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은산 별신당 별신제

하늘타리. 2012. 8. 30. 19:47

은산별신당


그리고 별신제...


은산별신제는 조선 중후기부터 은산지방에서 지내오던 제인데

다른 별신제와 마찬가지로 매년 지내는 제는 산제라 부르고 3년에 한 번씩 특별히 지내는 제를 별신제라 부릅니다.

196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효율과 편의를 위해 매년 3월에 대제와 소제로 번갈아가며 지내고 있답니다.

예전에 3년에 한번 할때는 20일에 걸쳐 실시했는데

요사이는 대제를 드리는 짝수 해에 6일, 소제를 드리는 홀수 해에 5일간 진행한다고 합니다.

 

별신제(別神祭)란 전국 어느 곳에서 여러 유형으로 있는 향토신에 대한 제사에 특별한 신을 추가해 모시는 것으로

은산 별신제는 민속 신앙의 바탕위에 군대의 의식이 가미된 장군제적 성격이 짙게 포함되어 있지요.

은산은 공주, 청양, 홍산으로 길이 뻗어 있어, 조선시대에는 역(驛)이 설치되는 등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대의 경제적 중심지로서 기능하게 되었고,

상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기존 마을제에 장군신들을 추가하였습니다.


기존에 모시던 산신에 추가된 신은 복신장군(福信將軍)과 토진대사(土進大師)입니다.

(조선 중후기 부터 추가로 모시기 시작되었다 하는데 영정속 인물의 모습은 일본 신화풍의 그림입니다.

중간에 다시 그렸다해도 원본을 베꼈을텐데 꼭 일제초부터 모셔진 것 같습니다. 넘어가고...)

 

복신은 백제 30대 무왕의 조카인 귀실복신(鬼室福信)일 것인데 토진대사는 누구일까요?
역사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토진대사는 도침대사(道琛大師)를 잘못 표기한 것일 것이다라고 추정들 합니다.

이 두 인물은 백제 재건을 위하여 임존성(任存城)을 근거로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불러 실지회복을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제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복신장군과 토진대사를 모시게 된 것은 백제 유민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특히 무주고혼(無主孤魂)의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진혼굿의 의미를 지니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줌으로써 마을이 편안하고 무병하게 된다고 믿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은 20일에서 6일정도로 제가 축소되었음에도

이 제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거창합니다.
별신제를 지내려면 마을 원로들이 그 해의 별신제 임원(별신제를 주관할 제관(祭官)들과 무관(武官)들)을 선정해서

동짓달 무렵부터 준비에 들어갑니다.
제관은 아실꺼고.. 특히 별신제의 모든 제물을 책임지는 상인의 대표격인 화주는

집 대문 앞에 금줄을 드리우고 황토를 뿌려 잡인의 출입과 잡귀, 제액을 막도록 합니다.
무관은 장군제의 형식으로 치르는 별신제의 군사 조직에 속한 임원들로

모두 대장(大將), 중군(中軍), 패장(稗將), 사령(司令) 등 조선시대의 벼슬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아마도 백제때의 군사조직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제가 시작된 조선 후기 무관직의 명에서 따왔을 겁니다)
대장은 백마를 타고 위용을 떨치며 제사를 제외한 행사를 지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외에도 무녀, 풍물패, 악공, 나팔수, 기수(旗手), 군사들 등 약 100여 명에서 150여 명 정도의 역할이 정해집니다.


첫째날의 의식은 '물봉하기' 입니다.
은산리에는 은산면의 중심을 가로질러 백마강으로 흘러드는 금강의 지류인 은산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은산천 상류지역 일정한 곳에 왼손으로 꼰 새끼줄인 '금줄'을 칩니다.

금줄은 부정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금줄 위편의 물은 아무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 물로 신령들에게 바칠 '조라술'을 빚습니다.
조라술을 담은 첫째 날부터 사흘 동안은 제관인 별좌가 풍물패를 이끌고

저녁에 임원들의 집과 우환이 있는 집을 방문해 가내 평안을 빌어주는 집굿을 해줍니다.
둘째 날은 군사를 일으키는 날입니다.

