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일요일
문화유산답사회 9월 정기 답사.
건입동을
항해자의 안내로 한바퀴 돌았습니다.
비는 내리고 참여한 회원은 적고
안내자 참 힘빠지는 날이 었을 겁니다.
항해자에게 아쉬움과 고마움을 전하며
찍은 사진을 정리 합니다.
사진에 붙이는 설명은
자료와 현지 표석에 기재된 내용이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많지만
항해자가 수집한 내용 그대로를 옮겼으며
사진 순서는 단지 그날 돌아본 순서입니다.
건입동은 1955년 제주시에 편입되어 동(洞)이 되었다.
건입동은 서쪽 산지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산지"라 속칭되고,
동쪽으로는 화북과 경계지점인 '고으니모르'를 중심으로 여러 동네가 하나의 자연부락으로 독립되어 법정동을 이루고 있어
20개통 113개 반으로 나눠져 있다.
산지천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일도1동, 남쪽으로 일도2동, 동쪽으로 화북동이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바다가 아름다운 전경을 뽐내면서 펼쳐져 있다.
한국지명총람에 건입면 건입리 "건들개"로 나와 있으며, 건입리라는 유래는 상고사를 더듬어 보면 신라시대에 고을방의 15대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가 신라에 갔다가 이곳으로 건을 쓰고 돌아왔다하여 지어진 지명이라고도하고 지방인사들에 의하면 건방의 맥(脈)이 들어왔다 하여 건입리(健入里)라 불리운다고 하는 이도 있다.
복신미륵(동자복)
이 석상(石像)은 '자복(資福)' '자복미륵(資福彌勒)'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 형상이 특이할 뿐더러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된, 기자신앙(祈子信仰)이 감도는 진중(珍重)한 민속자료이다.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은 둘 다 달걀 모양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써서 늠름히 서 있는 모습으로, 그 키는 동자복이 334cm, 서자복은 290cm이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미륵이 있는 자리는 만수사(萬壽寺), 일명 동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서미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분괴(焚壞)되면서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
두 미륵이 민간에서 명복신(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음은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동미륵은 사찰이 없이 민가의 뒷뜰에 있으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집안의 제액(除厄)과 육아(育兒)에 특히 효험이 있다 하여 근처의 민간인들이 승려를 청해 오든지 또는 본인대로 택일하여 수시 치제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시 옛지명》에는 한두기 미륵보살은 '할망'이고 건입동의 것은 '하르방'이라 한다.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년 후에 세상에 줄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석가모니는 과거에 해탈한 붓다이고, 미륵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종말 또는 개벽의 그 때에 도솔천에서 지상 세계로 내려와 미륵정토를 여는 미래불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처럼 때가 되면 재림할 재림불이다. 석가모니불은 좌불인데 반하여 미륵은 입불이다. 석가모니는 이미 해탈하여 편안하게 좌정해 있는 반면 미륵불은 미래를 내다보며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서 천리안으로 세상을 앞질러본다는 말도 있다. 미륵불은 우리 나라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보통 투박하고 거칠게 민간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서 볼품은 없지만 무척 친숙한 느낌이 든다.(제주문화의 향기 280쪽)
개인주택 뒤에 있어 기도하러 다니는 여성들, 문화재 답사꾼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했는데 2009년말 주택이 철거되었다. 그리하여 훨씬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고 매달리는 여성이 없을 것 같은 시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여성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제주의소리 2010.01.26. 김순이 글)
산지항 유물 출토 터
중국 한 대의 거울과 칼,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되었던 자리다. 이들 유물은 1928년 산지항 축항공사를 위한 암반 채취 중 한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건입포터
옛날부터 건입동을 '건들개'라 불렀다. '탐라순력도'에는 '산지촌(山之村)'으로, 그 밖의 문헌이나 지도에는 '건입포'로 표기돼 있다. 이것은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한 이두식 표기이다.
과거의 읍지들에 따르면 '고을나의 후손 고후, 고청, 고계 등이 신라에 입조하고 돌아 올 때 백성들이 맞이했던 포구'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 이들 삼 형제는 성주, 왕자, 도내라는 작위와 푸짐한 선물을 배에 가득 싣고 들어 왔는데, 그때 머리에 두건을 한 형제들이 들어 왔다고 해서 건들개(巾入浦)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포구에 건입포수전소가 있었다. 전선과 군사가 있어서 번갈아 가며 바다를 지켰다. 한편 탐라순력도를 보면 '건포배은'이란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금에 대한 도민들의 북향배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산지항이 언제부터 외국과의 교통을 위한 항구였는지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1928년 8월 산지항 축항공사 때 용암굴에서 기원전인 전한시대의 한경, 오수전 등과 왕망시대의 화천, 동검 등 금속문화의 유물이 대량 발굴된 바 있어 외국과의 문물교류는 이미 기원 1세기경부터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제주항(산지항)은 1920년 조선총독부령 제 41호에 의해 지정항이 되고, 1927년 5월에 정식 개항되었다. 또 1926년에는 상선을 취항시키기 위한 축항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공사는 서북향에 의한 격랑을 막기 위해 연장 310m의 서방파제를 축조하였으며 도내에서 벌어진 근대적 첫 항만공사로 기록되고 있다.
제빙공장터
제주 최초의 어류냉동을 위한 얼음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건입포는 육지부를 오가는 객선과 어선들의 입·출항이 매우 활발했던 포구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얼음은 어류의 선도를 유지케 함으로써 어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바로 옆에는 당면공장이 있었다.
대한통운 제주화급소터
궤도차 기점터
산지축항에 암석을 운반하기 위해 궤도(도록고)차가 운행되었던 기점이 이곳에 있었다. '도록고'는 무동력으로 석탄 등을 운반하는 차량의 하나이다. 1928년에는 한 일본인이 구좌읍 김녕리에서 한림까지 철로를 깔고 사람과 화물을 운송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었다.
일본군 진주,철수터
구덕집터
김만덕 객주집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사회독지가로 이름을 날린 김만덕의 객주집터이다. 만덕은 어려서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관기의 집에서 자라 뛰어난 미모의 명기가 되었다. 뒤에 기적을 벗고는 이곳에 객주집을 차려 일약 거부가 되었으며 1792년부터 4년간 흉년이 들어 도민이 굶주리자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털어서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구제했다. 이 공로로 만덕은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구경하는 특전을 얻었다.
제주 최초의 발전소 터
1927년 제주에 처음으로 전기 불을 밝히게 했던 제주 최초의 내연발전소터다. 지장샘의 풍부한 용출수를 물래방아로 돌려 150마력의 발전기를 가동했다.
