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제주올레 18코스 5-3

하늘타리. 2011. 4. 26. 12:45

동카름마을 물통들을 지나

 

 

 

환해장성이 쌓여져 있는 곳으로 갑니다

 

화북동 환해장성

이원진의 탐라지와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따르면

고여림등이 제주에 들어와서 삼별초가 제주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려고

바닷가에 장성을 두른 것이 환해장성의 시초라 합니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년) 9월에 탐라에 들어온 고여림과 김수의 군대는

바로 뒤따라 11월에 탐라에 상륙한 삼별초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두 달도 채 않되는 기간에 장성의 축조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차라리 삼별초군이 고려군의 상륙을 막으려고 주민들을 동원 축조하기 시작하였을 겁니다.

 

조선 헌종 11년(1854년) 6월에 영국선이 섬연안을 측량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권직목사가 크게 놀라 그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장성을 수축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제주도 일원에 남아있는 환해장성의 자취는 이때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성과 일반적 돌담과의 차이는 장성은 겹담양식입니다.
바깥쪽 담이 높고 안쪽담이 낮으며 그 사이 잡석을 채우고 안쪽에 회곽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곳 화북동 환해장성은 2006년 말에 약 3억 이상의 돈을 들여 복원했다는 곳인데.....


복원후 와서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원래의 모습은 어디가고
전문석수쟁이들을 동원 새로운 성을 쌓았습니다.

 

현대판 환해장성이지요.

복원이라고 하는 원형질의 파괴
그게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묵인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차라리 있던 것이나 잘 보존 할 것이지 있던 모습조차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그 기술
찬탄을 보냅니다.

 

갯무꽃 뒤로 별도연대가 보입니다.

연대로 올라갑니다.
올레길 개장행사준비로 깃발을 꼽아놓았나 봅니다.

 

 

안내문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연대위에서 주변을 둘레둘레 봅니다.

 

참 사람이라는 게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여겨진다더니
그래도 복원이라는 미명아래 새로 쌓은 장성이 몇 번 와서 보았다고 생경하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연대에서 내려와 마을 올레를 지납니다.


먼 문간과 이문간이 갖추어 진 집

 

 

삼양동쪽으로 가는 길 옆
누군가의 영모비

바다에서 돌아가셔 묘가 없습니다.
후손이 한참 후 할아버지 영모비를 세웠습니다.
통정대부라고 쓴 글이 차라리 마음에 않좋습니다.

 

묘비 앞에서 바다를 봅니다

 

삼양동 가는 길 조그만 골목사이 물통

 

 

삼양동 벌랑마을 포구의 흔적입니다.

 

포구옆 폐가

 

굴묵

 

새를 얹은 초가. 지붕을 개비한지 꽤 오래됩니다. 사람이 삽니다.

 

마을안 물통.

이 물통의 이름은 알았는데...괸물?

 

새를 새로 덮은 초가.

 

다시 벌랑마을 옛포구흔적으로 갑니다.

벌랑마을이란

유난히 파도가 심하게 치는 해안지대마을이라는 거지요.

 

이길은 끊겼고요

빠꾸

 

삼양3동포구중 옛 방조제

 

새각시물

 

 

 

 

내모습 한번 보고.....

오다 말다 하는 비에 푹 젖어서 추리합니다.

 

로터리 클럽에서 지어 기증한 사랑의 집

좋은 일은 소문도 많이 내시고 많이 하세요.

 

원담의 흔적

 

 

문간 한쪽에 소를 기르던 제주의 전형적 가옥

 

 

몰방아터

 

스마일 삼양

 

코스를 살짝 벋어나 전통가옥쪽으로 가는 길

그 길가 노거수

 

먼저 안내판을 보고

 

실례합니다 크게 소리지르고

다가가 봅니다.

 

사람이 사는 곳 같은 데..

그 누구의 대답도 없습니다.

 

안내와 소개를 기대할 수 없으니..

외부사진 몇장만 찍겠습니다.

 

 

 

다시 코스로 돌아왔습니다.

 

검은 모래

 

텅 빈 바다

 

삼양수원지 담벽을 따라서

 

해변으로 다가갑니다.

 

올 때마다 모래사장의 폭과 길이가 줄어드는 듯 합니다.

모래가 검은색이라서 태양열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흰색 모래에 비해 온도가 높아 모래찜질에 적합할 겁니다.
그래서 신경통·관절염·비만증·피부염·감기예방·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하여

한여름에는 모래찜질을 하려고 사람들이 붐비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세상이 변해서 왠지 촌스럽게 보이고 또 해변이 좁아지니 거치적거리는 것 같아서 요새는 별로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네요.
그래도 여름이면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구역을 정해놓고 찜질손님을 받을 준비를 하지요.
그리고 검은모래축제도 한답니다.

