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개장한 제주 올레 18코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사진은 4월 22일 오전과 23일의 늦은 오후입니다.
12코스개장행사 이후로는 개장당일에는 함께 가지 않고 그 다음날 걸어보곤 했는데...
24일에 다른 선약이 있고 그 다음주에도 휴일을 보장할 수 없어서
22일에 미리 걸어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옵니다.
코스를 한번 볼까요?
산지천마당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 18.8㎞
제주권 최고 경관이라고 올레이사장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은 반만 믿으세요.
서이사장에게 제주 어디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동문로타리에서 버스를 내려 해병혼탑을 바라봅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주력인 제주출신 해병대원들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스러져간 모든 넋을 추념하고자 영구불멸 상징의 탑으로 1960년 4월 15일 그들의 고향 한라록에 세운 기념비입니다.
비문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여기
탐라의 「푸른 넑」이 엉켜
탑이 되다
갈리운 땅덩이 위에
통일의 횟불을 높이든
해병혼은 솟았나니
평화를 염원하는
상 앞에
겨레여
옷깃을 여미이시라"
길을 건너 산지천마당
간세가 머리를 들어 가야할 방향을 일러줍니다.
산지천
한라산 관음사남쪽에서 발원하여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갑니다.
산지천은 한 때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나는 하천으로 유명했습니다.
산지천 주변에서 용출하는 용천수, 산짓물, 금산물, 지장깍물 등의 용천수들은
제주시에 상수도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까지
많은 제주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었습니다.
18코스 시작점 표시
천변을 따라 내려갑니다.
이 하천은 1966년에 복개하였던 곳입니다.
다행히 1996년부터 약 6년 동안 총 사업비 365억 원을 들여 정비함으로써 생태 하천으로 거듭났지요.
천변에 심어진 원예종 꽃.
참 흔하게 심는데 이름이 생각않나네요.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할텐데...
조천석과 조천석표지
사진을 이상하게 찍었습니다.
내리는 비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봅니다.
산지천은 과거에 산짓내(山地川), 산젓내(山低川) 또는 가락천(嘉樂川)이라고도 불려 왔으며,
제주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고문헌에도 많이 등장하는 하천 중 하나입니다.
특히 이구간은 조선 시대 때 제주목의 읍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산지천의 하류 구간은 최초의 읍성 축성 과정에서는 성 밖에 있었으나
유사시 식수 조달이 어렵다고 하여 이 천을 포함하여 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자주 범람해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방법뿐이지요.
경천암이라는 바위위에 조천석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
현무암으로 제작된 조천석은 본래 산지천 광제교 옆 자연암 위에 세워져있었는데,
하천을 복개할 당시 매몰되기 직전 제주대학교 박물관 입구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이곳에 있는 것은 하천을 복원하면서 2002년에 새롭게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광제교.
복개공사때 함께 없어진 다리.
복원시 만들어 세웠습니다.
人品甚高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는 중국 옛글이 있습니다.
굳이 풀어 말하면 사람의 품성이 깊고 고상하면 가슴 속에 품은 뜻이 맑아서 화창한 날의 바람과 비개인 날의 달빛과 같다는 뜻이지요.
여기에서 光霽를 따온 걸로 아는데 廣濟院도 없는데 廣濟橋라고 하네요.
서울 청계천 廣濟橋는 복원되지 못했는데 이곳은 복원되었으니 다행이다 해야지요.
길 건너 보이는 일제강점기때 신사가 있던 자리
옛 제주목 동문에서 북쪽으로 쌓은 성의 흔적
북성교 밑 산짓물. 옛 빨래터의 흔적
내려가 보고
틈새로 카메라를 넣어 철문 닫힌 안쪽의 모습도 보고..
설명도 보고...
산지천 끝자락 덩그러이 서있는 중국 피난선, 해양호.
1948년 중국 國共내전당시
공산당에게 탄압대상이 되었던 중국 요녕성 장하현의 한 지주가족과 친족 등 중국인 50여명이
자신들의 배를 타고 석승도를 출발하여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허가가 내리지 않아 선상에서 2년여 생활하다가 6.25전쟁으로 부산 쪽으로 피난했으나
완도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배의 일부가 파손되고 몇 사람이 사망합니다.