1920년대 목욕탕터
1920년대부터 건입동 주민들은 이곳에서 온수욕을 즐겼다. 이 욕탕은 제주에 처음 설치된 발전기에서 순환되는 열수를 활용했다.
금산(禁山)
금산 수원지에서부터 제주기상대, 중앙교회, 제은금고, 예전선일건재사 건물 등이 있는 서남쪽 지대는, 동문로터리에서 동부두로 나가는 도로에서 볼때 병풍을 친 듯이 둔덕을 이루고 있다. 부두로 난 도로를 포함한 이 일대 특히, 제은금고와 예전 선일건재사 건물 등이 있는 남동쪽 지대가 '금산'의 중심지였다. 공신정에서 굼산물 위 언덕까지이다. 엣날에는 암벽으로 벼랑을 이룬 이곳에 나무들이 많아서 풍치가 수려한데다가 물이 좋았다.
명종 21년(1566) 동성이 '산지포' 위 언덕까지 확장되었던 것은, 이곳의 '광대물' , '금산물' , '지장깍물'을 '성안'의 급수로 삼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금산' 밑에는 홍종우 목사가 창건한 '영은정'이, 그리고 옛 선일건재사 자리에는 '삼천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장샘/산짓물.
'지장샘' 과 '산짓물'은 '금산수원지' 경내에 있다. '금산 수원지' 정문 쪽 '금산유허비' 바로 밑이 '지장샘'이며, 수원지 건물 서쪽에 있는 물탱크 위치가 '산짓물'이다.
'지장샘' 또는 '지장샘이'에서 흐르는 물을 '지장깍물'이라고 한다. 산짓물 하류 즉,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정공장이 있었을 때는 취수탑을 세워 '지장깍물'을 송수하여 썼다 한다.
옛날 이 근처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당집이 있었다 하여 '지장샘'이라 했다 한다. 원천이 깊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지장샘'은 곧장 바다 쪽으로 흘러들었는데, 하류에 고인 물 웅덩이를 '지장물깍' 또는 '지장깍못'이라 하였다
산포조어
산포조어로 알려진 금산 조망 터. 원래는 이 금산 앞이 바로 산지포구였다. 산기슭에 광대천과 지장각 연못이 잇어 바로 바다로 이어졌고 여럼에는 수많은 욕객이 모였던 곳이다.
영은정 터
금산 기슭 약수로 이름난 샘가에 제주바다를 굽어보던 영은정터.
지장깍물
단추공장 터
거울공장 터
예전 동사무소 건물앞 사범학교 건립 의연비
고서흥공덕비
제주시 건입동 기상청 북쪽에 있는 바위언덕길을 속칭 「공덕동산」이라고 한다. 공덕비는 이 길을 뚫은 高瑞興을 기리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자연암석을 다듬고 새긴 비문을 보면 상부에 「高瑞興」이라고 이름을 새기고, 그 아래쪽에 조금 작은 글씨로 두 줄로 「捐出私財 攻石治路」라 새겼으며, 오른쪽 구석에 「丁丑 二月 日」이라 되어 있다. 정축년은 당시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종14년(서기1877)으로 해석된다. 이 비문을 중심으로 암벽에 붙여 석실을 만들었다.
당시 건입포 주민들은 동문 밖으로 통하려면 북문과 동문을 거쳐 우회해야 했으므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바위언덕을 타고 넘어다녔는데 자칫 실수하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험이 많았으므로 그것도 밤에는 도저히 건너다닐 수 없었다.
경민장(警民長)이던 고서흥은 일년내 농사지은 조 3백석을 고스란히 내놓고 석수와 인부를 사서 도로개척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암반을 부수어 길을 뚫는 일이었으므로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혔다. 그래도 끝까지 이를 극복하여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동리 사람들은 그의 공덕에 감사하여 그 바위언덕을 「공덕동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가 뚫어놓은 길목에 비문을 새겨 그의 은혜를 기렸다.(제주의 문화재 332쪽)
지금은 공덕비가 있는 곳 위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고, 공덕비는 철제 울타리를 두르고 주위에 깎은 돌을 깔아 단장하였으며, 옆 벽면에 안내문과 함께 [健入里民人等狀]이라는 제목의 옛문서를 돌에 새겨 붙여 놓았다.
불미터, 말방애터
공신정터
공신루는 북수구 위에 있었던 문루이다.
효종 3년(1652) 8월에 비바람으로 남,북수가 일시에 파괴되자, 이원진 목사는 그 해 겨울에 남, 북수구를 다시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효종 4년 (1653) 봄에 완성하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워서, 3월 11일에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낙성연을 벌였는데, 이 때 두보의 시구에서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는 뜻을 취하여 공신루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공신루는 순조 8년 한정운 목사에 의해 중수되고 그 호칭도 공신정이라 개명되었다. 그 후 폭우로 다시 허물어지자 순조 31년(1831) 에는 목사 이예연이 "물길이 가까워서 노는 사람들이 늘 북적거린다."고 하여 삼천서당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그 위에 초루를 지었는데, 이는 북두성을 바라보며 세운을 기원하는 사당으로, 목사와 관리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또는 외래객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헌종 14년(1848)에 목사 장인식이 중건하였고, 고종 21년에는 목사 심현택이 중수하였으며, 광무 8년(19040에 목사 홍종우가 다시 중수하였다. 뒤에 이곳은 제주측후소 기지가 되었다가 1931년 제주신사가 건립되면서 헐리었다.
북성홍문터
제주성은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명종10년(1555)에는 을묘왜변 때에 영암에서 패퇴한 왜선 40여척에서 1000여명의 왜구가 화북포에 정박하여 상륙하고,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왜병을 생포하고 적선 5척을 捕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때는 동쪽 성벽이 산지천 서쪽(안쪽)이라 현재의 여상이나 일도교 정도에서 왜구들은 제주읍성을 공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수문 목사는 이렇게 당하느니 치고 나가자고 판단해서 70명의 별동대를 성밖으로 출전시켰다. 다행히 이 별동대를 이끌었던 김성조(金成祖)를 비롯한 4명의 장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었다. 왜구들이 물러났던 것이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명종조 7월 6일 기사에는제주기상청 북쪽에 남아 있는 성벽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하기를 “6월 27일에 왜적이 무려 천여명이 하륙하여 진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골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입하여 거리가 30보 정도였는데 왜인은 전(箭)에 맞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金直孫과 갑사(甲士) 金成祖·李希俊, 보인(保人) 文時鳳 등 4인이 말을 타고 돌격하니 적군이 궤산(潰散)하였습니다. 한 왜장이 있었는데 홍모(紅毛) 투구를 썼습니다. 자기가 활 잘 쏘는 것을 믿고 혼자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정병(正兵) 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맞히니 곧 엎드려 쓰러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참획한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340쪽)
그 후 10년이 지난 중종20년(1565) 곽흘 제주목사가 10년 전의 교훈을 살려 성 동쪽 벽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의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이다.
