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 영산면
이렇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텐데...
그냥 영산이라 해야지...
영산(靈山)은 지금은 창녕군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창녕현과 별도인 영산현이라는 행정구역이었으며,
영산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 등 고유한 전통문화가 아직도 전해내려오고 있는 지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곳입니다.
영산 남산호국공원입니다.
공원 입구에는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교(虹霓橋) 구축기술을 보인다고 하여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무지개형 다리인 보물 제564호인 만년교(萬年橋)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가 있으며
계단을 올라가면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습니다.
만년교입니다.
이 다리는 이곳 남천을 가로질러 가설한 나무다리가 큰 물에 자주 떠내려가자
정조 4년(1780년) 영산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더이상 떠내려가지 말라고 돌을 이용해서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 김윤관이 일을 주선하고 백진기란 석수가 다리를 축조를 담담하였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주민들이 만든 다리입니다.
개울 양쪽의 자연 암반을 주춧돌로 이용하여 반원모양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제발 무너지지 말라는 기원을 담아 만년교라 이름하였고
글을 알고 쓸수 있는 사람중 가장 오래살 수 있는
산기슭에 살던 13살짜리 아이의 글씨로 그 이름을 새겼다 합니다.
그 후 고종 2년(1892)에 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석교비(石橋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1년 이후 매년 3.1절 무렵이 되면 이 만년교옆에서 창녕군주관으로 군민축제가 진행됩니다.
그때마다 중요무형문화재 25호 영산 쇠머리대기와 26호 영산 줄다리기가 시연된다 합니다.
쇠머리대기는 영산읍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 있는 영취산과 함박산의 모양이
두 마리의 소가 마주 겨누고 있는 형상이라 둘 사이에 산살(山煞)이 끼어 있다고 하여,
산살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가는 때를 맞추어 가서 보면 참 좋을 것 같네요.
줄다리기는 오늘날에도 많이 하는 민속놀이로
중부 이남 지방에서 널리 행하여 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을 것 같은 줄다리기가 이지방에서 하는 것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도
와서 하는 것을 보고 알아보면 좋을 듯 합니다.
만년교를 건너면 임진왜란 호국충혼탑이 보입니다.
다가가지는 않고 멀리서 사진만 찍습니다.
그 옆에 있는(지금도 있는지는 모르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는 전제장군의 충절사적비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웠을 때는 분명히 역사적 고증을 받았을 텐데
활동기록이 잘못되었다. 임란당시 영산현감이 아니고 정유재란당시 영산현감이다.
전두환 조상이기 때문에 세웠다 등등
하도 말이 많은 비석입니다.
사실 세워진 해가 1982년이니 이런저런 말을 들을만도 합니다만
이 비문은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이 짓고 글씨는 '성산 이헌주'가 썼다고 적혀 있으니
글을 지은 사람을 찾아 그 근거를 확인하면 될 것을
왜 이리 훼예포폄이 심한지 모르겠습니다.
충혼탑 옆에는 이 지역에서 지방관을 지낸 관리들의 공덕비 등이 20여기 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릅니다).
주로 현감(縣監) ㅇㅇㅇ의 애민청덕비, 영세불망비, 애민선정비 등 인데
이것이야 말로 청덕애민과는 아주 관계가 먼 사람의 이름이 꽤 많이 들어가 있지요.
그 부근으로
이곳 영산이 경상남도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임을 기념하여 세운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도 있습니다만
패쓰합니다.
멀리서 언듯 보니 그 옆으로 물레방아간이 있습니다.
그래요.. 돌고 도는 물레방아인생이라는 노래나 부르렵니다.
산마루로 돌아 올라갑니다.
산마루로 올라가는 길 오른 쪽에
썩어가다 바람에 가지가 부러진 당산나무가 있습니다.