좌초직전에 천만다행으로 군함에 구조, 예인되어 제주도에 정박을 하게 되었고
이때 생존자는 22명이었다고 하네요.
제주항에 배를 정박한 후 가져온 밀가루로 꽈배기를 만들어 팔아 식량을 구하기도 하고,
부두근처에서 버려진 야채를 얻어다 먹으며 연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생활 8년을 지내고야 제주도에 상륙하여 거주할 수 있었다 하니 그 간난신고가 이루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후손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리고 이배를 여기에 복원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 괄시해서 미안하다는 의미일까요?
외로이 흐느끼며 혼자 서있는 싸늘한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
짝을 지어 놀던 님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
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며 울고 있나,
아~아~
떠난 님은... 떠난 님은 못 오는데..,
하춘화가 부른 물새한마리
나도 슬슬 애상에 빠져들면서 옛 노래가 생각나는 것을 보니 늙어가는구나...
올레사인따라 길을 건너
루트를 살짝 벋어납니다.
제주최초의 공산품생산시설인 단추공장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의 제주항이 들어서 있는 이곳 건입동은
지금의 제주항 안쪽에 있던 옛포구가 바다 입출항의 포구로서
오래전부터 제주 사람들에게 이용되기 시작하며
외부와의 교역에 있어 대표적인 포구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을나의 15대손 고후, 고청 등 3형제가 신라에 가서 많은 비단과 보물을 받고 돌아올 때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온 개의 어귀라 해서 건들개란 이름이 붙여졌다 하고
후에 건들개를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한 이두식 표기로
건입포(巾入浦) 또는 건입포(健入浦)로 표기하다가 健入洞이 된 거랍니다.
마을 문장이라는 분은 건방(乾方)에서 맥(脈)이 들어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니다만...
하여간 일제강점기에 건입포의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과정에 각종 산업시설이 이 부근에 생겨납니다.
이 단추공장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당시에는 안내판에 쓰여 진대로 제주근대제조업의 효시였던 거지요.
뒷 건물은 복지회관으로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만
1층은 금산물을 이용한 목욕탕이고 2층은 건입동 박물관입니다.
건물옆 금산물에서 빨래하는 할머니
뒷쪽 절개된 벼랑이 예전의 금산입니다.
설명문을 한번 읽어 보시지요
박태기나무사이로 보이는 금산유허비표석
변전소 서쪽 울타리옆
제주최초의 발전소터와 그 열을 이용하여 온수목욕을 즐긴 목욕탕터 표지
변전소북쪽 대문옆
어렵게 번 만석재산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했다는 김만덕의 객주집터표석.
객주를 운영하면서 제주도 물품과 육지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그 부를 계속되는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내는데 쾌척하였다합니다.
부를 이루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상인을 패가망신에 이르게 했다는 심노숭의 기록과
기녀시절의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 행태가 배비장전의 무대를 제주로 삼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합니다만
개인적 부를 사회에 환원한 행위는 칭찬받아 마땅하지요.
앞에 있는 표지는 허벅만들던 곳이라는 표지
김만덕 객주집터표지는 변전소 건물앞 대문옆에 있어요.
옛 건입포 부두자리, 그리고 이런저런 유물이 나왔던 곳이라는 표석
이 자리 뒷쪽으로 김만덕객주터를 재현하겠답니다.
김만덕이 장사했던 객주터 복원 사업은 문화재 지정을 목표로
4000여㎡의 부지에 여관, 주막 등 당시의 건물과 거리 등을 재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고 합니다만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이자리가 말그대로의 옛터이냐는 것인데
지금 객주집터표지가 붙어 있는 곳도 그렇고
객주터를 재현하겠다는 곳도 1920년도 이후에 매립한 곳이랍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하천이나 바다였다는 건데
그냥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몰라도 문화재지정이라는 말은 삼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개발이 진행 중인 산지마을
이젠 살던 곳 떠나 어디론가로 이주하셔야 할 겁니다.