북성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바깥 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북성 홍문(虹門) 터라는 표석이 있다. 여기서 虹은 무지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虹門은 내를 가로질러 교각 부분이 둥글게 만들어진 문이다.
《이곳은 제주성 북수구로 홍문이 있던 터다. 처음 죽서루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되고 효종3년(1652) 목사 이원진이 보수하면서 공진루를 세웠다. 그 뒤에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세웠다. 이 홍문도 1927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달관대 터
제주성의 명소 달관대터. 제주동북성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곳에는 오랜 고목과 함께 용린병, 중장병, 호반명 등 기암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바위 아래에는 감액천, 급고천등 샘이 솟아 절경을 이루었다. 1736년 김정 목사가 이곳을 정비, 달관대라 명명한 뒤로 시인 묵객들의 휴식 조망 터가 되고 사회 주연터가 되었다.
삼천서당터
제주도에 제일 먼저 생긴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중종29년(1534) 심연원(沈連源) 목사가 세웠던 향학당(鄕學堂)을 들 수 있다. 이것이 폐쇄되자 임형수(林亨秀) 목사가 인종원년(1545)에 부임하여 김녕 포구 위에 김녕정사(金寧精舍)를 지어 동학이라 하였고 명월성 서쪽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를 지어 서학이라 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정사는 보통 명유(名儒)가 창건한 강학의 서재(書齋)이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서원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기도 하였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향학당, 김녕정사, 월계정사가 일종의 개인의 서재적 서당으로 그치고 말아 정사가 서원으로 발전, 변모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당은 일반 서민의 자치적 성격을 내포한 서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삼천서당은 영조12년(1736) 제주목사 김정이 산지물 동쪽 동산에 세운 서당이다. 동쪽에 공신정이 있었다. 삼천서당이란 명칭은 산저천(山底泉)·감액천(甘液泉)·급고천(汲古泉)의 세 하천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유생을 기숙시키는 존현당(尊賢堂) 2칸, 삼읍(三邑:제주목·대정현·정의현) 자제를 기숙시키는 강당 8칸, 서민의 자제를 기숙시키는 장랑(長廊) 12칸 등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헌종9년(1843)에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중수하고 중수기를 지었으며, 철종1년(1850) 제주목사 이현공(李玄功)이 개건하였다. 광복후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58년 헐리었다.
『노봉문집』 중 「삼천서당상량문(三泉書堂上樑文)」을 보면 끝부분에 ?원컨대 상량한 후 영재가 구름같이 모여들고 큰 운이 하늘에서 열려 먼저 안 사람이 뒤에 아는 이를 깨닫게 하여 문교를 크게 하며, 아름다운 풍습을 열고 묵은 습속을 고쳐 영원토록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노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 전 지역의 선비가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김정이 비용을 내어 후진들도 양성하였다. 학생 정원은 20명이었으며, 고종8년(1871)에는 좌학당(左學堂)이 폐지되면서 정원을 4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삼천서당을 통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쓴 장한철(張漢喆)을 비롯하여 오점(吳霑), 신상흠(愼尙欽), 오태직(吳泰稷), 안영수(安永綬), 김양수(金亮洙) 등 수많은 학자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고종30년(1893)에 김정을 기리는 흥학비가 삼천서당 안 존현당에 세워졌는데 삼천서당이 헐리면서 이도1동 1421번지에 있는 오현단(五賢壇) 경내로 옮겨졌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감액천샘 터
달관대 아래 솟아나던 감액천샘터. 감악새미물이라고도 하였다.
조천석, 조천석 제사터
위치는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 칠성통 입구 광제교 아래에 있다.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에 세워졌던 석상이 진품은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전시되어 있고 여기 세운 것은 모조품이다. 진품에는 '朝天石'(위 사진)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모조품에는 '朝天' 두 글자만 새겨 놓았다.
전에 명나라로 가던 배들이 모두 이곳에서 바람 자기를 기다렸으므로 이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산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들이 이 표석을 기준 삼아 배를 매었다고 한다.(제주시 옛지명 201쪽)
「耽羅誌草本」에는 '山底橋 吊城內 牧使金 政 改名光霽橋 橋上有砥柱巖 刻朝天石三字'(산저교가 동성 안에 있는데 김정 목사가 광제교라 이름을 개명하고 다리 위에 있는 지주암에 조천석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라고 하였다. '광제'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준말이다. 즉 '비가 온 뒤에 부는 화창한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지주암은 중류지주(中流砥柱)를 의미한다. 중국 하남성 섬주에서 동쪽으로 40리 되는 황하의 중류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돌로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 속에서 우뚝 솟아 꿈쩍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에 처하여 의연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舊건입동지 38∼39쪽, 건입동지 118∼119쪽, 194쪽) 광제교에는 지주암이 있어 비가 와서 분 물이 여기에 이르면 광란하여 용솟음친다.(蘆峯集 참조)(舊건입동지 41쪽, 건입동지 122쪽) ※이 석상에는 세 글자가 아니라 '朝天'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원래 있었던 곳(다리 아래)에 받침돌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다리 위에 세웠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석상은 김정 목사가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朝天石의 문화적 의미(김찬흡 선생의 글)
흔한 돌이 자연 그대로라면 그저 석물(石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돌이 어떤 인간의 내적 정신활동의 양태나 작동이 가해졌을 때, 문화적인 소산물이다. 그게 학술적이나 예술적으로 뛰어난 돌이라면 값어치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제주대학교 본관 서쪽 입구 그 옆에 조천석(朝天石)이 세워져 있다. 이 돌은 세로 1m, 가로 40㎝쯤 되는데(실제로는 높이 93.5cm, 너비 32.5cm, 측면폭 32.5cm이다.) 앞면에는‘朝天石’, 뒷면에는‘庚子春 牛山書’(경자춘 우산서)이라고 종서로 음각되었다. 많은 인재들이 이 앞을 지나며 이 돌의 문화성과 역사성에 대해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돌의 유래는 이렇다.
1959년 제주상고 교사였던 현용준씨(玄容駿)가 산지천 동안(東岸) 광제교(光濟校) 곁에 있는 경해식당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그 건물 아래로 내려갔더니 커다란 바위 위에‘조천석’이 동쪽(현재 복원된 석상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서 이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다)을 향해 서 있지 않는가! 그는 이 돌이야말로 제주문화와 깊은 촉매 작용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현용준다운 총명한 눈빛이 있었다. 가끔 들려 살펴보니 돌 앞에 음식을 올려 기복(祈福)했던 자취를 알아내어 주변의 고로(古老)들에게 물었더니 옛날 이 산짓내가 자주 범람하여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타지방에 있을 때 치수(治水)하는 방법을 알았던 어느 목민관(牧民官)이 이런 돌을 세워 정성껏 치제(致祭)도 하고 또 홍수가 염려되면 이곳에서 지우제(止雨祭)를 거행, 그 뒤부터 수재(水災)가 없어져 치정(治政)에 밝은 목사라고 일컬었다 고 전해오는 말도 듣게 되었다.
