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가는 아이처럼 너무 일찍 서둘렀습니다.
해도 않떴는데 길을 나서서 어슴프레한 새벽길을 걷습니다.
화성행궁앞입니다.
입장료생각을 않했습니다.
얼마냐가 아니고 입장료를 받으니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게 당연하니
이시간에 문을 열어 두었을 리가 없는데
이 추운 새벽에 바보처럼..바보처럼..
입구부분 몇장을 찍고
길건너편 여민각이라는 종각앞을 지나
화성박물관앞을 지나
창룡문쪽으로 갑니다.
어제 출발한 창룡문에서 어제의 반대방향으로 돌아
화서문 쪽으로 가려고요.
화성박물관 야외 전시장입니다.
수원중동사거리를 비롯한
곳곳에 산재되어 있던
옛 수원유수들의 선정비 10기를 이곳으로 모하두었답니다.
정약용이 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해 사용한 거중기 등의 기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복원이지요.
유형거
거중기
바퀴가 있는게 동차
정종대왕태실
영월계족산 자락 영월화력발전소 뒷산에 있던 것이 일제때 창경궁으로 옮겨졌다가
1997년 다시 그 부근 정양산성 올라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는 태실의 모형일 겁니다만...
설명문이 어디 있을텐데..
그리고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정조가 돌아가시고 붙힌 묘호는 정종이었지요.
뒷날에 격을 높여 정조라 하였습니다.
통상 하는 말로 창업이나 국난을 이겨낸 공이 있는 임금에겐 조를,
덕으로 나라를 잘 다스린 임금에겐 종을 붙인다고 하지만
정조시기에 창업이나 국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종을 조로 바꾸었다는 것은
그럼 조와 종이 그 위계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되는것 같네요.
창룡문으로 와서 어제 빠꾸한 지점
동일치에 왔습니다.
동일포루쪽을 돌아보고
동포루로 갑니다.
동이치
동쪽의 두번째 치라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꿩(雉)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하는 까닭에 그 모양에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사족..
치 위에 집을 지은 것을 포(鋪).
집을 지으면서 가운데를 비우고 벽을 친 것을 돈(墩).
위에 노수(弩手)를 매복시키는 곳을 노대라고 합니다.
봉돈
아침부터 짜증이 납니다.
문이 있는 것은 거의 다 문을 막아놓아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옆 외벽에 기대어 어렵게 사진한장을 찍습니다.
동이포루
동삼치
이제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동남각루
성이 끊어져 있는 자리로 해서
수원시장 옆으로 내려 왔습니다
팔달문
공사중입니다.
이제부터는 팔달산 산행을 겸하여
서장대를 향해서 씩씩하게 올라가곘습니다.
남치
홍난파노래비입니다.
인천일보(현 경인일보)에서 주관하여 수원시민과 어린이들 성금 30만원으로 1968년 7월 23일에 세운 것으로
고향의 봄 가사와 약력이 새겨져 있습니다.
1974년 6월 11일에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홍난파선생의 동제흉상(직경30cm)과 ’노‘자와 ’비‘자가 없어졌습니다.
범인을 잡고나니 흉상과 글자들을 뜯어다가 당시 돈 1200원을 받고 고물상에 팔았다고 합니다.
다시 노래비를 세우고 새싹회장과 도지사, 시장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재제막식을 갖습니다.
인생이 기구하니 노래비도 수난을 당합니다.
지금도 뜯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말이 많습니다.
노래와 노래비 그 자체로만 보아주길 바랄 뿐이지요.
남포루
삼일독립기념탑으로 가는 소나무길
삼일독립기념탑
이런저런 기록을 모아보면
수원의 독립운동은 3월 16일 수원 장날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서장대와 동장대에서 각각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터 시작해서 23일 서호에서, 25일 시장에서 만세를 불렀고
주동자를 경찰에서 검거하자 상점들이 약 40% 문을 닫는 철시시위를 했다 합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1969년에 수원시내에서 우러러보아야 보이는 이곳에 삼일독립기념탑을 세웁니다.
대한민국 독립기념비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옮겨 세운 광교산 창성사 터 주변에
1919년 당시 사강주재소의 순사부장으로 3월 28일 사강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다
성난 민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본경찰 노구찌의 순국비가 있었답니다.
광복후 노구찌의 순국비는 부수어 졌고
1948년 8월 15일 남아있는 기단위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69년 3월 1일 삼일동지회에서 이곳에 삼일독립기념탑을 세웠을때 이전해 왔다고 합니다.
통신탑 안나오게 삼일독립기념탑을 한번 더 찍습니다.
서남암문
암문이라하기에는 너무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이름이 그렇습니다.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를 통해 서남각루로 갑니다.
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입니다만
나무가 우거지지 않은 예전에는 다 보였을 것 같습니다.
서남일치
화양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높이 솟아오른 기숡이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 서남이치
다시 서남암문으로 들어가
서남암문위에 지은 서남포사
서삼치
서포루
효원의 종
서장대가 보입니다.
서암문
서암눈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돌아보고
문을 통해 돌아옵니다.
서장대와 서노대
서장대
공식설명..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皇橋)[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앞쪽 대석은 4층인데 전체 높이가 5척이다.
댓돌은 3개인데 층계는 4개이고 대의 너비는 98척이다.
대 아래의 동서로 42척의 거리를 두고 좌우에 크고 붉은 의간[杆][큰깃대] 한 쌍을 나누어 세웠다.
상대(上臺)의 너비 87척 높이 2척이고, 아래 층각의 규모는 9간인데 가운데 한간은 사방 13척 2촌이다.
밑에는 판자를 깔고, 연잎 평난간으로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합을 드리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사면에 각각 긴 시렁을 내물렸는데 길이가 6척 5촌이고,
네 모퉁이에 각각 시렁 하나 씩을 붙였는데, 역시 사방 6척 5촌이다."라고 합니다.
서노대
서노대 윗부분
서노대에서 본 성 외곽
안개가 자욱합니다.
화서문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서이치가 보입니다.
서이치에서 당겨 본 서포루
서포루
서일치
서일치에서 본 서북각루
서북각루
서남 한 칸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고
동남 한 칸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습니다
서북각루에서 본 수원시
화서문쪽
서장대
서북각루를 내려와 화서문쪽으로 가다가
뒤로돌아 좌향앞으로 가
성신사 가르키는 표지따라 갑니다.
화성한바퀴 다 돌았으니
화성행궁으로 가려고요.
행궁가는 길에 있는 정조대왕동상 그 주변을 둘러 봅니다.
어명이요!
화성행궁으로 가시오.
네이~
화성답사를 마칩니다.
Sinigaglia - Romance for horn & string quartet O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