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하늘타리. 2012. 9. 6. 17:45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너무 오래간만에 왔나 봅니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래전에 왔을때는 들판에 수용소 콘셋 건물의 잔해와 천막 몇개만 쳐져 있어 너무 황량했다면

1998년부터 유적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이자리에 있던 신현중학교까지 이전시켜

2002년에 완공된 지금은

유적공원이라기 보다는 어수선한 유원지 같습니다.

 

게다가 놀이공원이 아니고 유적공원이라면서

그 위로 고가도로가 지나갑니다.

 

 

내용이라도 알차기를 바라며

유적공원의 입구라고 하는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할 때 맨앞에 섰던

소련제T-34탱크을 조형한 기울어진 탱크전시관으로 갑니다. 

 

그곳으로 가기 앞서 

 2005년 5월 준공하였다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와

최대 승선인원 1500명임에도 미국인 선장의 결단으로 14000여명을 태우고 내려온 

민간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조형물를 봅니다.

 

 

 
그곳으로  다가가려 하다가 군복차림의 한 인물의 동상을 보고

흠칫 놀라 발을 멈춥니다.
 

 

작년 7월엔가 인터넷 기사에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안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에

검은 천이 씌워지고 쇠사슬이 둘러졌다는 기사를 본 것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포스팅을 하며 그 당시 캡쳐해눟은 사진을 찾습니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하면 

'김백일은 일본괴뢰정권인 만주국군 소위, 항일무장세력 탄압목적으로 설립된 간도특설대 창설,

상위(대위)로 항일무장부대 공격, 민간인탄압에도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고

훈장을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라고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소위 지역의 진보그룹들이 주축이 되어 

“친일파 김백일”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며 저지른 일이지요.


여기가 독립공원이라면 당연히 김백일의 동상은 설치되어서도 않되고

설치되었더라도 철거되어야만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딘가요?
흥남철수작전을 기리는 곳입니다.
그럼 김백일의 동상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김백일은 과가 많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공도 많은 인물이지요.
6.25 남침 초기 1군단장으로서 낙동강 전선의 동쪽을 맡아 인민군을 저지했고

‘흥남철수작전’ 중 10만 명의 북한사람들을 구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흥남부두에 몰려든 북한사람들을 태워갈 선박이 모자란다는 보고를 듣자

알몬드 10군단장에게

“1군단은 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중공군을 무찌르면서 남하할 테니 피난민들을 태워주시오.”라고 하여

중공군에 포위되어 일촉즉발의 시간임에도

추가로 시간과 노력을 투입 군함, 상선, 어선을 추가로 동원,

군인 10만5,000명에 피난민 10만 명을 태우고 철수했습니다.


과는 과대로 공은 공대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독립공원에 김백일이 있어서는 않되지만 이자리에는 김백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동상 철거를 주장하며 검은 천을 씌우고 쇠사슬을 둘른 사람들중 그 어느누구라도

단 한사람의 생명을 구한적이 있나요?


장소에 맞게 상식에 맞게 행동을 해야합니다.
자칭 진보적인 인사들 덕분에 이 사회가 발전한다는 생각을 하며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다가도

그들의 광기에는 어느때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사람들에게는 쉰들러조차도

유태인 1200명을 구한 의인이 아니라

나치에 협력해서 폴란드에서 돈을 번 악덕기업가일뿐일겁니다.

 

이 동상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에서 경남도에 세우겠다고 신청하여

어디어디 어느장소에 세우라는 통보에 따라 세운것입니다.
그런데 한쪽의 의견에 경도된 경남도지사 김두관은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문화재 영향검토 기준인 300m 이내에 포함돼 있다며

거제시에 원상 복구 즉 철거하라고 통보합니다..
이에 따라 거제시는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에 김백일의 동상 철거명령을 내렸다고 하네요.

그러나 기념사업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지난해 7월26일 철거대집행계고장을 보냈다는 것 까지만 압니다.
철거됐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포스팅을 위해 알아보니 법원에서 철거대집행계고처분을  취소하라고 했답니다.
항소 등 지리한 법적공방이 이어지겠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문재인 만큼은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는 1952년 부모의 거제도 피란 시절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사람으로

유엔군이 진주한 기간동안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합니다
장진호전투에서 미군이 패하여 미군과 한국군이 흥남으로 퇴각할 때

북한의 입장에서는 전시반역을 저지른 문재인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흥남으로 피신하였다가

LST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습니다.
아마 문재인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미군LST덕분에 살았지 김백일 때분에 산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당시  미군은 민간인 피난작전에 난색을 표시했습니다.