얼마 없어 대학교수로 부임한 그는 박물관장 때에 남문로터리의 골동품 상점에서 그 돌을 발견, 물었더니 칠성로의 박치순옹(朴致順) 댁에서“1000원에 구입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현 교수는 1500원을 주고 사서 1979년 7월4일 박물관의 유물대장에 등재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돌이니 대학에 잘 보존시켰다.
‘조천’이란 뜻은 하느님께 배알한다. 혹은 하느님께 조현(朝見)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대학으로 가서 이 돌을 살펴보고 「탐라기년」을 통해 여러 경자년의 사실을 찾아보니‘정조 4년(1780) 목사 김영수(金永綬)에 대한 기록에 수재를 막기 위해 고을 안에 간성(間城)을 쌓아 두 문을 설치, 남쪽을 소민(蘇民), 북쪽을 수복(受福)이라 했다. 간월천(看月川)에도 보(堡)를 쌓았다’고 되어 있다. 옳지! 틀림없이 치수를 잘한 목민관이라면 김영수임이 틀림없다. 또 김영수에 대해‘廉公有威 民去後思之’(청렴공정하고 위엄이 있었다. 백성들은 퇴임 후에야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평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속(俗)에 이르기를‘도제암(都帝岩)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조천석이라고도 하여 옛 성제(聖帝)가 이 돌에서 타서 올라가 하느님을 만났기에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면서 무엇인가 잡히는 듯하였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영명사 절 곁에 동맹왕의 구제궁(九梯宮)이 있고, 그 안에 기린을 기르는 굴이 있었다. 뒷 사람이 돌을 세워 기록하기를 굴 남쪽에 백은탄(白銀灘)이 있는데 조수(潮水)가 드나들어 명왈(名曰) 조천석이라 했다. 천상에 이를 알려 이승휴(李承休)가 소위 하늘에 올라가 천정(天政)에 참여하였다. 조천석에서 기린을 탔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고 한문으로 적어 놓았다. <김찬흡·제주도문화재위원> (제민일보 2003년 7월 29일)
광제교
북성교
가락쿳샘(빨래터)
담배,성냥 배급소터
흑산호가공소
산지교
소라통조림 공장 터
송천여관터
중국인 피난선 해양호
제주세관 터
수상파출소 터
가설극장터
오일장터
잭멜왓동산 터
대패 통 쇠 공장 터
돈지머리 포구 터
산지항 터
어물시장 터
좌연각 터
연무정 뒤 쪽에 있었다. 무예에 힘쓰던 병사들이 휴식과 여흥을 즐겼던 곳으로 본래 좌연각 주위는 대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다. 헌종 14년(1848)년 판관 탁종술이 세웠다.
연무정터
연무정이란 병사들을 훈련하고 군관청과 판관 사후처로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인조14년(1636) 왜적의 침입이 잦아서 이를 방비하고자 제주목사 신경호가 남문 밖 5리인 ‘광양’에 창건했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한 달여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演武亭 ; 在州南三里有軍官廳判官何候廳牧使申景琥建此島皆磊磈惡石之丘陵唯廣壤無…(연무정 ; 제주 남쪽 3리에 있다. 군관청, 판관사후청이 있다. 목사 신경호가 세웠다. 이 섬은 대부분 돌무더기가 높고 험한 돌로 구릉을 이루는데 오직 광양에는 하나도 없고 손바닥 같이 평평하다. 그래서 試閱하고 習操할 수 있다.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땅이다.)라고 하여 연무정을 광양에 세운 까닭을 밝혔다.
숙종20년(1694) 이익태 목사가 중수했다. 이익태의 지영록에 연무정 중수에 관한 기사가 있다.
《武를 익힌 것들을 演武亭에서 甲試才를 하기로 정했다. 亭은 남문 밖 광양에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너무 헐었지만 촌에 모아 놓은 기와가 고쳐 지을 만큼은 못 되어서 곧 썩어서 삭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여러 將士들과 모의를 하여, 도그내의 폐사된 절의 재료를 실어다가 輪番軍을 보충하여 목수가 하는 일을 돕게 하고 명월면의 옛 가마터에서 기와를 굽는데 그 근처의 갑 班 하인들에게 번을 면제하여 일을 시켰다. 동짓달 초에 일을 시작했다. 大廳 3칸, 東西挾室 각 2칸, 사면의 주위담장, 左右門은 서쪽 담 밖에 있고 따로 供需廳 3칸을 세웠다. 또 나머지 자재로 友蓮堂 5칸을 중건하고, 三學廳 6칸, 營外大門과 中門, 東西挾門을 따로 짓고 모두 門板을 달아 여닫도록 했다. 흙을 바르고 지붕을 덮고 단확(丹雘, 문기둥에 붉을 흙을 바름)을 하여 몇 달만에 마쳤다. 을해(乙亥, 1695) 2월 18일 장좌(將佐)를 거느리고 연무정에서 낙성연을 차렸다. 판관, 정의, 교수 모두 참석했다. 다음과 같이 적어 그 전말을 벽 현판에 새겼다.
「성의 남쪽 5리에 정이 있는데 신공경호(申公景琥)가 知州에 있을 때에 지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면서 비바람 맞아 헐어 무너졌다. 그러나 重修를 못한 것이 지금까지 이미 3년이다.
내가 수령으로 와서 가을 7월 16일에 동쪽 교외(東郊)에서 배송하전(倍送賀箋, 궁중의 축일에 축하하는 글을 보냄)하고 이어 三姓壇으로 향했다가 亭址(연무정 터)와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에 이에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러 장리(將吏)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이 섬은 모두가 돌무더기와 악석의 구릉이지만 오직 광양평만은 돌덩이 없이 손바닥처럼 평평하여 武를 점호하고 병사를 훈련하기에 좋은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땅입니다. 연이어 해마다 흉년을 만나 오랫동안 조습(燥習)을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 무예를 시험하는 행사가 있게 되면 임시로 집을 짓느라고 백성은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헐어가는 亭의 재목은 거의 죄다 썩고 상하여 바꾸어 새로 해야 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또 힐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이 참으로 옳다. 나는 앞으로 즉시 이 亭을 짓기 시작하겠다. 그러나 시굴거영(時屈擧嬴, 쇠퇴한 시기에 사치스러운 일을 함)의 형편으로 백성을 동원시키기가 어렵지만 생각건대 營屬들이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많으니 그 番次로 편한 대로 일을 시키면 너희들에게 편파적으로 괴로운 일은 아닐 것이며 민간에게 소요를 일으킬 폐단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의 뜻이 어떠냐?” 하니 모두 승낙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재목을 모아 더 보태고 기와를 구워 보충하고 工匠들은 또한 영속이 아님이 없었다.