담, 담쟁이, 어울리지 않는 고비.
담, 담쟁이, 올레사인. 이건 어울림니다.
주정공장터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 제주항 근처에 건립하여 운영하였던 주정(酒精) 공장입니다.
1943년 완공한 주정 제조 공장인데
일본 전역에 주정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동양 제일의 시설 규모라고 자랑하였던 곳입니다.
현재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고 합니다.
그 옆에 취수탐을 세워 주정공장으로 물을 송수했습니다.
제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 설탕, 강냉이 등을 가지고 주정을 제조하여 술만드는데 공급하면서
군사용 비행기의 연료로도 보급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것인데,
이때부터 제주 지역 농가에서는 얇게 썰어 볕에 말린 절간(切干) 고구마 생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방 후 주정공장에 보관된 절간고구마를 배급하여 도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 있던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력도 보급하는 등 순기능을 하였지만...
1948년 군부대에서 주정공장을 접수하여 무기를 제조하는 조병창(造兵敞) 시설로 이용하였습니다.
4·3 발발 이후 농업학교에 이어
1949년부터 수용소로 쓰이기 시작하여 참으로 많은 피와 눈물이 뿌려진 곳입니다.
1951년 1월 개인에게 불하된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1983년 조업이 완전히 중단됨에 따라 1989년 5월 12일 공장의 상징인 굴뚝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공장 대지 일부에 창고가 들어섰고 고구마 저장 창고가 있던 부지에는 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주인은 계속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4.3 희생자유족호에서 세운 주정공장터 표지석
주정공장터 내부 동굴
동에서 세운 주정공장터 표지석
루트를 이탈 길을 건너...
제주항입니다.
연안여객터미널
2003년에 약 130억을 들여 새로 지으면서
제주도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전통가옥, 갈매기, 파도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해 Land Mark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는데
어디서 봐야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간 800만 명이 이용가능하답니다.
많이 이용해주세요.
양중해, 떠나가는 배.
저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임 실은 저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변훈의 작곡으로 노래가 널리 알려졌지요.
명가사에 명곡입니다.
가사를 토닥거리는데 아무 이유없이 심정이 아득하고도 절실합니다.
여객선 터미널 건너 루트로 복귀하여 해남촌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갑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먹고살기 힘든 고향을 떠나
당시 부두축조공사를 대대적으로 하던 이곳 제주로 들어와
일용직으로 먹고살던 전라도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해남촌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대다수 해남촌 주민들은 일도2동에 있는 신산모루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고
남았던 분들도 제주 사회에 적응하며,
경제적인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해남촌을 벗어나 다양한 지역으로 분산되어 갔습니다.
지금은 다 떠나고 재개발을 기다립니다.
예전에 칠머리당이 있었다는 표지입니다.
여기도 애초의 자리는 아니지요.
서쪽 지금의 현대아파트가 있는 구름곶이라는 동산주변을 개발한다해서 이곳 부두터미널 부근 칠머리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여기도 산지항(지금의 제주항)공사로 산이 깎이는 바람에
칠머리는 없어져 도로가 되었고 당은 사라봉뒤로 옮겨졌습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폭낭.
이모든 들고나는 일들을 다 보셨을 것이고,
어쩌면 다 부질없이 번잡만 하구나라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동대마을길을 지나갑니다.
마을 동쪽에 큰 머들이 많이 있다해서 동대머들이었습니다만
머들들이 다 깎여 나가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동대마을이라 합니다.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제주항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제1부두에서 제7부두까지 그리고 서부두 등 총 8개의 부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입포는 1920년 조선총독부령 제41호에 의거
서귀포항 및 성산포항 등과 함께 2등급에 해당하는 지정항이 됩니다.
1926년에 방파제 축조 공사가 시작되어 3여 년간의 공사로 1929년에 서방파제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산지항이라 일컬어지는 한편,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항만이 되었지요.
