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수원 화성 1

하늘타리. 2011. 2. 18. 23:00

화성입니다.

 

수원시청에서 남쪽으로 7~8km 떨어진

 지금의 화성군 태안면 화산(花山) 아래 당시의 수원부로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만든 성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신도시지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되었을까요?
뭐 그때나 지금이나 신도시를 만들면 원래 살던 사람들은 떠돌이가 되고

신도시에 살 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드니

아마도 그때도 당연히 대토를 해주었거나 제대로 된 보상 이런 것은 없이 무조건 옮겨라 했을거라 생각됩니다만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거라 예상했는지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 244호,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었다고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하여간 화성이라 이름 하고 새로운 성을 쌓습니다.
임금이 직접 지시했고 축조간 계속 큰 관심을 가졌으니

 제대로 지었습니다.

 

먼저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행길에 한강을 건널 때 배와 널빤지를 이용한 배다리를 만들어

수백명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정약용에게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든 백과사전 도서집성과 스위스인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요한 테렌츠가 지은 기기도설을 건네주며

도서집성을 보고 공부하여 성곽을 설계토록 하고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장치가 그림과 함게 실려 있는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필요한 도구를 개발케 합니다.
대략적인 설계가 이루어 지고 성화주략을 완성하자

그 당시 정조가 가장 신임하던 남인의 영수 체재공에게 성역의 총지휘를 맡기고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 감독토록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벽돌과 성벽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기존에 볼 수 없던 방법을 이용해 성곽을 만들었고

특히 기기도설을 참고해 개발한 활차와 거중기를 매우 쓸모있게 사용했다고 합니다.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수원화성운영재단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합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보물 제 1709호) 등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하여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창룡문에서 부터 걷기 시작합니다.

 

동북공심돈을 멀리서 보고

 

 창룡문으로 갑니다.

 

설명문이 잘 않보이네요

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하고 성의 동문입니다.

 

 

 

 

 

 

 

창룡문 축조시 책임관의 이름

 

 

 

 

 


창룡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가다가 역광을 이유로 몸을돌려  빠꾸합니다.

 

동장대를 한번 보고

이제부터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성을 돕니다.

 

동일치

창룡문을 다시 지나

동북노대

 

건물과 성 그 자체의 설명은 같이 찍은 해설판을 참고하시고

성으로서의 군사적 기능을 충분히 살리면서

건물과 성곽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굴곡의 선과

서로간의 조화와 합일을 주목하면서 걸으시면

아주 아주 행복하실겁니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데 높이 5척, 위 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 놓았다.

아래 층 안 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다." 고 설명합니다.

 

동장대로 가는 길에

뒤돌아본 동북공심돈

 

 

 

 

 

 

 

 

 

 

 

 

 

 

 

 

 

동북포루쪽으로 갑니다.

동북포루 못미처 동암문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동북포루

 

 

 

북암문 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 비각

 

 

다시 북암문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이 아름다운 곳을 그냥 지나긴 미안하지요.

쉬었다 갑니다.

Beethoven
Piano Sonata No.30 in E Major - Op.109


1. Vivace, ma non troppo - Adagio espressivo - Tempo I   04'21
2. Prestissimo  02'41
3.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15'15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


Daniel Barenboim,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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