철수 함정도 턱없이 부족했고 전쟁중에 군인이 살아야 다음 작전도 준비할 수 있다하여

민간인은 군인이 타고난후 남은 자리에만 태우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현지 한국군 최고지휘관 김백일은

“한국군은 걸어서 퇴각하겠다. 피란민을 태워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미군과 미군이 동원한 선박은 그제서야 민간인을 태운것 입니다.


우호세력을 늘리려면 제발 과격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사이드가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말고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길 바랍니다.
일방적인 매도는 자기들끼리 카타르시스 해소는 될지 몰라도

또 다른 심정적 거부세력을 창출하게 됩니다.

 

공연한 미안함에 김백일과는 눈 마주침을 피하고 

 메러더스 빅토리아만 당겨서 찍고..

 

분수광장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마음을 씻고

 

하늘을 보다 마주친 초소근무하는 병사와 인사하고

 

탱크전시관으로 들어왔습니다.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면서,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패널 인형으로 만들어진

이승만, 맥아더, 모택동, 김일성 등 6‧25 관계 인사들의 영접을 받습니다.

 

 

 

관람로를 따라 돌아갑니다. 

함께 촬영한 설명문을 참고하면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듯 합니다.

 

 

 

 

 

  

 

 

 

 

 

 

 

 

 

 

 

 

 

 

 

 

 

디오라마관을 나서니

길옆으로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시작입니다.

 

 

 

 

 

 

 

 

 

 

 

 

 

 

 

 

 

 

 

 

 

 

 

 

 

 

 

 

 

 

 

 

 

 

 

 

 

 

 

 

 위령비가 보입니다만

다가가는 길은 이쪽이 아닙니다.

 

 

 

철조망 사이로 기념조형물을 보고

 

 

저 철모의 의미는 무엇일까?

 

 

유적관으로 들어갑니다. 

 

 

 

 

 

 

 

 

 

 

 

 

 

 

 

 

 

 

 

 

 

 

 

 

 

 

 

 

 

 

 

 

 

 

 

 

유적관 뒤로 나가면  위령탑이 있습니다.
위령탑머리위에 고가도로가 있고 그 고가도로에서 트럭과 버스 등이 쏜살같이 달립니다.
그 사람들은 이아래 무엇이 있나 알수가 없으니 그사람들을 탓해서는 않되지요.

경건한 유적공원이라면서 공원 전체의 상부로 고가도로를 건설한 사람들의 마인드가 이상한 것이지요.


위령탑을 멀리서만 보고 유적관 앞으로 나옵니다.
철모가 놓여 있는 광장을 흘깃 보고 또 다시 그의미를 생각하지만 답은 없습니다.

 

관람로를 따라 갑니다 

 

 

 

 

 

 

 

 

 

 

 

 

 

 

 

 

 

 

유적지의 본뜻

말그대로 남아있는 시설들입니다.

 

 

 

 

 

 

무언가 꽤 많은 것을 본것 같은데..

반공포로석방과 포로송환에 대해서는 두리뭉실합니다.

 

나름 정리합니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난제는 포로 송환이었습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양측이 잡고 있던 포로를 그냥 맞교환하면 되는 것이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요.
게다가 포로교환을 위해 1951년 12월 18일 처음으로 포로 명부를 교환하였을 때 부터

이 협상은 공산측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유엔군이 당시 132,474명의 포로 명부를 넘기면서

공산측에 포로로 잡혀있을 것이라 추산한 유엔군측 인원은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총 10만 여명이었으나

공산군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명부에는 불과 11,559명밖에 없었습니다.