언젠가 찾아와 술따라준 사람은 있습니다만
신목의 가지가 부러져도 치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때는 마을사람들의 외경의 대상이었던 당산목
수없이 찾아와 신세한탄하는 이들의 등을 토닥여 위로해 주고
그들의 바램을 하늘에 전했습니다만
지금은 어쩌다 한명 찾아와 따라주는 술한잔에 하루를 보냅니다.
함박산 끝자락 남산마루로 올라왔습니다.
영산지구 전적비가 서 있습니다.
낙동강을 향해 돌격하는 두 용사의 형상과
백병전을 벌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당시 낙동강전선 방어에 실패하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그 중 이곳 영산은 북한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습니다.
북한군은 이곳을 통해 밀양을 거쳐 부산까지 진격하면서
대구를 포위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야포 2개 대대와 제 16전차여단을 배속 받은 북한군 제 9사단을 제 2공격 집단의 주공부대로 삼고
낙동강 돌출부를 단숨에 돌파
8월 31일 자정을 기해 박진나루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9월 1일 밤 영산으로 접근합니다.
9월 2일 3시 부터 공격해 들어오는 북한군과
그에 맞서는 미2사단은
수없는 피해를 주고 받으며
일대를 빼앗기고 되찾고 하기를 반복합니다.
이 전투를 통하여 북한군의 밀양진출을 잠시 봉쇄하였으나
미 2사단도 상당히 큰 전투력의 손실을 입게 됩니다.
다행히 이날 오전 미해병5연대의 미2사단으로의 배속이 결정되어
9월 3일 새벽에 미 해병5연대가 영산 북쪽과 남서쪽으로 진출,
08:55부로 영산 서측방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북한군 제 9사단을 공격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합니다.
미 해병대는 9월 4일 공격을 계속 북한군 제 9사단 사령부가 있던 곳을 점령하였고
9월 5일에는 대봉리 능선에서 8월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빼앗겼던 낙동강돌출부 크로버고지까지를 점령하여
북한군의 전투의지를 좌절시키게 됩니다.
9월 6일 미해병5연대는 방어에 성공한 지역을 미제9연대에 넘기고
부산을 경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합니다.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한 북한군은
전투력보충등을 실시하며 미제9연대와 대치상태를 유지하면서 재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인천에 미군이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9월 16일에 듣고 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얼마전 미국대통령 오바마가 한국을 방문하여
방한 첫 일정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25m 떨어진 비무장지대(DMZ)의 최북단초소를 찾아가
쌍안경으로 멀리 개성공단 등 북녘땅을 살펴본 후,
"자유와 번영의 견지에서 남북한 만큼 분명하고 극명하게 대조되는 곳은 없다"고 말했던
그 초소의 이름이
이곳 영산지구 전투에서 9월 3일 전사한 조지프 오울렛 일병의 이름에서 따온 오울렛초소입니다.
이렇듯 낙동강주변 어느 한곳도
자유대한을 지키려는 이들의 피와 땀이 배이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만
이제는 호국이라는 말이 낡은 단어가 되어 찾는이 극히 드믑니다.
오늘도 40명 가까운 인원이 이곳 남산호국공원에 같이 왔지만
이곳 까지 올라온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일행과 쳐지지 않게 돌계단을 숨도 않쉬고 뛰어 내려갑니다.
만년교만을 둘러 보고 길건너 연지로 간것 같습니다.
연지
연지는 작지 않은 연못에 섬이 5개 있으며
그 중 한곳의 섬에 향미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연못주변으로 능수버들이 휘늘어져 있습니다.
연못 둘레를 잇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갑니다.
이 연못은 마주보이는 영취산이 불덩어리의 모양이므로
마을에 화재가 많이 일어날 수 있어
이를 다스리기 위해 벼루모양의 못을 만들었다하여 연지라 하였답니다.
1889년 당시 현감이 보수하였다 하고 그당시 다섯개의 인공섬을 만들었다 합니다.
