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제주올레 18코스 5-5

하늘타리. 2011. 4. 26. 12:54

조천리마을안으로 들어갑니다.


크고 작은 물통들


그 어느 시절에는 정말로 귀한 시설이었지만 지금은 걸리적거리지 않으니 그냥 놓아두는 그런 시설이지요.
해안도로를 만든다거나 다른 어떤 시설이 들어선다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없앨 것 들입니다.
없어지기전 볼때마다 꾹꾹.


제주에 "씻을 때 물 하영 쓰민 저승강 그 물 다 먹어사 한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제주의 옛 사람들이 얼마나 물을 귀하게 여겨 왔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제주의 지표면은 화산회토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비가 내리면 거의 지표면 아래로 숨어들어

지하의 용암층을 흘러내리다가 바닷가에 와서야 솟아오릅니다.
제주도 용천수의 90% 이상이 해안가에 있어서

그 물을 이용하기 위해 해안지역을 돌아가며 마을을 이뤄 왔던 것이지요.


중산간지역에서는 웅덩이에 고인 물로 식수로 해결해 온 것이 봉천수입니다.

 지금은 농업용수로도 이용할 수 없이 탁해져 있는 마을의 연못들이 대부분 애초에는 식수원으로 만들어졌던 것들입니다.
이렇듯 물이 귀했던 제주에는 물에 대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물을 져 나르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으며,

새벽마다 물허벅을 지고 흙이 가라앉은 깨끗한 물을 두어 차례 길어오기를 반복하는 일을 하루의 시작이라 여겼지요.

행여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물을 조냥하고 또 부조로도 행했으며

제주 어머니들의 억척스런 삶의 근원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물을 만들고 지키는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용천수가 나는 곳에는 돌을 쌓아올려 마을의 공동물통을 만들고

먹는 물, 몸곱는물, 빨랫물 등으로 내부를 구분해 놓았습니다.

10년 전 도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만들어진 제주의 물통(용천수) 수가 910여개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바닷물과 섞이지 않고 맑은 물만 나오는 곳은 100여개소가 채 않된답니다.
그런 물통들이 이제는 중산간지대의 개발과 해안지역의 매립, 도로확장 등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없어지지는 않았어도 방치되어 쓰레기만 모여 있거나 완전히 말라버린 곳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일부 물통은 복구라는 명분으로 고작 시멘트를 덧발라 씌워버려서

그 원형을 보존하기는커녕 오히려 훼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을정자목에게 이실정을 아느냐 물어보니

나도 뿌리가 시멘트에 갖혀서

내코가 석자인데 남의 사정을 어찌아느냐 하십니다. 

 

주변에 금계국이 보입니다.

이 곷의 꽃말은 즐거움 그리고 상쾌한 기분이지요.

힘을 얻어 다시 걸어갑니다.

 

바닷가에 연해 있는 물통들을 사열하며 갑니다.

 

 

 

 

 

 

 

바다로난 작은 골목사이로

 

잠녀 불턱인가해서 다가 왔습니다만

 

여기도 물통인듯 합니다.

 

물통에서 바라본 물통들..

 

 

뛰어노는 아이들

마을이 살아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학교와 마을 사이 야트막한 돌담과 작은 통로가 인상 깊습니다.


시인의 집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용기도 부럽고 어쩌면 그 여유가 더 부러울 수도 있지요.
서로의 처지가 다르니 이야기 할 것은 없고
아는 얼굴 몇몇이 보여 들어가 봅니다.

 

오늘 개장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쫑파티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강올레님이 열심히 이사장 사진을 찍기에

 

나도 한포즈 요청해보고..

어차피 이너써클은 아니니 여기서 시간 보낼 일도 없고
잠시 이야기 나누다 시인의 집과 연해있는 물통사진 한 장 찍고 남은 길 마저 갑니다.

길을 열어준 그 것이 고마운 일이니까 길을 걸어야지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열네분중 한분의 생가터

 

참 이상한 마을
일제강점기 권세를 누린 이도 많고
항일투사도 많은 곳.


좋은 일만 기억하기로 해요.

 

꽤 많은 올레꾼이 쉬었다 가셨을 파고라

 

이름 그대로의 올레

아니구나! 올레는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니 이것은 그냥 돌담길이구나.

돌담에 낑겨있는 팽나무

압력에 의한 다이어트수행중

돌담집 안채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는 벚꽃과 눈 맞춥니다.

그동안 감사합니다.

 

양진사

절집의 모양새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듯하지만
71년 해인사에서 무릎이 터지고 쓰러지면서 100만배 기도를 이뤄내신 지금의 약천사 회주 혜인스님이

70년대에 이곳 양진사 선원장으로 계시면서

제방납자들을 가르치셨고 그 선풍이 지금도 여여한 곳입니다.

 

 

 

 

김숙사치수기념비

 

지금 이 흘물의 모습은 기념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조천진성

鎭은 조선시대 牧 또는 縣에 소속된 군사구역입니다.


