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화성행궁

하늘타리. 2011. 2. 19. 23:00

화성행궁

"정조가 현륭원에 展拜하기 위하여 幸行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府衙로 활용하였다."

 

정조에 대해 나쁘게 쓰는 사람이 없어요.
그 아버지 사도세자의 슬픈 죽음과 그 아들의 지극한 효행이라할 능행
그리고 그어머니에 대한 극진함
이것이 삼박자가 되어 그가 한 일 모든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있지요.

 

하지만 한꺼풀 두꺼풀 헤집고 들어가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점이 있어요.

 

그중 하나..
영조가 사도세자까지 희생해가며 겨우 만들어 놓은 권력의 분점관계를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전부 깨 부셔 놓은 것은 너무 아쉽습니다.

권력의 분점관계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할까요?
조선의 정치는 공론정치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세력이 권력을 잡고 농단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을 분점한 사림들의 여론으로 나라가 이끌어져 가는 식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분점한 세력들이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당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지만

절대 강자가 없는 속에서 상대적 다수그룹이 상대적 소수그룹의 견제를 받아가며

나름 국리민복을 위한 시책을 수립,

그 명분으로 왕을 업고 정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조의 강력한 왕권강화책이 이 공론정치를 파괴합니다.
정조실록을 토대로 보면

정조 재위 20년이 지난 다음에 고위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대관과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는 臺諫이

그 이전 년간 평균 30~40여회에서 1~5건으로 급격하게 감소하고

탄핵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세력의 잘못을 지적할 또 다른 세력도 없고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어본들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는 거지요.

정조는 아예 목소리를 못내게 합니다.
영조의 탕평에 대비해서 蕩盡을 한거지요.
즉위하자 마자 즉위를 방해했던 鄭厚謙·洪麟漢·洪相簡·尹養老 등을 제거하고

그 다음해에는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홍국영마저 축출합니다.
북학파를 중용했다 합니다만 채제공과 정약용도 끝까지 지켜주질 않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정조는 모두 163건의 금령을 내리는데

대다수가 특정 사안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정조는 천주교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서학식으로 치룬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하여 사형시킴으로써

천주교 박해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바로 정조이고

이에 더하여 혹시나 천주교서적이 반입될까봐

 아예 청에서 발간된 책은 아예 들여오질 못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자기만 옳다고 하고  공론정치 체제를 형해화시켜버린 정조가 떠난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대표로 하는 세력에게 그 권력이 모두 넘어가 버립니다.

결국 조선의 망국으로 이어져 갑니다.


각설하고 행궁 그 자체만 봅니다.
들어가시지요.

 

중양문입니다.

상세정보..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봉수당

상세정보..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봉수당의 좌우 회랑

 

 

 

 

 

혜경궁 회갑연때 혜경궁홍씨에게 인사드리는 정조부부의 모습

 

정조는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마치고 70수연(壽宴)도 이곳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고 합니다.

 경룡관

상세정보..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장락당

상세정보..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나인과 궁녀가 거처하는 곳

 

 낙남헌

 상세정보..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화령전 안내판

전사청, 운한각 그리고 이안청을 합쳐서 화령전이라 합니다.

화령전은 1801년 정조의 유언으로 화성 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입니다.

영전은 돌아가신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모시는 곳이니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전사청 

 

운한각

 정조의 초상화

 

운한각에서 비상시 영정을 이동하는 회랑

지붕이 되어있네요.

복도의 끝이 이안청입니다.

이안청은 정전에 모신 초상화를 옮겨야 할 사정이 생겼을 경우에 초상화를 옮겨 모시는 건물입니다.

 제정

제사때 쓸 물을 받는 곳(목책친 부분)

 득중정앞 활터

 내포사

 일종의 경계초소로

누군가 접근하면 전면에 걸려있는 목어를 두들겨 경보를 발한답니다.

 미로한정

나중에 늙으면 한가하게 쉴곳이라는 이름이네요.

 

 미로한정에서 내려왔으니 복내당일겁니다만..

 여기도 장금이

 복내당

 상세정보..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어문

 향춘문

 유여택

 

 

 

상세정보..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뒤주를 가져다 놓고 체험하랍니다.

돈 줘도 싫다..

 

 서리청

상세정보..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층헌에 보관중인 악기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는 집사청

옛 관복입은 인형을 전시하고 있는데

마루를 올라가지 못하게 하니 멀리서 사진으로만 꾹 

 

한바퀴 돈 소감을 말씀하시지요!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만

이 건물에서 한 것은 능행의 휴식과

혜경궁홍씨의 회갑연뿐이 없지 않습니까?

 단지 반대를 무릅쓰고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없고

또 무엇이 군사적 의미인지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예! 우야든둥 감사합니다.

Rachmaninov / Symphony No.2 in E minor Op.27

 


1악장 (Largo-Allegro Moder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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