그 삼년후 옆에 있는 만년교 복원시
이연못 내 가장 큰섬에다 정자를 세우고
아 좋다! 중국 항주의 미정과 같구나 하여 항미정이라 하였다고 하네요.
중국 항주에 온 기분으로 돌아보시지요.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면 이건물도 유적이 될려나?
한 30년도 않지나 부셔져 없어질겁니다.
항미정으로 다가가지는 않고 바라만 보며 산책로를 걷습니다.
산책로를 벋어나 큰길옆으로 나와 일노이공진영매계부자현창비로 갑니다.
기슈 와카야마현의 도덕적규범을 구축하여 주신
이진영.이매계선생을 기려 와카야마현 한일문화관광교류단이
2001년 4월에 세웠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진영·매계 부자를 기리는 현창비는
이곳 말고 일본 와카야마현 오카공원에 우뚝 서있습니다.
1998년 합천 이씨 종친회와 와카야마시가 공동으로 세웠는데
뒷면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상희 전 건설부 장관을 비롯한 합천 이씨 종친들의 이름이 있지요.
이진영.이매계선생을 기리어
‘조선국이씨진영지묘(朝鮮國李氏眞榮之墓)’라 씌어 있는 그의 묘를
와카야마의 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던 와카야마현 사람들은
이진영선생의 출신지인 이곳에다가 먼저 기념비를 세우려 1993년부터 이곳을 방문했습니다만
정작 이곳사람들이 협조적이지 않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8년에 와카야마현 오카공원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성황리에 거행된 일본내 이진영부자의 기념비 건립을 전해들은 이곳 사람들이
그 후 건립을 허가하여 2001년에 연지변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일단 사진만을 찍은 후 버스에 올라탑니다.
출발...
화왕산 줄기 이어진 구현산을 보며 이진영 이매계부자를 생각합니다.
두산백과 인물사전에 보면 이진영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를 따라 의병활동을 하다가
1593년 23세 때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의 포로가 되어 오사카로 끌려갔습니다.
오사카와 기슈(현:와카야마[和歌山]) 등지를 전전하다가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기초가 확립되었을 때
기슈의 가이센사[海善寺] 부근에 데라고야[寺小屋:에도시대 서민교육기관]를 차려 조선의 유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의 학문이 깊다는 소문을 들은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가 그를 시강으로 모셨으며
이에 기슈에 조선의 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매계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유학자 이진영이 46세에 일본에서 나은 아들로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는 시강이었던 이진영이 죽자
17세인 그에게 부의 직을 승계시키고 교토[京都]에 유학을 보냈다가
그가 돌아오자 아들 의 교육을 맡겼다고 합니다.
후일 일본 8대 학자의 한사람으로 꼽혔으며
1660년 43세 때 기초한 <부모장(父母狀)>은 기슈도쿠가와[紀州德川] 250년간 번정(藩政)의 규범이 되어
1890년 명치교육칙어가 제정될 때까지
번내(藩內)의 교육기관 ·집회소 ·각 가정 등에서 이를 봉송토록 하여 효행의 길을 가르쳤고
이를 통하여 풍속을 유지하였다고 하네요.
66세로 사망하였는데 ‘이매계공지묘(李梅溪公之墓)’라고 쓴 그의 묘비는
가이젠사[海善寺] 경내 부 이진영(李眞榮) 오른쪽에 있고
현재 와카야마현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건조한 설명입니다만 참으로 한심한 나라의 불쌍한 백성들 이야기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의 사대부는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무기와 방패 삼아 싸우도록 전장으로 내몰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돌멩이와 곡괭이를 들고 총을 든 적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중에는 운 좋게 살아남아 가족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낸 이들도 있지만
전장에서 허망하게 죽어간 이들이 수없이 많으며
일본으로 끌려가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사람도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요.
임진왜란 당시 1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중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은 8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진영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 있습니다.
조두진의 유이화.
시간을 내어 한 번 읽어 보시지요.
화왕산 군립공원입구에 차가 섭니다.
관룡사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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