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부여 조룡대

하늘타리. 2012. 8. 31. 17:18


동국여지승람 부여현 편에

‘호암(虎巖)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부소산 아래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것이 있고,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발톱의 흔적이 없어지는 세월동안 용이 발톱으로 할퀸자국이 남아있던 (爪龍) 바위가 

어느 만담가에 의해 용을 낚은(釣龍) 바위로 바뀌었습니다.

 

 

(문화재 연구소. 60년대 조룡대 사진)

 

시간이 흘러 1795년 9월, 당시 금정(金井) 찰방이던 다산 정약용이 부여현감인 죽마고우 한원례(韓元禮)의 초청으로 부여를 놀러왔습니다.
둘이 함께 경내 풍광을 즐기던중 이곳 강변에서 한원례가 전해들은 고사를 말하며 조룡대를 설명합니다.
“옛날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백마강에 이르니 신룡(神龍)이 짙은 안개와 이상한 바람을 일으켜서 배를 탄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소정방이 크게 화를 내고 백마(白馬)로 미끼를 삼아 그 용을 낚아 죽였다.

그런 뒤에야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라고요.
이에 정약용이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황당한 것을 좋아함이 이렇게도 심한가.

조룡대는 백마강 남쪽에 있으므로, 정말로 소정방이 대에 올라왔다면 군사는 이미 강을 건넜다는 것이고,

또 이 대는 백제성 북쪽에 있으니, 정말로 소정방이 조룡대에 올랐다면 성은 이미 함락된 것이다”
이어서 말하길  “용을 낚았다는 설(說)이 이처럼 잘못되었으니,

하물며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전의 사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일은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모두 물을 것이 없다.”


그 이후 스토리가 조금 바뀝니다.
백제 멸망후 강의 용신인 무왕의 혼이 오고가는 당나라 군선과 군병들을 물속에 삼키니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이 바위위에서 용을 잡아 처리하니 조룡대라하였다라고요....
그러다 보니 한강이 아리수라 불리우던 시절, 사비수라 불리우던 강의 이름이 아리수가 한강으로 바뀔때 백강으로 바뀌더니

어느 순간 잡힌 용도 아닌 미끼가 된 말, 백마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누구도 백제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고 백제를 멸망시킨 누군가를 도리어 우상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소정방에 대해 우호적인 전설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 하나를 더 이야기하면...
충남 서천에 이경전이라는 조선 시대 선비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일보다 천방사에서의 기이한 눈 구경이 더 대단한 일이다라고 기록한 절집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현종 5년(1664) 실록 12월 13일조 기사에 기록 되어 있는

천방사 승려들의 변란사건으로 인해 불태워져서 지금은 없고

지금은 주변에 은적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습니다만...)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기벌포(현재의 서천군 장항읍)에 진입하는데

갑자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초조해진 소정방은 이것은 분명히 산신령의 조화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하늘에  대고  날씨가 개어 준다면 천개의 절을 세워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겠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안개가 말끔히 가시고 그의 군선들이 움직일 수 있는 물길이 트였다 합니다. 

소정방은  천개의 절을 짓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 길로 산에 올라 주위를 살폈으나

도저히  천개의 절을 지을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자

천개의 돌을 떠서 절의 모양으로 새기고 그것을 상징하는 절을 세우며 그 절을 천방사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천방사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로는

소정방의 군사가 백제로 들어 갈 때 파도가 거세게 일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용신의 조화이니 천일동안 제사를 지내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어느 도승의 가르침을 받고

소정방이 이 전쟁의 와중에 어떻게 천일동안 제를 지낼수 있냐고 하자

도승은 천칸의 방을 만들어 같은 시각에 제사를 올리면 천일제가 아니겠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말을 들은 소정방은 크게 깨우침을 얻고

그 도승의 말대로 산위에 있는 절의 공간을 천칸으로 나누어 기도를 하였더니

풍랑이 잠잠해져서 군사들이 뜻대로 앞으로 나아가 기벌포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외람되이 말한다면
백제멸망 당시 백제 사람 조차도 나라의 멸망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또 다른 정복자로의 교체로만 받아들였을 뿐이겠지요.