조천진성의 최초 축성연대는 기록에 없고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 목사가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이면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였답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약 130m, 높이 약 3m의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성을 축조했습니다.

조천진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동쪽 한 곳으로만 통할 수 있고

성벽은 석축으로 자연석을 다듬거나 그대로 쌓아올렸습니다.

성안에는 조천관·주방·마구간·군기고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제주 9개의 진성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해방후 성의 북쪽을 헐어 조선소로 썼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복원되었으며

東城 위에는 연북정이 있습니다.

 

연북정

선조 23년(1590)에 건물을 지은 후 쌍벽정이라 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건물을 보수하고 이름을 연북정으로 고쳤답니다.

연북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충정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네요.
사실 임금을 사모하는 게 아니고...

서울에서 누리던 권세를 그리워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읽혀집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의 사면 벽을 막아 경찰관주재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망루 앞에서 본 삼양동 원당봉쪽

 

큰물과 족은돈지

 

조천연대도 보이네요.

 

비석거리

 

제주도에는 설촌년대가 오랜 마을의 중심지나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비석거리가 있고

여기에는 마을과 관련된 인물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가 몇 개씩 있습니다.

이곳 조천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의 목사와 판관 그리고 공마감에 대한 선정비가 8기 서 있고,

최근에 만든 電化사업기념비 같은 비석도 옛 비석과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목사채공동건휼민선정비(牧使蔡公東健恤民善政碑)

채동건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6년(1855) 8월에 부임하고 동왕8년 6월에 충청수사로 교체되어 갔습니다.

그의 재임 중에 연상루를 중수하였습니다.

 

사상백공희수청덕선정비(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

백희수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 2년(1851) 7월에 부임하여 동왕 4년(1853) 12월에 교체되어 갔습니다.

부임하는 해 가을 흉년이 들자 별저미와 내탕전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빈궁한 백성을 진휼하였습니다.

 

사상정공영세불망비(使相鄭公永世不忘碑)

비문은 전면에 使相鄭公永世不忘碑, 오른쪽에 決立盜0 歷00牧,  왼쪽에는 0000 鮮見其徒라고 되어 있습니다.
使相鄭公 다음은 공란으로 되어 있으나 통상 岐源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기원제주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 14년(1863) 정월에 부임하였는데 고종 원년(1864)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습니다.

재임 중 그는 임술민란을 일으킨 주모자 姜悌儉과 金興采 등을 체포 처형하고 난을 진압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내렸지요.

행정을 폄에 있어서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위엄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김공가익선정비(牧使金公嘉翼善政碑)

김수익 목사는 인조 27년(1649) 9월에 부임하고 효종 2년(1651) 7월에 정의현감 안집(安緝)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갔는데

백성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사상이공선식휼민정비(使相李公宣植恤民政碑)

이의식 목사(겸방어사, 武臣)는 헌종 12년(1846) 2월에 부임하고 동왕 14년(1848)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습니다.

재임 중 그는 三邑 원전세(元田稅)의 혁파, 南,西,右 3학당의 혁파,

별아병(別牙兵) 총수(銃手) 설치, 북수구성(北水口城) 퇴축(退築), 천일정(天一亭) 건립,

간성(間城) 확장과 중인문(重仁門) 개액(改額), 원납전(願納錢)에 의한 군기 수리,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관사 중수 등 업적을 많이 남겼으나,

탐욕이 많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하네요.

 

통판김공응우선정비(通判金公膺友善政碑)

철종 31년(1857)에 조천에서 태어난 김응우 판관은 고종 29년(1892) 9월에 부임하고 동왕 30년(1893) 11월에 교체되어 갔습니다.

정사가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사상이공원달거사비(使相李公源達去思碑)

비문은 전면 중앙에 使相李公源達去思碑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두 줄로 三載爲治 情多通下 一心0弊, 왼쪽에 두 줄로 丁惟減一 蹟登0碑 役則除四 書以粗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원달 목사(겸방어사, 文臣)는 헌종 3년(1837) 11월에 부임하고 동왕 5년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습니다.

재임 중 그는 편역미 4말에 4되를 감해 주었고, 경민편을 인출하여 각 동네에 나누어 주었는가 하면,

곡식이 기재된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정사에 밝았으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삼성혈을 파보려 하기도 했답니다.

 

공마감관오영구폐석(貢馬監官吳永救弊石)

비문은 전면 중앙에 貢馬監官吳永救弊石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한 줄로 都會革罷 玆庸銘勒, 왼쪽에 한 줄로 船人蒙惠 以傳千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읽을 때는 이렇게 읽어야지요.

都會革罷 船人蒙惠 玆庸銘勒 以傳千祀(도회를 혁파하여 뱃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 이에 공덕을 돌에 새겨 천 년을 전하노라)’라고요.

 

그 옆 전기설치등 주민생활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분들의 기념비도 있습니다.

 

이 비석들이 사실 더 고마운 것이지만 최근의 일이니 기록을 생략합니다.

 

옛 향사터에 있는 비석도 둘러봅니다.

