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정상 깃대봉을 올라갔다올 시간이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백련산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을 걷습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생활 중 10여년을 보냈던 곳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암, 제자 학래 이청의 집 등을 떠돌며 지내다가
1808년 봄에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중에 정약용선생은 백련사에서 혜장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을 통해 유불(儒佛)의 학문적 지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수많은 다산의 명저를 탄생시킨 산파가 됐다고도 합니다.
다산이 저녁이면 차 한 주전자를 벗삼아 혜장과 시일담을 나누기 위해
오솔길을 걸어 백련사까지 다녀갔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길이
지금 걷는 이 오솔길입니다.
해월루로 갑니다.
2007년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이어주는 오솔길 중간부근에 세워진 해월루는
차(茶)에 심취했던 다산이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와 교유하며 걸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강진군에서 세운 누각입니다.
지금도 아름답지만
보름날 해월루에 오르면 바다에 비친 달무리가 더욱 아름답다 하고
매년 1월 1일 일출을 보면서 만덕산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답니다.
다시 오솔길로 돌아와서
다산초당 쪽으로 갑니다.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이 오솔길 주변 일대에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합니다.
천일각입니다.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정자는
다산이 신유교란 때 흑산도로 귀양갔다 목숨을 잃은 둘째 형 약전이 그리울 때마다 올라와
흑산도쪽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 짓곤 했던 곳이라 합니다.
다산이 머물며 저술활동을 하던 곳이며 손님을 맞이하던 동암
다산동암과 보정산방의 현판이 있습니다.
다산동암
보정산방
보정산방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라고 안내판에 나와 있습니다만..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에 실려 있기로는 '다산초당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 저기에서 집자해서 만든 것이고,
보정산방은 추사가 다산을 위해 직접 썼다고 한다'로 돼 있습니다.
한편, 2006년 7월 12일자 경향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다산이 저술에 전념하던 동암에는 다산을 흠모하던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를 새긴 ‘보정산방(寶丁山房)’과
집자해서 만든 ‘다산동암(茶山東菴)’ 현판이 걸려 있다.고 되어 있고
또 2004년 7월 9일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5-전남'편에 보면,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 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 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로 나와 있으니
마음에 드는데로 선택하시지요.
다산초당옆 연지 석가산입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건물은 노후로 인해 붕괴됐던 것을
지난 1957년 현재 ‘다산초당’ 현판이 있는 건물 본채가 기와집으로 복원됐습니다.
이후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뒤
1970년 선생이 거처했던 동암과 제자 등이 기거했던 서암, 천일각 등이 들어섰으나 이 역시 모두 와당으로 복원됐습니다.
다산이 초당에서 쓴 명저가 '목민심서'입니다.
"관리가 지방에 부임할 때 책수레만 갖고 갔다가,
돌아올 때 토산물을 가득 싣지 않고 책수레만 갖고 온다면 맑은 바람이 길에 가득하지 않겠느냐."
그리고....『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는 등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다산이 유배지를 떠나기 전 새겼다는 '정석' 두글자
초당을 내려오다 만나는 해남 윤씨 누군가의 무덤
사실 일부인사의 유배생활은 끔찍하였지만
보통은 복권됐을 때를 생각해서 지방에서 극진히 대접합니다만,,,
다산은 종교 문제로 유배를 와서 거처를 정하기도 쉽지 않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다산이
이곳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은 외가였던 해남 윤씨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초당은 귤동(橘洞) 마을 윤단의 산정으로 윤단은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한 것입니다.
또한 부호였던 윤광택(尹光宅)은 정약용 부친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아들 윤서유는 죽마고우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배려로 유배생활의 어려움은 해소되었고
유배중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정약용의 외동딸이 혼인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씁니다.
딸이 시집갈때 다산은 부인이 초당으로 보낸 치마폭에 시를 쓰고 매화와 새를 그려 전했습니다.
"꽃도 이제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라며 보낸 선물이었다고 하네요.
정호승 시인이 이름을 붙인 뿌리의 길 입니다.
뒤돌아 봐야 멋있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다산이 초당에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고 노래합니다.
유적에 대한 설명
다산초당 답사를 마치고...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허허로운 주변풍광에...
문득
유배에서 풀려난 몇년 후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은둔하여
박해로 순교한 지인들의 유고를 "만천 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저작이 생각나고
그 발문중 일부가 떠오릅니다.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죽음은 모면하여 급기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구나.
30여 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 없건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 다 어디로 가 버렸기에
하나도 볼 수 없단 말인가!"
두충나무 길을 걸어 기념관 앞 주차장으로 갑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란지가 오래되었다. "는 말을 되새기며
다산 역사탐방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