놀러오세요.

 

관광객용 산책로를 걸어 서흘포(설개)포구로 갑니다.

 

설개포구

 

동카름성창이라고 하지요.

 

 

셋다리물통입니다.

 

셋다리물통은 용도에 따라 음용수통, 남자목욕탕, 여자목욕탕, 빨래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자목욕탕 입구에 있는 음용수통은 상수도 보급이전까지 주민들의 젖줄이 되었지요.

지금도 당시 주민들이 이 물을 길면서 이용했던 물팡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습니다만...

가까이 기웃거리면 오해 받을 수 있으니 이정도에서 꾹.

 

남자목욕탕

 

여기는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창개수기념비


동네 유지들 이름은 여기 다 있습니다.

 

포구입구를 통해 앞바다를 바라보다 몸을 돌립니다.

 

물머리엉덕 물통

 

 

엉덕웃밧 삼양1동 본향당

강남하르방과 할망을 모십니다.
외래계 해신으로 고기 잡는 어부들을 수호하시면서 마을을 차지한 신당한집입니다.
예전에는 7월 14일 백중날 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생기 맞는 날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원당봉쪽으로 올라가는 길

시내버스가 서 있습니다.

 

잠시망설이다가

내리는 비와 더이상 싸우기 싫어 버스에 올라탑니다.

푹젖은 생쥐 한마리

기사아저씨 희안한듯 쳐다봅니다.


22일의 기록을 마칩니다.

 

다시 23일 늦은 오후입니다.

봉개민오름을 오르내리고

교래일대 곶자왈지역을 헤치고 다닌

곶자왈정기탑사를 마치고

어제의 빠꾸지점으로 와서

다시 출발합니다.

 

원당봉기슭

 불탑사, 문강사, 원당사 그리고 불탑사오층석탑 표지판

 

불탑사오층석탑에 대한 안내.

정확히 말하면 불탑사 원당사지오층석탑이 되겠네요.
지금의 불탑사가 있는 곳이 예전에 원당사이었는데 그 당시에 세워진 탑.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언젯적까지 사용되었을지 모르는 건너편 계단을 흘끗 보고

원당봉을 향해 오르다가 원당사로 갑니다.

 

삼거리옆 보리밭에서 잠시망서립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원당봉한바퀴는 돌아줘야 하는 것 아닐까?

다른 때 같으면야 당연히 한바퀴 돌고 내려오겠지만

이시간까지 오름과 함몰지역등을 뱅뱅돌다 왔습니다.

 

원당봉이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옛날에는 이 마을사람도 나 원당봉을 싫어 하더만
지금은 올레길도 비껴가는구나.

많은 사람 오는 것도 싫지만 아예 제껴버리니 너무 섭섭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마을의 원래이름은 높이 솟아있는 산기슭에 해안선을 따라 호미모양으로 형성된 갯마을이라 하여

설개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자연지형에 비해 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마을 동쪽 원당봉이 높이 솟아 마을에 큰 인물이 배출치 못할 뿐 아니라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하자 약 백 년 전에 동네 지명을 바꾸기로 합니다.

당시 문장 어르신들이 둘러 앉아 이름을 짓습니다.

설개, 감을개(지금의 삼양2동), 梅村(지금의 도련2동) 세 마을이 합해져 한마을을 이루었다하여 삼(三)을 따고

중양(重陽)의 陽자를 合해서 三陽이라 호칭 했다고 마을지에는 쓰여 있습니다만 와전일겁니다.


 

원당봉은 명산입니다.
주봉인 171미터의 웬당오름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서나북이, 앞오롬, 펜안오름이 이어져 동과 서에서 삼첩칠봉의 형세를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삼첩의 삼을 따고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양을 붙여 마을이름을 삼양이라 하였을 겁니다.

 

몇일후 다시 원당봉 삼첩칠봉을 찬찬히 돌아보기로 하고

원당사로 갑니다.

 

옛 원당사가 아니고 지금의 원당사

태고종 사찰입니다.

재작년 가을인가 한림 월계사 진공스님을 모셔 탱화와 단청을 새로 고치고 있을 때 와보고 꽤 오랜만입니다.

 

관음보살에게 가피를 빌어보시고

관음보살의  대광명이 비추일때
육도윤회 생사문이 부서지고
삼십이응 화연신을 널리 나투사
화택중생 누구나 구해주십니다.