 

 

김장환의 생가터

꼭 그렇게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휘문고보 4학년생이었던 이분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조천 만세운동의 단초가 마련되지요.
그 당시 이 지역에서는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이

전국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인사차 숙부 김시범의 집을 찾아간 김장환은 서울의 시위 상황을 소상히 말하였고

김시범과 김시은은 제주 지역에서의 시위운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동지규합에는 김시범이 나섭니다.

14인명이 규합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천뿐 아니라 제주 지역에서도 명망이 있는 김시우의 기일을 거사일로 택하여 거사계획이 발전됩니다.
3월 21일 아침 미밋동산에는 14인의 동지를 비롯하여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흥·신촌 등지의 서당생도 등 150여명이 모였습니다.
오후 3시경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높이 꽂아 놓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당일의 시위행진은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까지 이루어졌다고 하고 경찰의 저지로 13명이 연행됩니다.
이 행진은 22일, 23일, 24일까지 계속됩니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주동자 14명 모두를 포함한 다수의 인원이 체포되면서 운동은 막을 내렸고

주동자들은 6월 내지 1년의 형을 받았습니다.

 

옛 가옥과 마을 정자목앞을 지나며 그날의 만세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코스를 살짝 벋어나 금대로 가봅니다.

 

제주도 문화재 위원 김익수 선생은

김시우의 기일에 김장환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이 조천만세운동이니

이 금대비는 조천만세사건의 발원지를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답니다.

금대비를 한번 번역해 봅니다.

 

태클금지..


금대명 병서(琴臺銘 幷序)
시제( 8촌 아우) 형식(瀅植) 지음
오얏나무골 길 왼쪽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그 모양이 비파와 같아 금산(琴山)이라 한다.

동산 밑에 서재(書齋)가 만취(晩翠: 金時宇(1875-1918)의 號)선생의 옛집이다.

항상 성인 5,6명과 동자 6,7명이 이 동산에서 시를 읊었는데,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모두 금낭화처럼 아름다웠다.

선생이 돌아가신후 모든 것이 잊혀져 가고, 유허(遺墟)조차 사라져 버릴까 염려하여,

선생의 아들 윤환(允煥)과 함께 계획하여 돌로 깨어 대(臺)를 쌓아 금대(琴臺)라 이름 하였다.
명(銘)으로 이르길,

선생이 계실 때 동산은 높았으나,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동산이 적적해졌네,

돌에 새겨 대(臺)를 보존하니, 고매한 뜻  새긴 글 오래하리라.

 

 김유배(金濡培)가 글을 쓰고, 오평원(吳平元)이 글을 새김. 공자강생2476년 乙丑 3월 세움 .

 

공자강생 2476년 봄에 건립했으니 1925년의 일입니다.
김시우선생을 따르는 분들이 유림제현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당시 유림은 반일제세력은 아닙니다.


좋게 해석해 보면 일본연호를 쓰지 않고 건립년도를 알리기 위한 방안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석위에 쓰여진 1961년 5월 5일이라는 날자와 그 밑 영문은 누가 왜 썼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꾹하고

 

남쪽으로 보이는 조천 만세동산 창열사앞 애국선열 추모탑을 당겨보고 항일기념관으로 다가갑니다.

 

 

항일기념관 서쪽 주차장

오늘의 종점입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주변 풍광에만 만족해야 하는데

마음과 생각이 이쪽 저쪽으로 뛰어 다니니 몸도 따라서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합니다만
즐거운 피로라고 해도 될까요?

그래도 아쉬움 남아 만세동산을 한바퀴 돌고 부록삼아 첨부합니다.

 

조천만세동산
3.1독립운동기념탑과 제주항일기념관, 평화를 염원하는 애국선열추모탑과

제주출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위패를 봉안하는 재단인 창열사가 있습니다.

 

시간이 늦어 못들어갈 기념관에 대해서는 설명으로 대신합니다.
해녀항일운동이 디오라마와 매직비전 기법으로 전시돼

제주여성의 강인한 정신과 제주여성들의 항일정신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고 하네요.
영상관과 2개의 전시실로 꾸며졌다 합니다.

영상관에는 ‘어둠의 역사를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제주의 빛〉이라는 영상물 등이 상영되고,

제1전시실에는 항일운동사 연표, 일제침탈과 기구의 개편, 제주도 항일운동 발생지역도,

 법정사 항일운동, 의병운동, 제주인의 항일운동 등에 대한 내용이

패널과 디오라마, 지도, 그래픽, 부조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선보인다합니다.

2전시실에선 3·1 운동 전국상황도, 전국 3·1운동의 실체,

항일학생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옥중생활사,

제주인의 국외 항일운동에 대한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합니다.
 
야외시설들을 둘러봅니다.

 

돌아보고 나서 뭔가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세계평화협의회가 세운 평화의 기둥,

전 세계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중국 래주시의 염원이 담긴 월계선인 조형물이 없어졌더군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한바퀴 둘러보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길건너 망사비 당겨보면서

그 사연을 생각해 봅니다.

다음 코스에서 또 만나요

Praha  In My Dreamy Infa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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