그런 징후를 여러가지 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지금 우리가 백제의 옛땅이라고 불리우는 곳의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이런 저런 설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계통의 유민세력이 그 당시 이땅의 주인인 마한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 지역의 비류집단과 연맹을 형성하여 남부여라 하다가

초고왕때 마한을 멸망시키고 지역연맹의 맹주가 되어 백제라고 이름을 고쳤다는 설입니다.


십제, 백제라는 이름부터가 토착세력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지요.
백제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역사책에 의하면

백제는 근초고왕때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영토를 확보하였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백제는 철저히 토착세력을 억압하였고 물건너온 귀족세력들간의 협조와 견제속에 나라를 유지하였습니다..
백제 전성기때  크게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나뉘어 도합 22부의 중앙관서가 있었습니다.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여

수도를  5부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었습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무령왕때의 양직공도에서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국 22개처의 주요 읍에는 왕자·왕족을 분거케 하여 이를 ‘담로’라 하였습니다.
각 귀족들은 토호세력과의 합종, 연횡을 통해 자기의 세력을 확장 또는 유지해 나갔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왕을 살해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많은 백제의 왕이 암살 또는 원인모를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백제의 멸망은 국력이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멸망 얼마전인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하여

신라의 왕이 또다른 적국인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듯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멸망 당시 좌평이던 의직은 기벌포에서 당나라군과 혈전을 펼칩니다.
기벌포는 좌평 성충(成忠)이,

“만일 외국 군대가 백제를 침범하는 경우 육로에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뒤에 좌평 흥수(興首)도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백제의 국방상 요지였음에도

아무런 방비를 세우지 않아 소정방의 군대가 쉽게 들어와 진을 칠 수 있었습니다
의직은 당나라군사가 이미 이곳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와 아직 지쳐있을 당나라군사를 백제군사의 주력을 이용 먼저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아무도 그 의견에 호응하지 않아 오직 1만의 군사만을 데리고 13만의 당나라군사와 싸우다 패하고 맙니다.
계백또한 그 많던 병사들은 다 어디로 보내고 겨우 5천의 군사로

산성도 아닌 황산벌 벌판에서 신라군사 5만에 대적합니다.
신라군과의 전투에 앞서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투를 앞두고  처자를 죽인 것은 결국 질것이 뻔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

휘하 병사들 모두를 싸우기도 전에 자포자기하게 만든 것이지요.
구당서 소정방편을 비롯해 여러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웅진성에 있던 의자왕과 태자는

웅진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그들의 부하들에 의해 잡혀 소정방에게 넘겨집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다수의 귀족과 거의 모든 토호들이 백제왕조에 등을 돌린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백제가 무너집니다.


하지만 그당시 백제의 귀족은 상당수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불쌍한 민병들의 잔존세력만이 부소산 기슭에서 떠밀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타사암(墮死巖)이라 불리우던 곳이

 어느날 어느기록에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여기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낙화암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도 당나라로 끌려간 마지막 임금 의자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없습니다.

 

잔존세력에 의해 부흥군이 결성됩니다.
이것도 승기를 잡을 만하니 지도부 셋이 서로를 죽입니다.
그렇게 끝이납니다.


이상한 나라 백제입니다.
그 자체의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그 이후의 국내의 기록은 무시내지는 폄하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학문의 수준이 높았다. 예술이 발달했다.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라는 과대한 칭찬이 쏟아집니다.
대부분을 일본서기를 근거라고 주장하면서 또 일본서기에서 일본이 백제를 관할하였다라는 등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됩니다.
한 책의 기록을 반은 무조건 맹신하고 반은 무조건 타기되는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커도 너무 큰 나라입니다.
중국 25사서중 큰 포션을 차지하는 송서 97권 백제전에 의하면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하남, 산서 등을 포괄하며 산서성의 옛이름이 晉입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기록하면서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하여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왕족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자 그 누구도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백제가 이 백제인지 저 백제가 그 백제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알수 없는 나라는 백제가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입니다.

Wolfgang Amadeus Mozart   Horn Concerto No.1 in D Major, K.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