대장은 백마에 올라 무관과 군사들을 소집하고 무녀들, 악공들을 뒤따르게 하여 행렬을 이끕니다. 
이날 중요한 행사는 '진대베기'입니다.

진대를 베러 갈 때 옛 병사들의 행군을 연출하는 진대베기 의식은 은산별신제의 군사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날은 별신당에 올릴 꽃을 받아오는 '꽃받기 행사' 가 있습니다.
염색한 한지로 만들어진 연꽃, 국화, 목단 등의 지화는 하당굿 행사가 끝나면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다음 별신제까지 잘 보관하면 별신의 가호로 인해 복이 온다는 꽃이랍니다.


넷째 날은 꽃과 제물을 별신당에 봉송하는 '상당 행사'와 별신당의 '본제'가 있는 날입니다.

본제는 산신과 별신에 대한 유교식 제사로 치뤄집니다.


본제를 모신 다음 날인 다섯째 날, 전날의 제사를 별신이 잘 받았는지를 가늠하는 '상당굿'이 벌어집니다.
별신당 앞의 굿터에서, 복신장군과 토진대사의 슬픈 죽음을 위로하는 무녀의 노래와 춤으로 시작됩니다.
복신장군과 토진대사의 억울한 심정을 담아 무가를 부르는 이때가 바로 은산별신제가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오후부터는 예전 시장 한복판이었다는 마을 중앙의 오래 묵은 괴목(槐木) 아래에서 '하당굿'이 벌어집니다.
하당굿은 하당(下堂)의 신인 장승과 다른 여러 신령을 위로하고 먹이는 제의입니다.

이 절차가 끝나면 사람들에게 꽃을 나누어 주고,

별신제를 무사히 치렀음을 기뻐하며 임원들과 무녀, 구경꾼들까지 모두 참석한 한바탕 놀이판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는 최고 제관인 화주가 산신에게 홀로 나아가 제사를 모두 마쳤음을 고하는 '독산제'를 하고

마을의 동서남북 사방에새로 만든 장승을 세웁니다.
동쪽의 장승은 '동방 청제 축귀 대장군(東方靑帝逐鬼大將軍)',

 서쪽의 장승은 '서방백제 축귀 대장군', 남쪽의 장승은 '남방 적제 축귀 대장군',

북쪽의 장승은 '북방 흑제 축귀 대장군' 이라고 장승의 몸통에 묵서를 하였지요.

 

 

장승을 세운 다음에는 제물을 차려 놓고 지내는 장승제를 마지막으로

6일간에 걸친 은산별신제의 막이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쓴글은 별신제에 대한 기초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쓴 것이고....

저는 이 별신제에서 토진대사가 정말 도침대사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황당한 제(祭)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아시겠습니다만...
백제 왕족 출신의 복신(福信)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주류성(周留城:韓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시도하여

왕자 풍(豊)을 영립하고 부흥군을 조직, 일본에 원병을 청하고

임존성(任存城:大興)에서 기병한 흑치상지(黑齒常之) ·지수신(遲受信) 등의 호응을 받아

662년에는 지라성(支羅城) ·급윤성(及尹城) ·대산책(大山柵) ·사정(沙井) ·내사지성(內斯只城:儒城) 등

대체로 금강 이동(以東)의 여러 성책(城柵)을 점령하였습니다.


본래 귀족이었던 귀실 복신과, 승려였던 도침은 크고 작은 의견충돌이 계속 있었습니다만

백제를 부흥시켜보자는 일념하에 뭉친 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자

당나라는 백제부흥세력에게 화친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도침이 그 당나라의 사자를 물리치자

병권을 잡고있던 복신은 도침이 자기의 지시를 받지 않고 한 독단적 행동에 화가 나 도침을 죽이고 맙니다.
부흥세력은 부흥군과 승/민병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승/민병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도침이 죽게 되자 부흥세력 내부에서 내분이 발생됩니다.

