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함안 무진정

하늘타리. 2012. 9. 7. 16:55

 거제에서 창녕으로 가는 길에 함안을 들릅니다.
함안군청 소재지는 가야읍입니다.
군과 소재지 이름이 같지 않은 보기 드문 지역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낙동강방어선의 최전선으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 지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함안면이 너무 파괴되어서인지는 모르나

1954년에 군청이 현재의 지역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삼국시대라고 하는 시기 이지역은

그 삼국과는 다른 아라가야가 있었고

아라가야의 중심지역이 현재의 가야읍일대라 하니

어찌보면 군청소재지가 제자리를 찾아온 것 일 수도 있겠네요.


조금은 복잡한 가야읍내를 지나 함안면 괴산리로 갑니다.


지역사람들이 통상 이수정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연못옆에 차를 세웁니다.

 

무진정이라고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설명문을 읽어 봅니다.


'함안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으로 이조초기 정자양식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연못이 아니라 정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계속 읽어보면

'서기 1527년(명종 22년) 무진정선생이 손수 이룩하시고 글읽으시며 기거하셨던 곳인데

원형을 잃고 퇴락하여
후손 용운과 희제의 정성으로 1983년 9월 정화보수되었다'합니다.
1527년은 1567년의 오기인듯 합니다.


그옆에는 유형문화재 안내표시판이 있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8호
조삼선생이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으신 정자로

자신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하였다.
무진정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을 방으로 꾸몄지만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976년 12월 20일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안내판도 연못이 아닌 정자의 설명입니다.


 왕버들 길게 느리운 아래 떼배가 메어져 있는 연못의 둘레길을 걸어 갑니다.

 

 

 

 

비각이 있습니다.

 
성인문이라고 편액되어진 문 뒤로

 

부자쌍절각이 있습니다.


조삼 선생의 증손인 승지공 조준남과 그의 아들 선전공 조계선이

1627년 정묘호란에 참전하여 전사하니

이 두 부자의 충과 효를 기리어 세운 전각입니다.


비각옆 충노대갑지비

 
정유재란 때 조계선을 따라 참전했으나 그 주인이 죽자

돌아와서 주인의 죽음을 전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비 대갑을 기려 세웠답니다.


그냥 짠해집니다.
주인의 죽음이 자기탓이 아닐텐데..

보필을 못했다고 자기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약간 떨어져서 조부유인나주나씨효행비

이런 비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비인간적일 정도의  슬픈이야기들이 주절이주절이 맺혀있을 겁니다.

 

다시 연못옆으로 갑니다.

 

박씨열행비와 일산조선생추모비

그리고 또 한기의 비석

 
무진정조선생신도비.


뒷면 글을 읽어보며 조삼선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조삼 선생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의 손자입니다.
선생은 1473년(성종4년)에 태어나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후 향리로 돌아와 이곳 무진정에서 세상을 농하고 살았다 합니다.


연못을 돌아 무진정으로 가는길 한 곁

무진정이 서있는 암벽기슭에 효자담이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한때는 이 연못이 효자담이라 불리었던 것 같습니다.

 

그내용을 알아보려 비석 뒤를 살펴보지만

딱 읽기 어려울만큼 마모되어 있습니다.

  

그옆 암벽에는 무진정담.

말그대로 무진정 연못이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지역 분들은 이 연못을 이수정이라 합니다.
일수정 이수정 삼수정 그렇게 세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두개의 연못은 도로확장시 없어졌고 지금 이곳 이수정만 남아있다라고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말의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이수정이라고 하는 연유는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으로 김종직이 1477년(성종8년)경 편찬한 선산의 일선지(一善誌)이후

우리나라 두번째의 읍지인 1587년 정구(鄭逑)가 편찬한 함안의 함주지(咸州誌)에 선비 한종유가

그의 시에서 관아의 객사였던 삼수정(三樹亭)을 일컬어 이수정(李樹亭)으로 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연못이 아니라 정자라는 이야기인데 무언가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암벽위로 보이는 무진정

 

형광등처럼 보이는 것은 들러진 덧문들입니다.

  

무진정에 대한 똑같은 내용의 문화재 안내판이

외형만을 단장 한채 또 서있습니다.

 이것을 남기고 초입에 보았던  문화재 안내판은 철거하고

그자리에 연못에 관한 설명이나

연못가운데 인공섬에 있는 정자에 대한 설명을 세우는게 더 좋을 듯합니다.

 

 

 무진정으로 바로 가지 않고 연못가운데 정자로 갑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세운 이 정자의 이름은 '영송루(迎送樓)'입니다.


객을 맞고 보낸다는 뜻이니 이곳에서 영접하여 무진정으로 오른 후

다시 이곳에서 작별했겠습니다.

 

영송루안에서 머리를 들어 팔각지붕안 화려한 단청을 보고...

 

그 옆 표지석을 보고...

 

고개 돌려 보이는 모습을 한컷씩 나눠 눈에 넣습니다. 

 

 

 

 

 

붉은 베롱나무꽃의 영접을 받으며 무진정으로 갑니다. 

 

 
동과 정이 함께 하는 문, 동정문 앞입니다.

 

動과 靜을 함께 써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한참 생각합니다...

動靜一源의 動靜인지..