비로소 동짓달 초9일 공사를 시작하여 섣달 25일에 손을 뗐다. 먼저 규격보다 넓히지도 않으면서 후에 보더라도 소홀함이 없었다. 무릇 亭을 설치하는 게 본래 陣場을 위한 일이므로 營繕하는 物力은 이에 삼읍에서 공적으로 함께 부담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역은 州民이 간여하지 않았고 兩縣(정의, 대정)에서는 알지도 못했으며 다만 軍吏가 찬성해 준 힘이었다. 어찌 다행이 아니었겠는가!
나라가 태평한 날이 오래고 聲敎가 바다에까지 미치고 있어 비록 演武할 때를 당해도 그러나 文敎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武備도 있어야 한다. 하물며 바다 가운데 탄알 같은 섬에 날뛰는 이웃이 검은 칠치(漆齒, 해적 왜구, 일본 풍속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이를 검게 칠한 데서 일본을 가리킴)임에랴!
흐리고 비올 때를 위한 준비를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으며, 弓馬의 재주를 연습해 두지 않을 수가 없다. 봄에 사냥하고 가을에 조련하니 비휴(豼貅, 사나운 짐승) 같은 자가 숲처럼 많아 칼 시합을 하고 화살촉을 울리기를 쨍쨍한 날에 번개치고 서리치듯 함으로써, 바다를 진압하고 변방을 안정하게 하며 적개심으로 바다를 제어하도록 하면, 거의 演武를 하는 뜻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아! 세상에 관리 된 자가 정우(亭宇)가 낡은 것을 보고서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것을 퇴폐된 대로 놔 두다니…. 오늘 나는 비록 백성을 수고스럽게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軍吏를 수고롭게 하였으며, 다만 軍吏만 수고롭게 한 게 아니라 마음 속으로 괴로워하니 이는 내가 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벼슬살이를 능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나 將吏를 거느리고 쇠고기와 술을 들고 한가한 날 이 亭에 오르니, 한라산에는 구름 걷히고 瀛海(제주 바다)에는 파도가 잔잔하였다. 정휘(旌麾, 지휘관이 쓰는 깃발)가 바람에 나부끼고 북치고 각 부는 소리가 맑고 웅장하여 마음이 트이고 정신이 즐거워 넋을 잃었다. 신기루에 절을 하고 홍몽(鴻濛, 하늘과 땅이 갈라지지 않은 원시시대)을 초월하는 듯하여 이 몸이 海島 천리 밖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여 정말로 즐거웠다. 낙성연에 함께 있다가 취한 채로 記를 짓노라.」》(김익수 譯, 知瀛錄 52~53쪽)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에 남문 남쪽, 모흥혈 서쪽에 연무정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 社稷이 나란히 있었다. 그러나 영조17년(1741) 7월 태풍으로 다시 허물어졌다. 그 후 영조22년(1746) 한억증 목사가 지금의 제주동초등학교로 이설했다. 연무정의 건물은 정청 3칸, 동․서협 각각 2칸,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좌우에 문을 내었는데 공주(공동식당) 3칸이 서쪽 담장 밖에 있었다.(이도2동誌 187쪽) 그 뒤 정조4년(1780)에 목사 김영수가 중수했고, 헌종13년(1847) 목사 이의식이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4월 한 때 감옥이 설치되었다가 철거되었으며 광복 후에 제주동초등학교가 들어섰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조병창이 있었다. 건입동지에 따르면 ‘감옥터’(건입동 1106번지) 서쪽 ‘감낭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어귀, ‘공덕동산’ 동쪽 입구 도로에서 남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서쪽으로 난 좁고 굽이진 골목 어귀가 옛 연무정 터이며 이 설명대로라면 건입동 1267번지가 된다. 현재의 제주동초등학교 쪽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고 한다.(건입동지 218쪽) 이곳은 도로명이 ‘연무정길’이다. 연무정터 표석은 제주동초등학교 정문 서쪽에 세워져 있다.
주정공장(무수주정제주공장)터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 제주항 근처에 건립하여 운영하였던 주정(酒精) 공장터이다. 지금 현대아파트 건물이 있는 곳이다. 1940년 1만여 평(43,685㎡)의 부지에 7,580㎡ 규모로 착공하여 1943년 완공하였다. 제주주정주식회사 상단은 고구마 창고 건물들이 있었고 그 하단은 주정공장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는 일본 전역에 주정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동양 제일의 시설 규모라고 자랑하였다. 이곳에서 제조된 주정은 전국 술 공장에 보급되었다. 제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 설탕 강냉이 등을 가지고 주정, 즉 알코올을 제조하여 이를 군사용 비행기의 연료로 보급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것인데, 이때부터 제주 지역 농가에서는 얇게 썰어 볕에 말린 절간(切干) 고구마 생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정공장이 있었을 때는 취수탑을 세워 ‘지장깍물’을 송수하여 썼다고 한다.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 상․하단을 잇는 수로와 계단으로 된 통로도 있었다.
위 사진에 나온 시멘트 시설은 공장 터 상단의 ‘사장밭’ 지역의 물골을 모아서 공장으로 흐르도록 한 도수관이었으며 이 물로 고구마를 씻었다고 한다. 윗부분은 철망을 설치하여 오물이 들어가는 것을 걸러냈고 내려가는 지점에는 뚜껑을 설치해서 물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하단 중앙에 있는 큰 돌을 들어내면 집수구를 볼 수 있다. 공장과 창고를 연결하는 계단은 현대아파트 105동이 들어선 곳의 맨 왼쪽에 있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는 제주농업학교가 학생들의 제1실습지로 정해 현 제동초 교지에서 옛 주정공장 근처까지 몇 만평을 보통 작물포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방 후 무수주정 제주공장은 미군정에서 신한공사(新韓公社)를 통해 접수하여 계속 관리하다가 1946년 3월 신한공사가 해체된 이후 미군정청 상공부로 이관되었다. 당시 무수주정 제주공장에 보관된 절간 고구마를 배급하여 도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 있던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력도 보급하였다.