공산군 측은 포로가 된 국군들이 전향하여 북한군에 재 입대하였으므로

포로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장기화로 말미암아 국내에서 휴전에 관한 압력이 높았던 미국은

포로 문제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공산측이 넘겨준 명단속에 미군 포로들은 거의다 포함된 것으로 판단하여

1953년 5월 25일,

유엔군 측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위원회에서 심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수정안을 제시하여 공산군 측의 동의를 얻어내었고,

그 결과 양측은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 최종안에 서명했습니다.
타결된 협정에 따르면

포로들은 자유의사에 의거해서 북과 남, 혹은 제3국으로 갈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러한 협상 내용에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타결에만 급급하여 국군 포로들의 송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귀환이 확정된 국군 포로가 불과 8,343명에 불과했던 반면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진행하더라도

약 10만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북으로 돌아 갈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을 통해서 귀순하는 생존 국군 포로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국군 포로 송환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지만

당시 미군은 우리정부의 반발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 포로 석방을 지시했고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원용덕은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과 협의를 거쳐

포로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육군 헌병대가 기습적으로 반공 포로를 일거에 석방한 후

이들을 약속된 인근 민가로 도주시켜 보호 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밀사가 파견되었고

6월 18일 00시를 기해서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수용소를 경비하는 한국군 헌병대는 미군들을 따돌리고

2만 7,000 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탈출시키는데) 성공하고

그날 06시에 중앙방송을 통해 우리 정부가 '반공 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원하는 방향대로 포로송환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예상하던 북한과 중국은 경악하였고

누구보다도 놀랐던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중국 모두가 휴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보니

회담자체를 깨려 하지는 않았고

미국은 한국을 달래려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휴전을 반대하였던 진짜 이유는 휴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지요.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전략적 우위도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분단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의미이며

포로 문제의 타결은 바로 이런 불안한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재개된다면 유엔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게 휴전 이후의 안전 보장에 대해 줄기차게 요구하였지만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이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반대하였을 만큼 미국은 부정적인 견해가 컸는데,

반공 포로 석방으로 미국측에서 방위조약체결을 제안하였고

이는 현재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쟁 당시 피아를 통틀어 가장 최대의 규모였습니다.
당연히 거제 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들이 대규모로 석방된(탈출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고,

일부 언론에서 조차 그렇게 보도되고 있습니다만....
한바퀴 도시면서 느끼셨겠지만

반공포로석방에 대해 무수한 설명을 하면서도

여기에서 몇명이나 석방 또는 탈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최대 14만 명의 포로를 동시에 수용하였다고 하는 거제수용소에서는

반공 포로 석방이 없었습니다.
당시 탈출에 성공한 반공 포로들은

부산 제2수용소를 비롯한

전국 8개 수용소에서 탈출한 총 27,389명입니다.
그렇다면 전쟁 내내 70퍼센트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항상 집결하고 있었을 만큼

포로 수용소의 대명사였던 거제 수용소에서

막상 단 한 명의 반공포로 석방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워낙 규모가 크게 설치되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통제가 안되어 반공 포로들에 대한 친공 포로들의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어

100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포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 감금 되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였습니다.

포로들의 폭동을 강제진압한 후 반공 포로들을 분리시켰고

이후 친공 포로들만이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당시는 이곳의 경비를 책임진 미군의 감시망도 엄중하였고

만일 탈출하여도 섬 밖으로 나가기가 힘든 구조였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석방(탈출)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다른 수용소에서도 사전에 국군 경비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반공 포로의 석방(탈출)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탈출 과정 중에 모두 61명이 미군 경비병들의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미군의 입장에서는 포로들의 무단탈주를 합법적으로 저지한 것이지요.
그중 무려 47명이 부평에 있던 제10수용소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반공 포로 석방 당시 부평 제10수용소에는 총 1,486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대구 수용소 다음으로 작은 크기였습니다.
수용소가 위치한 곳은 현재 산곡남초등학교 동쪽에 위치한 부영공원입니다.
부평은 1930년대 일제가  무기를 생산하는 육군조병창을 설치하면서 군사 도시로 본격 성장하였는데,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지원시설(ASCOM)이 설치되었고

1949년 미군 철군 후에는 국군 병기대대가 접수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미군기지가 되었고

이때 포로 수용소도 설치되었습니다.
포로수용소는 미군 부대 내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국군 헌병대 1개 중대가 파견 나가 있었지만

여타 수용소와 달리 미군의 지시에 의해서만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용덕의 밀명을 받은 헌병총사령부 밀사가 이곳을 경비하는 헌병책임자를 사전 접촉할 수 없었고

