 부탁한 듯 합니다.
그래서 육지 오석에 글을 새겨서 운반해 왔겠지요.
화암선생 기적비를 저도 처음에는 개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원비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 했습니다만
작년엔가 진안군 성수면에 갔다가 이광렬선생이 1930년경에 의뢰받아 쓰셨다는 '훈련대장전공가재신도비’를 보고
아, 그렇구나 한적이 있습니다.
비석 몸체의 재질과 형태와 전면부 글씨체(小篆體)가 거의 비슷합니다.
화암 신홍석선생은 문집이 하나 있습니다.
제주문화원에서 김익수선생이 번역하여 2000년에 발행한 바 있습니다.
독집은 아니고 老橘선생이라는 김협의 노귤시집과 신홍석의 화암시집을 함께 묶은 건데...
화암시집편에 서문을 李膺鎬가 썼읍니다만
그 내용은 신선생의 아들이 신선생의 시문을 보여주어 그것을 함께 묶었다정도의 표현만 있습니다.
기적비 말미에 문인이라하여 여럿명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중 맨위에 이응호가 적혀 있습니다만
그곳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글 어디에도 신홍석선생에게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화암시집을 엮을때 신홍석선생의 후손이 그들에게 시를 하나씩 받아 시집 말미에
그 시를 올리면서 저자 이름앞에 문인, 후인등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청풍대에서 김석윤와가를 내려다 보다 회원들을 만나 함께 김석윤와가로 갑니다.
김석윤와가는 통상 제주의 전통가옥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고들 합니다만 ...
1904년 지어진 집이 전통적 원형을 보여줄수는 없지요.
문화재청에서는 아주 완곡한 기록을 합니다.
"1904년 건축하여 3대째 내려오는 이 집은 제주 민가의 발전형식 중 대표적인 예라 볼수 있다.
먼문간과 안거리만 기와집이고 밖거리와 모커리는 초가로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별동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제주의 전통 주거형식의 바탕에다
한본토의 상류주택이 지닌 남성공간인 사랑채의 기능을 접합된 형식을 보여준다."고 평을 합니다.
즉 전통적 원형이 아니고 그 뒤 본토의 양식이 접합된 형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 차원의 민속문화재로 그치는 겁니다.
2010년 3월에 완전 해체후 재건축을 하여 제 모습을 찾는 복원을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만
집주인이 제주에서 이름난 건축사이면서도 어쩨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무성의하기까지 하여 잇돌을 기계로 잘라낸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등 많이 거북합니다.
그래서 사진은 한장도 찍지않고 이문간 구석방에 있는 커다란 뒤주한 장 찍었습니다.
그 옆 비지정문화재인 김용일와가입니다.
년도는 정확치 않지만 김석윤와가보다 늦게 지었습니다.
그래도 먼문간을 들어서면 바깥 마당과 이문간이 나옵니다.
이문간을 거치면 주공간인 마당에 들어서게 되는 제주의 전형적인 올레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커리, 밧커리 사이에 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습속입니다.
그전에는 후원이라하여 안커리 뒷쪽
밧칠성주변에 화단을 가꾸었지요.
안커리, 밧커리 사이의 공터는 작업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문간은 흙기와 그대로지만 안거리는 신형기와로 교체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이문간에 상량문이 붙어 있습니다.
용(뒤집어 씀) 정사년 계묘일 정사월 계묘시 수주상량竪住上樑 호虎 또는 구龜(바로씀)
보았을때 호虎자로 보입니다만...
상량문 상하에 용호라고 쓰는 것은 양식에 맞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상량문은 앞에 뒤집어쓴 용, 뒤에 바로쓴 구龜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구자이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상량년도인 정사년은 1937년일 수도 있고 1977년일 수도 있겠으나 저는 1977년으로 봅니다.
시간을 나타낸 시자를 시時로 않쓰고 시峕(时와 같은 용도로 쓰이는 중국 간체자)로 썼는데
이글자는 1952년 2월5일 중국문자개혁연구위원회에서 제정한 간체자에 들어있는 글자로써
1956년1월28일부터 '한자간화방안'이라는 중국 국가정책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글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이 1904년 이후 언젠가 지어졌다고 보지만
상량문은 1956년 이후의 정사년인 1977년에 본채를 개조할때 썼다고 봅니다.
곤흘동을 갑니다.
곤을출신 김문현이라는 분이 병진년(1916년) 초에
밧곤을 서쪽 안드렁물에서 부터 밧곤을, 샛곤을, 덕수물, 안곤을 그리고 금산마을로 길을 내어 주어
그 고마움을 기리려 곤을동 부인일동의 명의로 그 해 3월 세운 기념비가
자기자리인 덕수물옆을 떠나 엉뚱한 곳에 와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멀리 바다를 봅니다.
제주항 확장공사로 이제는 앞도 막혔습니다.
기분이 씁쓸해져 좋은 글을 쓸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지금부터는 사진만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