 

사천왕문이 닫혀 있어  거꾸로 다가가게 되니 많이 이상합니다. 

 

 

 

불탑사

옛 원당사 자리에 새로이 지어졌다는 절이지요.

 

사천왕문으로 들어오며

 

삿된 생각을 떨구고

 

절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제주도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고 사찰은 어느 때부터 건립되었는지에 대해 전해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에 의하면

 476년에 탐라의 왕은 백제의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치고 은솔의 관직을 하사받았으며,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에 대해 왕이 직접 친정을 실시하려 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럼 백제와 일정부분 교류를 하였다는 건데 교류가 있으면 문화가 넘어온다고 볼 때

당시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에서 전래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탐라의 지배층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일정하게 불교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사서인 구당서에서 ‘오직 귀신만 섬긴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사는 행해지지 않은 듯 합니다.

그 후 당에 조공사를 보내고(661년), 태산의 봉선의식에 참가하였다(665년)는 기록을 보아

660년대 이후 어느 시기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완전히 신라에 예속되던 문무왕 19년(679) 이후

신라의 영향으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주에서 불교의 흔적이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정종 원년(1034)  불교행사인 팔관회에 참석하였고

문종 11년(1057) 육지부의 사찰 창건을 위한 벌목과 조영에 탐라민이 동원되었다고 하고

고려 충렬왕(1275-1308년) 때 활동한 혜일 스님은 제주도내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등에 대한 찬시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충혜왕 4년(1343)에는 王師를 역임한 흑선, 충목왕 4년(1348) 승려 宗範이 탐라에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각종 기록에 의해 고려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3대 사찰로 法華寺(현 서귀포시 하원동)와

水精寺(현 제주시 외도동 도근천 부근),

등이 정리됩니다.

그런데 제주의 모든 사찰은 조선중기에 다 폐사됩니다.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강력한 당신앙에 의해 당으로 전부 습합된 것이라 보는 게 더 타당할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당에서 모시는 신명에서 시님제석, 천신불도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의 진종계열 사찰이 지어졌는데도 결국 얼마못가 폐사하고 맙니다.
하여간 1908년 안봉려관이라는 여심방이 토굴에서 개남보살을 모시고 수행하다 스님이 되어

관음사를 창설한 후 몇 곳 옛 사찰자리에 절집을 지어 육지부 스님을 모시면서

 제주도의 불교는 다시 시작됩니다.


이곳 불탑사도 원당사자리에 안봉려관스님이 1914년에 세우신 겁니다.

원당사라 하여 그 전설이 만들어 졌는지 는 모르지만
1333년에 14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1340년에 원제국의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고려의 여인 기왕후가 지은 절이라 합니다.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어

천하의 이름난 풍수들을 동원해 찾게 하였답니다.

여기에 고려 풍수사들도 동원됐는데, 마침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바라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기황후는 사신을 보내 오층탑을 쌓게 하고 극진한 기도를 올리게 했다네요. 이

곳이 바로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있는 오층석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현무암제오층석탑(보물 1187호)

통상 절의 석탑은 산세를 기준으로 세워집니다만 

이 탑은 북극성을 향하도록 세워져 별의 기운을 받으려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이야기는 이 절집에서도 재미있는 전설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안내판이 몇 개 있는데 읽어보시면

원당사지 오층석탑의 기원과 관련해 원나라 기황후가 태자를 얻기 위해 원당사를 짓고 오층석탑을 세웠다는 주장이 서로 연대가 맞지 않습니다.

아마도 불탑사 지을 당시 요사채정도로 쓰였을 건물을 돌아 나와 올레길로 접어듭니다.

 

밭올레를 따라 갑니다.

웅덩이가  지저분하지요.

1960년 이전까지는 중산간 사람들은 이런 물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이렇게 더럽지는 않았겠지만 중산간지역에서는 용천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물이 고이는 봉천수도 엄청 귀했습니다.

 

도꼬마리는 아니고 나름 그럴듯해 보여 한 장 꾹

 

등대풀꽃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한줄기 빛처럼 꽃 그 자체는 너무 작아서 보이질 않지만 그 주변 모두가 환하게 밝아집니다.
하지만 꽃말은 애잔합니다. 냉혹한 당신으로 인해 나는 굳어집니다.

 

누군가의 냉혹함 때문이 아니고

계속된 산행의 피로로 내다리도 굳어졌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렵니다.

Niccolo Paganini
Sonatafor violin & guitar, op 2 [MS26]
1.Minuetto,Adagio
2.Polenese, Quasi All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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