1948년 제주 4․3이 발발하자 군부대는 주정공장을 접수하여 처음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조병창(造兵敞) 시설로 이용하였다. 4․3 관련 수용소로는 농업학교 천막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1948년 가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이후에는 농업학교 천막만으로는 수용소 시설이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겨울부터 고구마를 저장하던 무수주정 제주공장 언덕 위의 10여 개 창고를 수용소로 쓰기 시작하였다. 시설이 대규모이다보니 나중에는 제주 지역 내 최대의 수용소가 되었으며, 특히 1949년 봄부터는 수용소(일명 ‘갱생원’)하면 무수주정 제주공장을 가리킬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 7월말에는 육군 제5훈련소(소장 金炳徽 대령)가 이곳에 설치되기도 했었다.
1951년 1월 무수주정 제주공장은 이종열에게 불하된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1973년 1월 천마물산이 인수하여 진로주조에 임대하였지만 오폐수 처리에 따른 과다한 비용 및 원료 구입 문제 때문에 조업이 자주 중단되었다.
결국 1983년 조업이 완전히 중단됨에 따라 1989년 5월 12일 공장의 상징인 굴뚝이 해체되었다. 천마물산은 1993년 공장 대지에 3,293㎡ 규모의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고구마 저장 창고가 있던 부지에는 아파트 8동을 건립하였다.
고봉만은 이 공장이 남한에서 제일가는 주정공장이며 굴뚝이 50m나 되어 한라산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주정공장 굴뚝이었다고 설명한다. 건입동 작은 마을 속 여기저기 공장들이 많아 그런대로 밥 벌어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라서 거기가 일 하면 일당들 주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고구마, 감자 심으라고 한 걸 수확하면 주정공장의 주원료인 고구마를 공출바치랴 자기 먹을 것 벌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
칠머리당 터
선주와 어부, 해녀들이 해신에게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다. 항만공사로 장소를 전전하다 사라봉에 세 신석을 모시고 굿은 문화재전수관에서 치르고 있다.
포제단
건입동 포제지 입구의 유래를 기재한 2004년 1월 29일 건입동 마을회에서 세운 표석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문서상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1934년 경부터 봉행한 것으로 돼 있지만 사실상은 더 이전부터 동민의 안녕과 마을의 융성을 기원하는 포제를 금산 언덕위에서 봉행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용담1동의 경우와 같이 도시의 발전에 따라 이 곳 저 곳으로 제단을 옮겨 지내왔다. 그러다가 1991년 구 충혼각인 현 건물을 제주시로부터 관리권을 획득하여 평상시에는 노인당으로 사용하고 제사시에는 포제를 봉행하는 장소로 쓰다가, 이 후 노인당이 마을회관으로 이전하였고 1997년 ‘건입동포제당’ 이라는 현판을 걸고 공지에는 석조로 세 개의 신각을 세워 토신, 포신, 가신 삼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봉행 시에는 포제당으로 신위를 출주하여 제사를 올리고 다시 신각으로 환안하는 구조로 조성되었다.(김태희씨 정리 자료)
건물 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돌을 다듬어 만든 2단 구조로 맨 위에는 갓을 씌운 것처럼 보이는 높이 1m가 넘는 위패가 3개 있는데 각각 ‘街神之神閣’, ‘土神之神閣’, ‘脯神之神閣’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병항쟁기념탑
1906년(광무10)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도는 종전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던 제도를 없애고 단지 행정만을 관장하는 군수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조종환 목사를 끝으로 동년 10월에 윤원구 군수가 부임하였다. 그 후 통감부는 1907년에 제주우편국을 설치하여 일본인을 그 책임자로 파견하고, 관재서(管財署)를 설치하여 통감부 관리로 하여금 이를 장악하게 하였다. 1908년에는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 경부를 임명하여 왜경 다수를 인솔해 와서 대정·정의·서귀포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하고 치안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제주구재판소(濟州區裁判所)에도 일본인 판사와 서기를 파견하였다. 당시 군수 윤원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치안권과 재판권마저 박탈당하였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12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 유생 고사훈(高仕訓,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承天으로 개명함. 또는 景志라고도 함)·이석공(李錫公,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중심으로 개명함)·김석윤(金錫允,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錫命으로 개명함)·조인관(趙仁官,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丙生으로 개명함)·노상옥(盧尙玉) 등이 모여서 의병을 일으킬 방도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09년 2월 25일 조병생의 집에서 고승천·이중심·김석명·노상옥·김만석(일명 先一)·김재돌(金詛)·양남석(梁南錫)·한영근(韓永根) 등이 기병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에는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거사결전일은 3월 3일(음력 2월 10일)로 정하여 우선 병력 동원을 즉각 대정군에서 시발하도록 하였다. 대정군에서 시발하도록 한 까닭은 1860년 임헌대 목사의 비정(秕政)에 항거한 강제검이 대정군 서광리 사람이었고, 이병휘 목사의 남세(藍稅)에 항거한 방성칠도 광평리 백성을 동원하였었고, 1901년 이재수·오대현·강우백도 대정군 사람으로서 대정군에서 시발하여 전도를 휩쓸었던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승천·조병생·김만석·김재돌·양남석은 당일로 대정에 가서 기병하여 제주성으로 집결하면, 이 때를 기하여 김석명·이중심·양만평·노상옥·한영근 등이 성안에서 허응 기병하여 결전을 벌여 일본인들을 모조리 축출할 계획이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396∼397쪽)
이리하여 제주 광양에 비밀리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준비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에서 조련을 시작하였다. 당시 창의 부서로는 의병장은 고사훈으로 작전과 모병을 담당하고, 김석윤은 재정을 담당하고, 노상옥은 무기 제작과 의병 조련을 담당하였다.
이 때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은 국은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다. 만약 자식으로서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으면 불충이 되는 것이니 이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교활한 왜적이 병자년 이래 감언이설과 강압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을사조규로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눈 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이 강토를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들은 왜적의 노예가 될 터이니 어찌 좌시할 수 있으랴?
오호라! 천도(天道)가 무심하리오? 경향각지의 충의지사들은 국권수호를 위하여 궐기하였다. 우리 제주민도 진충보은(盡忠報恩)하고 자손만대에 선롱(先 龍」을 지키게 할 때가 왔도다. 피끓는 충의지사는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하여 국운을 회복하고, 성은에 보답할 자는 의성(義聲)을 합창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는 데 생사를 같이한다면 이보다 다행하고 이보다 더한 충효가 어디 있으랴? 열혈(熱血)의 충의지사여, 팔뚝을 걷어부치고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황사평으로 모이라. 기유 2월 초6일 의병장 고승천 의병장 이중심」(제주항일독립운동사 398쪽)
부산에 있는 중요문서기록보관소에서 입수한 「제경비발(濟警秘發) 제38호」'폭도상황보고'에 의하면 이 격문은 2월 25일 제주군 중면(현 제주시)에 거주하는 고승천 등 9인과 신우면(현 애월읍) 어음리 한영근(韓永根) 등 10여 인이 제주시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쓰고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제민일보 4326.11.20)
1909년 이른 봄에 전도적으로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고승천은 의병 김만석을 대동하고 대정읍으로 모병차 나갔다가 서광리에서 왜경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왜경은 대정에서 하루밤을 지내면서 고사훈의 비범한 인품을 보아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고사훈이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함은 국민된 도리이다. 지금 나는 의(義)를 위하여 나선 이상 구차하게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할 따름이다."