1968년 명칭이 제주항으로 바뀌면서 무역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 제주항 종합 개발 계획이 확정되면서 제주항의 정비,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주도 관문항으로서 종합 기능을 확보하고 국제 규모의 관광 지원 항만으로 개발한다고 하여 항상 공사중입니다.
도로를 건너 사라봉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올레사인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라네요.
등대 옆으로 해서 별도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사라봉 꼭대기를 보여주겠다는 거지요.
한참을 돌아야 겠네요.
밭주인이 돌가지고 자기 의사를 밝힙니다.
탁라 건입상동
健入洞이 아니고 巾入洞이라는 거지요.
제주의 마을이름이나 지명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하는 분을 만나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검증된 사료 없이
이렇게 저렇게 달리 기록된 조선시대 한문지명의 해석이
음이냐? 뜻이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론 없이 감정싸움이 됩니다.
사라봉 오르기 직전 올레길 왼쪽으로 보이는 건입동 포제당입니다.
통상 제주에서는 민속신앙으로 두 가지 상이한 형태가 한마을에 공존합니다.
여성들이 주로 관여하고 심방이 주도하는 무속적 형태를 띠는 당굿과
남성들만이 지내는 유교식 제의라고 하는 포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포제는 제의만 유교식입니다.
재앙을 내리는 신령을 달래는 신앙이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 것이지
유교의 의례는 아닌 것입니다만
어르신들이 유교행사라 알고 그리 행하니 할말은 없습니다만...
하여간 흔히 마을제라고 불리어지고 제주도 각지에서 올리고 있는데
이곳 건입동에서도 해마다 마을 주민의 강녕과 행복, 융성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건입동 포제는 해방직전부터 올리기 시작했는데
해방 때까지는 아까 지나온 금산 동편 언덕제단에서 지냈고
그 후 동사무소와 노인당에서 지내다가 1997년부터 이곳에서 지냅니다.
이 건물은 1974년 지어져서 국가유공자 위패 봉안 및 위령제를 행하던 낙천당으로 쓰이던 곳인데
그 후 충혼각으로 쓰이다가
1991년부터 노인당으로 사용하였으며
1997년부터 건입동 마을회에서 관리하며 포제당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곳 포제에서는 세신위를 모십니다.
다른 마을은 통상 두신위를 모시지요.
포신과 토신
그런데 이곳은 가신까지 붙여서 세신위를 모십니다.
사라봉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꼭 이런 계단은 몇 개인가를 세는 분이 계시던데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계단옆 진지동굴
패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일본군이
어떻게든 일본본토를 사수하고자
미군이 공격해 올수 있는 접근로를 분석, 일곱곳을 선정합니다.
그 중 한곳에 제주도가 포함됩니다.
1945년 3월, 제주에 58군사령부를 창설하고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흩어져 있던 일본군을 집결시키고
최후의 일전에 대비해 모든 사람을 동원 진지를 구축합니다.
그때 구축된 진지동굴로 제주도에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113곳 344개 땅굴 진지중 한곳입니다.
사라봉에는 이곳을 포함 7개의 사각, 또는 반원형의 갱도와 동굴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갱도는 ㅡ자형과 T자형·ㄱ자형 등이며,
입구가 대부분 2개로 되어 있어 유사시 다른 통로를 통해 대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는 벚꽃
여인네들의 노리개인 괴불을 담는 주머니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괴불주머니
산책로로 올라왔습니다.
장딸기
내려다 본 제주항
정상부근
공원표지석
사봉낙조표지판
사봉낙조
이곳 사라봉에서 보는 석양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영주십경중 한구
이 표지판 있는 자리가 사라봉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한표.
망양정이라 이름 지어진 정자
정자 이름에 맞게 바다를 봐야하는데 부두를 보고
구름에 덮인 한라산혈망봉과 그 우측에 시립한 오름들을 보고
별도봉과 삼양동의 원당봉을 봅니다.
사라봉수
제주의 관방시설로 3성, 9진, 25봉수, 38연대를 이야기 합니다.
