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전주객사 풍남문 전동성당

하늘타리. 2012. 9. 4. 14:44

중앙성당을 나와 풍남문을 향해 걸어가다 전주객사로 갑니다.

 

객사로 들어가기전 안내판을 읽고....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왕명으로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묵게한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전주객사는 1975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583호로 지정된 곳으로

1473년(성종 4)에 전주서고를 짓고 남은 재료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합니다.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동익헌, 수직사만 남아있습니다.

동익헌은 본래 서익헌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남문에서 북문을 잇는 도로 개설시 동익사 일부가 잘려 나가면서 초석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99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데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풍패’란 한나라를 건국했던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이라 했으며

그래서 전주 객사를 ‘풍패지관’이라고 했다합니다.....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은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익산의 선비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이곳에 들렀다가 쓴 글씨로 전해집니다.

이곳은 요사이 전주사람들에게 전주객사보다는 풍패지관이라 불리워진다고도 합니다. 

 

 

 

 

 

 

 풍패지관을 나와 옛 전주도청앞을 지납니다.

 

그보다 앞서서는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지요.
전라감영은 조선 초에 설치된 이후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통할하였던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 혁명 당시 전주화약을 맺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감영에는 중심건물로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관풍각, 연신당, 포정루 등 40여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근대화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전라북도청사가 이전됨에 따라서 전라감영지를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중이라고는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농민군의 집강소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되어 전봉준의 큰호령이 들리던...

1951년경  헐어버린 옛 선화당의 사진입니다.

 

풍남문을 향해 골목을 걸어 가다 방짜유기 를 전시 판매하는 곳을 만났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쑥 들어가 상품이자 전시물들을 둘러봅니다.

 
예전 한때 방짜유기로 만든 반상기셋트를 하나 장만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가격이 꽤 비싸더라고요.
망설임끝에 셋트는 포기하고 냉면그릇 두개를 대신 구입했지요.

 방짜는 주물과 달리 반복열 단조기법으로 만들어져서 유기중에 가장 제작이 어려운 만큼

각종 대장균등에 대한 살균효과를 가진 살아숨쉬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식기셋트외에도 양푼, 수반, 꽹과리, 징, 요강, 대야, 반지. 팔찌 등 여러가지를 제작 판매하는 것 같습니다.

 

눈이라도 호강하라고 둘러봅니다.

 

 

 

 

골목끝으로 풍남문이 보입니다.


전주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풍패지향의 남문이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습니다.

       처음 성을 수축할 때 남문 위에는 명견루라는  3층 문루가 있었는데,

1767년 3월 화재로 소실되자 그해 9월부터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을 하였고

           이때 쌓은 남문이  현재의 모습처럼 2층 문루가 되었으며 풍남문이라고 했다합니다.

1905년에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동, 서, 북문은 철거되고 남문만이 전주에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중층 문루가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1978년에 복원하였다고 하며

1980년 중수공사 때 풍남문 양쪽에 있었다는 포루와 종각을 옹성과 함께 복원했다합니다.

 

 

 이 풍남문은 천주교인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이곳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처형된 곳입니다.
1791년(신해년) 여름, 진산에서 진사 윤지충(바오로)이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윤지충은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이듬해 서울에 갔다가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서학을 접하였고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친의 장례에 대해 외종형 권상연(야고보)과 상의하고

교회의 가르침이라 하여 유교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행위들은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2월 8일 참수되어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후 천주교신자들은 노골적인 박해를 받게되었고

1801년(신유년) 3월 호남에 검거령이 내려

유항검은 대역 부도죄, 유관검·윤지헌은 역적 모의죄,  김유산·이우집은 불고지죄로 9월 17일 참수됩니다. 

그 후 90여년 만에 그 자리에는 전동 성당이 세워집니다.
신앙의 승리인가? 불필요한 희생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왜 모든게 그렇게 극단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전동성당으로 가는 길 한곁에서 산악사진초대전을 합니다.

 

 

 윗사진은 어딘가 모르겠고 아래사진은 설악산 울산바위 같습니다.


풍남문을 한번 더 뒤돌아 보고 전동성당으로 갑니다.

 

태조로 입구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이 성당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모두 "이 성당은 자연순교지의 하나가 되어 있는 전동의 풍남문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럼 이자리에 풍남문이 있었고 풍남문이 옮겨 세워졌다는 이야기인데 조금 더 정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성당은 유항검의 순교 88년뒤인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보드네(한국명 윤사물)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국명 박도행) 신부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하여 1914년에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마르셀로 라그루(M.Lacrpouts)신부가 부임, 성당내부와 외부의 미화작업을 마무리 지었고

1956년에 중앙성당이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운영되었었습니다.


이런 설명과 저런 설명 모두 천주교신자들은 다 잘 아실것이고 천주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을 겁니다.

 

 

성전안으로 들어갑니다.

 

 

성전 중앙부분을 갈라서 앞부분으로는 들어가지를 못하게 합니다.
멀리서 14처를 당겨 찍어봅니다만 선명하지가 않네요.
여행을 하면서 성당을 만나면 꼭 들어가 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와서 십자가의 길 사진을 찍으면서 14처를 도는 나만의 의식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합니다.

 

 

 

 

 

 

 

 

 

 

 

 

 

 

성당외부를 한바퀴 돌아보고

...

 

 

 

 

 

 

 

 

 

경기전으로 갑니다. 

 

 

Max Bruch Violin Concerto No.1 in G minor, Op.26

Max Bruch (1838∼1920)

Kyung-Wha Chung violin

Rudolf Kempe cond Royal Philharmonic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