하였다. 왜경은 2월 13일 제주로 연행하기에 앞서 '만일 당신이 회심만 하면 곧 상부에 보고하여 고관으로 천거하겠다.'고 재차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옛날 박제상(朴堤上)이 너희 왜나라에 인질로 간 신라의 왕자를 탈출시킬 목적으로 갔을 때, 왜왕이 만일 왜국의 신하가 되어 준다면 중록(重祿)으로 상을 주겠노라고 하자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은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너희 나라에서 불태워 죽음을 당하였다. 이게 우리 나라 백성의 나라에 대한 마음이다. 어찌 구차하게 너의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느냐?"
하여(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5쪽) 완강히 거부하므로 안성리 밖에서 김만석과 함께 총살하였다. 고승천이 순국하자 그의 형 기훈과 아우 경훈이 밤을 새워 가매장 현장에 이르러 가매장한 마을 하인을 앞세워 시체를 수습하고 제주면 영평 동남쪽 두곡(杜谷)에 안장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9세이고 유가족으로는 부인 남평문씨와 어린 윤석(允錫)·중석(仲錫)이 있었다.
의병 김만석은 남의 어려움을 즐겨 돕는 사람으로 의병에 자진 참여하였다가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족이 전혀 없어서 가매장된 채로 있었는데 안성리 송기남씨의 증언으로 확인되었고, 방치되고 있던 묘는 전보성초등학교장 좌태진 선생에 의하여 단장되어 오다가(제주일보 1997년 8월 31일) 1977년 남제주군수(현치방)에 의하여 의병의 묘로 안장되었다.
무장한 왜경들이 광양 창의소(倡義所)를 급습하여 무기를 압수하고 김석윤을 체포하였으나, 노상옥·이석공·조병생·양만평·양남석 등은 도민의 도움으로 귀덕 포구에서 육지로 탈출하였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8쪽)
김석명(金錫命 일명 金錫允)은 본관은 광산, 자(字)는 허수(許受). 오라리 무과 출신 부호 김창규(金昌圭)의 장남으로 1877년 태어나 어려서부터(11세) 김병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세부터는 大興寺·威鳳寺에서 수도 생활. 22세에 光陽私塾의 훈장. 30세에 연동촌 文龜私塾 훈장. 경서에 능통하였다. 당시 33세로 고승천과 의병 모의가 있자 그는 의병항쟁에 따른 자금을 전담하기로 하고 고승천이 대정에서 기병하여 제주성에 당도하면 제주성내에서 호응하여 이중심과 함께 항쟁하기로 하였다. 또 전도민에게 보내는 격문과 통고문은 그가 초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란죄로 기소되어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4월 2일에 유배형 10년이 언도되었다. 그는 재력이 있었으므로 즉시 대구공소원에 공소(控訴)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6쪽) 일설에는 홍종시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풀려났다고도 한다. 1912년부터는 범어사에서 수도하면서 불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궁리하였다. 1938년부터 토산리·평대리·하례리 등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평생을 항일에 뜻을 두고 살다가 해방후에는 정실에 월정사를 창건하였으나 4·3사건 때 소실되었다. 1949년 8월 25일 돈 한 푼, 쌀 한 톨, 걸칠 옷 한 벌 없는 상태에서 73세로 돌아가셨다.(濟州鄕校誌 633쪽, 제주통사 203-205쪽)
한편 격문과 통고문에 접한 이장들은 이민들을 모아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지휘자의 상실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신좌면 대흘리 이장 부우기(夫祐基)는 장정 20여인의 연판장을 만들어 참가하려 하였고, 구우면 두모리 이장 김재형(金栽瀅)은 이민 227인을 동원하여 도통기(都統記)를 작성하여 참가하려 하다가 문서가 경찰에 압수 체포되어 1909년 4월 3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3년이 선고되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8쪽)
이와 같이 모병단계에서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지만 제주의병항쟁은 제주항일운동사에서 볼 때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이 기념탑은 이러한 의병창의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19977년 1월 11일)
김만덕 묘비
김만덕은 순조12년(서기1812) 10월 12일에 74세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으니모르(지금의 사라봉 서쪽 진입로 안전자동차공업사 자리) 길가에 안장하였다.
그 후 제주시가 커지면서 묘소를 옮겨야 했으므로 현대에 이르러 김만덕의 유해는 서기1977년 1월 3일 새로 건립한 모충사에 이장되었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제주통사 169∼173쪽)
전시관 옆에 원래의 비석이 있다. 묵은 비석은 높이 96cm, 위폭 48cm, 아래폭 44cm, 두께 13cm이며 현무암으로 만든 좌대 위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行首內醫女金萬德之墓
金萬德本金海卽耽羅良家女也 幼而失恃 零丁貧苦 長而曼托跡敎坊 縮衣損食 産滋大歲在 正宗祖乙卯 島人大飢 能傾財運穀 活命甚□ 牧伯賢之以聞 上問何所欲 對曰 願見京華金剛之勝 而已特命縣次續食 充內醫女 寵分頁便蕃 因舍甫馬遍覽萬二千峰 及其還 卿大夫 皆 章立傳 雖古賢媛 盖未嘗 七旬顔髮 彷彿仙釋 重腫炯澈 但天道無心 惜乎無兒 然養孫時采 出自同氣 克遵遺志 永香火亦復奚憾 生于元陵己未 終于當 壬申 十月二十二日 以翌月 于 園旨 甲坐之原 上之卽位十二年 十一月二十一日立
〈김만덕의 본은 김해김씨요 곧 탐라의 양가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하게 가난과 고생으로 자랐다. 살결이 곱고 아름다우므로 교방에 의탁한 바 되었으나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여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정조 을묘년에는 제주도민이 크게 굶주렸는데 능히 재산을 기울여 육지에서 곡식을 운반하여다가 심히 많은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 목사가 이 착한 사실을 아뢰니 임금께서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으셨는데 대답하기를 '화려한 서울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였으므로 특명으로 고을과 고을을 이어가며 돌아보게 하고, 내의원 의녀로 삼아 여러 차례 은총을 내리시고 역마를 내주어 일만이천봉을 두루 유람하고 급기야 서울로 돌아오니 이로 인하여 공경대부 모두가 글과 전기를 써 주었으니 비록 옛적에 착하고 아리따운 여자라 할지라도 무릇 맛보지 못한 일이다. 일흔이 된 용모이건만 선녀나 보살을 방불케 하였고 눈은 쌍겹눈으로 환하고 맑았다. 다만 천도가 무심하여 아이가 없는 게 애석하다. 그러나 양손 시채가 동기간에서 출계하여 유지를 잘 지키고 영구히 향화하니 또한 섭섭지 않게 보답하고 있다. 원릉(영조를 말함) 기미년(영조 12년)에 낳고 지금 임금(순조) 임신년 10월 22일에 죽었으므로 다음 달에 고으니모르에 장사하니 갑좌의 무덤이다. 임금이 즉위한 지 12년 11월 21일에 이 비를 세우다.(김봉옥 김만덕전 88-89쪽)〉
헌종6년에 제주도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감동하여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넘친다)라는 글을 만덕의 양손자 김종주에게 써 주었다. 편액이 현존한다. 2010년5월1일 경남 마산에 거주하고 있는 김균(6대손)씨가‘(사)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하여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김균씨는“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한때 일본인 수집가에게 넘겨졌던 것을 아버지(김동인)가 거금을 지불해 되찾아왔고, 1925년경 그것을 사촌인 백형석 님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어머님 생존시 전해 들었다”고 한다.