반공포로들에게도 탈출에 관한 지침등이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6월 18일의 타수용소의 탈출소식은 당일 오후 부평수용소포로들에게도 전달되었고

이소식에 흥분한 반공포로들은 그날 밤 9시에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너무 늦은 것으로

이미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미군 경비병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극의 현장인 부평수용소는 군 시설로 계속 사용되다가

지난 2002년 공원으로 재탄생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임을 표시하여 주는 표식도 없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 또한 많지 않습니다.
친공 포로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던 거제 수용소는

불행했던 시절을 반추하는 역사공원이 되었지만

막상 자유를 찾아 탈출한 반공 포로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던 곳에 대한 역사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아주 일부가 쓰여진 강용준의 멀고도 긴 날의 시작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황해도 출신은 그는

한국전쟁때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된후

부산 동래를 거쳐 거제도 고현리 이곳에서 수용되어 있다가

포로폭동후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전남 광주 사월산 수용소로 옮겨져 생활하다

반공포로 석방시 탈주에 성공합니다.

그 후 다시 한국군에 입대하여

1954년에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 장교생활후 전역하여

수용소생활을 소설로 엮어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과 연합군이 전쟁포로를 교환할때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중립국을 선택하여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갑니다.

그 뒤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제3국을 택한 포로들을 모티브로 삼아 쓴 소설이 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을 요약해 봅니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의 철학과 3학년 학생입니다.

그러나 그의 안온한 삶은 이북의 아버지의 정치 활동을 이유로 깨어지고 말지요.

남한을 원망하며 사랑도 저버리고 월북을 합니다.

밀실만이 존재하는  남한과 달리 인간적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광장이

북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도 그러한 광장은 없었습니다.

오직 퇴색한 구호와 기계주의적인 관료 제도가 판을 치고 있을 뿐이었지요.

마침내 이명준은 자기가 기댈 마지막 지점을 공산당원 발레리나인 은혜와의 사랑을 통해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간호사로 전쟁에 나갔던 은혜의 죽음으로 그 사랑도 끝나고,

전쟁에 참여했던 이명준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석방이 되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제3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자살을 합니다."
여기에서 광장은 어디를 말할까요?
‘밀실’이란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며,

‘광장’이란 사회적 삶의 ‘열린 공간’이겠지요.
하지만 어디가 밀실이고 광장일까요?
그는 전쟁이란 광장을 거쳐서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밀실인 중립국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또다른 밀실이자 광장인 푸른바다를 택합니다.
현실을 외면한 제3의 길이란 있을 수 없으며

헛바람과 헛믿음의 끝없는 오뚝이 놀음에서 광장은...

 결국 막혀있는 곳일 뿐입니다.
함북 회령 출생으로

1950년 월남 후 목포고교를 거쳐 서울법대에서 수학하다가

육군통역장교로 입대하여 편안한 군 생활을 한 최인훈이

과연 어떤 실감을 가지고 이글을 썻을까 를 생각해 보다

눈에 뜨인 거제 관광팜플렛속의 풍경으로 관심을 옮깁니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떠납니다.

 

계획은 주남 저수지 일대를 답사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시간관계로 청마 유치환 선생 기념관과 생가를 들른답니다.

 

통영과 거제가 저마다 자기지역이 나은 큰 시인이라 하여

거제에는 '청마 기념관'이 있고

통영에는 '청마 문학관'이 있습니다.

 

창밖경치를 보며

유치환의 행복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가 통영여자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근무할 때, 이 편지의 대상이었던  이영도는 그 학교 가사 선생이었습니다.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선생에게 연정을 품은 청마는 수없는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쓴 장소가 바로 우체국이 바라보이는 충무교회안에 있던 

자기 부인이 운영하던 문화유치원옆 사택이었던 것이지요

 

이 지독한 불륜을 생각하고 있는데 앞자리가 술렁술렁합니다.

 

버스기사가 길을 잘못들어

행선지를 바꾼답니다.

 

어떤면에서 단체여행은 이것이 장점입니다.

걷자면 걷고, 쉬자면 쉬고, 어디를 가자면 가고..

내 머릿속 상념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습니다.

 

함안으로 갑니다.

 무념, 무상

창밖을 보며..

 

무심정, 아니 무진정으로 갑니다.

Ludwig van Beethoven

Violin Cocerto in D major O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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