動靜有常의 動靜인지..
動靜相代 의 動靜인지..

이중 한훤당선생이 자신을 수양하며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 몇 가지 조항을 손수 써서 옥계 반우형에게 주었다는

寒氷戒의 첫구절 動靜有常이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만...

마땅한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이 동정문을 사이에 두고 조씨 후손과 관청이 한때 대립을 하였습니다.

 

 연못가운데 영송루를 중심으로 하여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전후해 낙화놀이가 열립니다.
시도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된 함안 낙화놀이가 그것입니다.
참나무 숯을 들깨처럼 곱게 갈아 한지 위에 놓고 심지로 쓸 광목을 얹은 뒤 둘둘말아서

두개를 모아 한뼘 길이로 실타래처럼 꼬아 낙화를 만듭니다.
이렇게 실타래처럼 만든 낙화를 연못위에 미리설치한 줄에 걸어 놓고 불을 붙입니다.
옆으로 위로 치오르던 불꽃이 어느순간 말그대로 우수수 낙화합니다.
바람결에 연못위로 화려하게 떨어지는 불꽃들의 향연은 가슴 어느 한부분을 짜릿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은 이수정 낙화놀이라고 하고 싶어하고

조씨문중에서는 무진정 낙화놀이라 하고 싶어 하니

낙화축제때 마다 무진정 동정문이 잠기기도 합니다

(아니 했습니다. 아니 했답니다)


동정문을 지나 무진정으로 들어왔는데...

정자의 현판이 않보입니다.


주세붕이 썼네 아니네 말이 많더니 어딘가 따로 보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조품이라도 걸어야지 현판없는 누각이라...
이건 좀 아닌것 같습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쓰여 있던 글처럼

정자가운데 우물정(井)자의 방이 하나 있는데 온돌이 아니라 마루방입니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습니다.

 정면을 뺀 삼면과 마루방에 창호를 달았는데,

창호는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 있기에 바람을 맞이할 수 있으며,
비바람이 부리는 날에는 창호를 내려 앞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후손이 세운 표지석의 글처럼 기거하신곳은 아니고 시원한 여름철에만 이용했을 겁니다.
잠시 누마루에 앉아 조삼선생이 되어 봅니다.


기둥의 편액들과 중수,중건상량문등을 읽으며 한바퀴 돌아봅니다.

 

 

 

 

 

무진정 아래로 재실(齋室)이 보입니다.

 

괴산재

계십니까?

누군가 계시면 궁금한 몇가지 여쭤보려 했는데...
 

정문을 나가 돈화문이라 쓰여 있는 편액을 보고 다시 들어옵니다.

 

 괴산리에 있어 괴산재라 하는 듯합니다만

이건헌성기를 보면 어디 다른 곳에 있다가 1988년 이건을 결정,

 선조묘역의 질좋은 소나무를 골라 지어 92년도에 옮겨왔다고 쓰여 있습니다.


수도가에 있는 오줌싸는 아이

 무언가 언밸런스한듯하기도 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피식웃어봅니다.


누군가가 오실 기약이 없으니 위로 보이는 무진정처마를 한번 더 보고 함안을 떠납니다.

 

그냥 아쉬운게....

 이곳 무진정에서 바로 앞 대사교라는 다리를 건너면

한절마을이라 부르는 대산면 대사리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당산나무인듯한 큰 느티나무가 나오고 

 그 아래 세 분의 부처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자료사진)

 

 뻣뻣하게 서계신 두 부처님 가운데 몸통만 남은 부처님이 앉아계십니다.
물론 원래부터 이자리에 이렇게 계셨던 것은 아닌듯 하고

 부근어딘가에 쓰러져 계시던 것을 이쪽으로 모셔와서

좌우 대칭을 생각해 세운듯합니다만...
서계신 두기의 불상은 머리의 원통관과 옷고름 그리고 발가락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통일신라 초기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여

보물 7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만

앉아계신 부처님은 특별한 지정을 받은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 앉아계시는 부처님을 처음 본 순간.

무언지 모를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밀려오고..

가슴아래 두검지가 모여진 수인을 본 순간 .

그 간절함이 바로 기도가 되었습니다.

(자료사진)

 

최근 어느기사에서 본바로는 

앉아계신 부처님의 수인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해 분류된 아미타 구품 수인 중 최고라 하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수인이라 합니다.


국보 제27호인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수인이

아미타구품수인 중 중품중생인 또는 하품중생인이라 하는데

이곳 부처님의 수인이 상품상생인이라한다면

이곳에는 이미 성품이 부처를 닮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렇다면 저 하고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고

저는 중생중 하품하생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하품에나 속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 그 순간 내가 착각을 하였나 봅니다.
아니면 너무 높아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대한 막연한 외경심을

나도 모르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을 다시 확인하러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인데...


10분도 안걸리는 길...

이렇게 그 옆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못하는 것이 단체여행의 아쉬움입니다.

 

버스로 이동하다 어딘가 식당에 차를 세웁니다.

 창녕군 행정구역인것 같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별도 마련된 전시장에서 짚세공품을 둘러본후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면서 오늘 하루를 마칩니다.

 

 

Frdric Franois Chopin  Piano Concerto No.1 in E minor, O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