낙관에는‘金鐘周大母大施島饑被殊異之恩至入金剛山搢紳皆紀傳歌詠之古今罕有也書贈此扁以表其家 阮堂’(김종주의 할머니는 섬의 굶주림에 대하여 크게 베풀었으니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어 금강산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사대부들이 모두 이 일을 기록하여 전하고 칭송하니 고금에 드문 일이다. 글을 써서 이 편액을 드리는 것은 가문의 표상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이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묘비 옆에 그 글씨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오늘날에는 묘비 옆에 그 글씨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이 비석은 2006년 3월 제주도가 문화재 지정 예고를 거쳐 2006년 11월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비문에 남아 있는 김만덕의 행적에 대한 교육적 가치와 제주 여성의 위상을 세웠다는 점에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문화재로 지정됐다. 다만, 유형문화재로 할 것인지 기념물로 할 것인지는 결정를 유보했다.(한라일보 2006년 11월 29일)
김만덕 묘탑
김만덕(金萬德)의 묘는 고으니모르에 있었으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묘들을 모두 이장하게 될 즈음 그녀의 행적을 칭송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모충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1977년 1월 11일의 일이다. 즉, 이 기념탑 아래가 묘이다. 탑에는 醫女班首金萬德義人墓라고 동판으로 붙여 놓았다.
칠머리당
위치는 건입동 사라봉과 별도봉 사이 정수장 입구에 있다.
제주칠머리 당굿은 1980년 11월 2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시 건입동 소재 칠머리당(축항공사로 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김)에서 음력 2월에 영등신에게 올리는 무속제이다.
영등신은 흔히 '영등할망'이라고 부르는 신으로서 음력 2월 1일 본도를 찾아와 2월 15일에 떠나간다고 하며, 어민들의 해상안전과 해녀채취물의 풍요를 빌기 위하여 2월 1일에 영등환영제를 하고 2월 13일에서 15일 사이의 어느 날(보통 14일)에 영등송별제를 한다. 제순(祭順)은 ①초감제 ②요왕맞이 ③씨드림, 씨점 ④산받음 ⑤액막이 ⑥배방선으로 구성된다.(제주의 문화재 76쪽)
칠머리당에서는 해마다 영등달 초하룻날이 돌아모면 제주를 찾아오는 내방신(來訪神)인 영등신을 맞이하여 '영등환영제'를 하며, 영등달 열나흘날(음력 2월 14일)에는 영등신을 떠나보내는 영등손맞이 '영등송별제'를 한다.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은 영등굿을 당굿으로 하는 당이며, 칠머리당의 당굿은 제주의 대표적인 영등굿이다. 제주의 영등굿 중 제주칠머리당의 당굿(본향당에서 하는 마을굿)은 제주의 영등굿을 대표하는 마을굿으로 국내외 학자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계절제(季節祭)로 바람의 섬 제주에 남아있는 영등굿의 뿌리가 되고 있다.
칠머리당 영등굿의 구성은 일반굿으로서의 영등굿과 잠녀굿의 기본이 되는 요왕맞이, 어부들의 풍어굿인 영감놀이, 마을의 본향당굿에 이르는 복합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칠머리당 영등굿은 당굿을 겸하고 있으며, 선박을 가진 선주와 어부들이 많기 때문에 '영감놀이'가 굿 중 놀이굿으로 삽입되어 있다.
영등굿은 기본형이 초감제→요왕맞이→씨드림·씨점→배방선재차로 이뤄진다면 초감제와 요왕맞이 사이에 '본향듦', 씨드림·씨점과 배방선 사이에 '영감놀이'가 삽입되어, 제주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있는 영등굿으로 확대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제주도내에서 행해지는 영등굿 가운데 칠머리당영등굿만 지니는 독자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제민일보 110720)
바다밭 표지석
칠머리당에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건입동과 화북동 사이의 바다 경계를 표시해 놓은 바다밭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標識石)은 속칭 '가매팡'이라고 하는 둥글넓적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위쪽에 약 50cm 크기의 '票'라는 글씨와 아래쪽에 약 10cm 크기의 '庚子五月巾入上洞漁採契中書'(경자오월건입상동어채계중서)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건입동과 화북동의 바다밭 경계는 원래 별도봉 아래 베릿내를 기준으로 했었다. 그러나 속칭 자살터 절벽 아래로 시체가 자꾸 떠올라 시체 수습을 위해 건입동 바다밭이 화북으로 인계되어 현재의 가매팡을 경계로 삼게 된 것이다. 경자년은 1901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경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1901년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제민일보 2001년 2월 22일)
이 경계 표지는 건입동 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바다밭의 경계가 마을과 마을의 중간으로 정해지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 경우는 옛날 그 마을의 세력과 관련이 크다. 세력이 큰 마을이 시체 처리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다를 버렸던 것이다. 이런 예는 구좌읍 한동리과 행원리의 바다밭 경계가 한동 마을 가까운 곳에, 조천읍 함덕리과 신흥리의 경계가 함덕 마을 앞에 이루어진 데서도 볼 수 있다.
Wolfgang Amadeus Mozart Oboe Concerto in C, K.314
John de Lancie (oboe)
Eugene Ormandy (Conductor)
Philadelphia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