부여풍 또한 명목상의 왕일뿐 도침이 죽고난 뒤 모든 권력이 복신에게 있음에 불만이 커졌고,

이에 복신을 급습하여 사로잡아 죽입니다.
그 때 당나라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백제로 다시 가게 하여

백제부흥군의 세력을 회유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지도부에 분열에 환멸을 느낀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나당연합군과 왜의 후원을 받은 부여 융의 세력과 부여풍의 세력이 서로 동서백제로 나누어져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백강전투에서 서해의 조수간만의 차를 모르고 있던 왜군과

백제에 살지않았던 왕족 부여풍은 바닷가에 갇혀 결국 대패하고

지수신이라는 흑치상지의 부하가 임존성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였으나,

흑치상지가 직접 임존성으로 가 결말을 지으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 납니다.

 

백제 승려 도침은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신당서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렇듯 억울하게 귀실복신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귀실복신과 나란히 서서 제를 받는다???


말도 않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몇년전 문화재청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의례 그 자체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지 그 대상신격이 누구인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하여 머쓱해 졌습니다만 ..
오늘 또 다시 복신과 도침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 져서 옛 사진 참고삼아 한줄 글을 씁니다.

 

<사족>
백제가 망한 663년 이후 일본서기 664년 조에 「백제왕선광을 난파(難波:나니와)에 살게 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광왕(善光王)은 백제 의자왕의 왕자라고 합니다.

선광왕은 70~80년을 살았고 선광왕의 증손인 경복왕(敬福王)의 대인 749년

일본조정은 「그를 하내국중궁(河內國中宮: 지금의 枚方市)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665년에 400명, 666년에 2,000여명이 도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69년에는 백제의 공신인 여자신(余自信)과 귀실(鬼室:키즈시) 집사(集斯:슈우시) 등의 남녀700여인을

근강국(近江國)포상군(蒲生郡)에 옮겨 거주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난파(難波:나니와)에서 전거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 조정에서는 망명하여 온 백제인을 위하여  특별행정구역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시가켄 가모군(蒲生郡) 히노쵸(日野町) 오노(小野)에는 귀실신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옛날부터 후도도(不動堂)라고 하는 오노(小野) 마을의 니시노미야(西宮) 진자 뒤에서 묘비가 발견되었는데

 11세기 무렵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묘비에 귀실집사 묘라는 기록(鬼室集斯墓)과

귀실집사가 서기 688년 죽은 뒤 서손 미성이 만들었다는 기록(庶孫美成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이 신사는 귀실신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일본 큰 신사에는 구지(宮司)라고 하는 직원이 있지만

주로 시골에 있는 작은 신사는 마을 사람들이 신사를 관리하고 신앙 의례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실신사도 이 마을 구장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귀실집사의 묘비석은 본전의 뒤편 오른쪽에 있습니다.

 

 귀실집사는 백제쪽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 서기에만 등장하는데

일본서기 천지왕 4년 2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그는 교육을 담당하던 후미노츠카사노가미(學職頭)라고 하는 높은 관직에 있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귀실집사는 백제에서 연마한 한학과 천문, 지리, 역술, 병법 등을

당시 일본사람들에 가르치거나 가르치는 교육제도를 정비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귀실집사는 어느순간 은산별신제의 대상신인 장군 귀실복신의 아들이거나 가까운 친척이라는 설이 제기 되었습니다

귀실신사가 귀실복신의 아들 또는 친척일 수 있는 귀실집사를 모신 진자라는 것이 알려진 뒤

은산별신제가 열리는 한국 부여군 은산면과 일본 히노쵸는 자매 결연을 맺고 해마다 교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인연 오래가기를 바랍니다.

 

Max Bruch Violin Concerto No.1 in G minor, Op.26

Kyung-Wha Chung violin

Rudolf Kempe cond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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