그중 제주도내 각 봉수에서 보내온 군사통신정보를 모아서 제주목관아에 전달한
가장 중요한 봉수대로 서울 남산(목멱산)에 위치한 경봉수의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원모습은 어디를 가고
위치도 애매한 곳에
1987년에 연대의 모습으로 바뀌어 다시 쌓아졌습니다.
진지동굴
일본군은 진지의 성격에 따라 전진 거점, 주저항 진지, 복곽 진지, 위장 진지 등을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이 중 전진 거점은 주저항 진지 전방에서 소규모 부대가 적의 공격을 1차 저지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사라봉에 구축한 갱도는 일본군이 작성한 제58군배비개견도 등의 지도에 전진 거점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일본군 제96사단 예하부대가 배치되어 산지축항(현재의 제주항)과
정드르비행장(현 제주시 제주국제공항)을 경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또 다른 입구 또는 출구
사라봉 진지동굴 내부의 높이는 사람이 약간 구부린 정도로 통행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똑바로 서서 움직일 수 있는 정도까지 다양하며, 갱도의 길이는 11~60m 정도입니다.
이굴로 들어가면 여기서 부터 북동쪽 기슭으로 나오게 됩니다.
동굴입구 옆에 피어난 미나리아재비
좌우에 벚꽃이 늦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아 한쪽은 개나리꽃이군요.
나도 좀 봐줘요. 장딸기군락
칠머리당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칠머리에 있던 당이 옮겨진 곳입니다.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인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의 영등송별대제로 인해 많이 유명해진 곳이지요.
이당에서 모시는 신위는 여섯 분입니다.
본향당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부인,
그리고 외방신인 영등대왕과 해신선왕,
남당하르방과 남당할망이 함께 좌정해 계십니다.
본향당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은 마을 전체의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주관하고,
부인인 요왕부인은 어부와 해녀의 생업, 그리고 외지에 나가 있는 주민들을 수호해 줍니다.
내방신인 영등대왕(영등할망)은 외눈백이섬 또는 강남천자국에서 2월 1일에 제주도에 들어와 어업에 풍요를 주고,
특히 바닷가를 돌아가며 해녀 채취물의 씨를 뿌려주어 풍요를 준 뒤 2월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해신선왕은 풍어와 해상안전을 주관하십니다.
남당하르방은 풍농과 집안수호 남당할망은 산육과 치병을 주관하십니다.
제주의 거의 모든 어촌에 영등신앙이 있고 규모는 간소하지만 영등맞이굿을 하는 곳도 몇곳 있습니다.
영등송별제는 원래 수근포구에 있는 다끄네해신당에서 가장 성대하게 하였으나
마을이 폐촌 되면서 이곳 칠머리당으로 보내게 된 것이고
이곳 건입동에서도 처음에는 본향당제와 영등제를 따로 지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향당제와 영등제가 합쳐졌을 것이고
영등제중에서도 영등환영제는 간소하게 하고
2월 14일 이곳을 통해 제주본섬을 나가서 15일에 우도를 들렀다 돌아간다는 설화에 맞추어
송별제가 더 커지게 된 듯 합니다.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지만
참 지원이 박하고 지금 지정되어 있는 김윤수 심방으로부터 10년 넘게 전수받고 있는 정공칠씨를 비롯한
전수자들에 대한 관심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속이라고 타기하시는 분도 많은데
무속이라기보다는 민속이라고 보시면 되고
특히 제주의 민속신앙은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고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론적 삶을 꿈꾸어온 것입니다.
당에서 내려와 공사하는 이들의 해상안전을 기원하고
별도봉 북쪽 사면에 동서로 연결된 산책로를 걷습니다.
염주괴불주머니
애기업개돌과 속칭 자살바위가 보입니다.
뒤돌아 등대를 보고
다시 고래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해식동굴이라는 고래굴을 봅니다.
위로 보고
아래로 보고
보고
또보고
뒤돌아보고
애기업개돌
포대에 업힌 아이의 볼을 비비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그렇게 키웠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화북동과 삼양동 그리고 원당봉이 보입니다.
미나리아재비가 말을 거네요.
나랑 이야기 하면서 좀 쉬었다 가요.
예,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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