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존마을입니다.
노형 초등학교 건너편 정존마을 옛 비석거리로 갑니다.
도로가 있던 곳에 큰 못이 있었고
그 못옆에 이러저러한 비석들이 꽤 많이 있었다합니다만 다 없어지고
70년대를 전후한 새마을관련기념비석이 두어기 있었는데..
그것도 누군가 쓰러뜨려 버렸습니다.
비석거리가 있던 자리에서 본 주민센터입니다.
제주시 농업기술센터로 쓰던 건물입니다.
마을이 재건된 얼마 후인 1957년에 제주시 농사교도소로 발족하여 농촌지도소로 개편하였다가
1998년에 농업기술센터로 개칭하였는데
몇 년 전 어디론가 옮겨가고 그 건물로 노형동 주민 센터가 이전해 왔습니다.
정존 남쪽마을을 한 바퀴 빙돌아보고 탐라도서관쪽으로 나간다는 게
큰길 변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민예품판매상…
요새도 어딘가에서 동자석을 캐와서 매매를 하는 가 봅니다.
일단 주인을 모셨던 동자석을 다른 곳에 세우면 새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요새는 옮기지 않는다 들었습니다만…
이장후 남겨진 동자석을 데려왔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다시 길을 건너 노형초등학교앞으로 갑니다.
노형동은 제주도 다른지역에 비해 국민학교개교가 상당히 늦습니다.
1945년에 이 자리는 아니고 함박이굴옆 유치동산, 지금의 광평마을회관옆자리에서 개교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1920년경 만들어진 노형동 최초의 개량서당인 의성학숙이 있었고(1924년 2월 동아일보 지방판참조)
그 후신인 천진의숙의 부지와 교사를 이어 받아 국민학교를 개교합니다.
(일설에는 별도 개교가 아니고 천진의숙을 당국에서 학교로 인가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위치가 함박이굴 옆이라 개교후에도 함박학교, 함박이굴 학교라 불리었습니다.
3.1만세사건후 무기한 휴업이 되었다가
1948년 11월에 4.3사건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면서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1949년 마을이 일부 재건된 후 지금의 자리에서 1950년 7월에 도두초등학교 노형분교로 개교하였다가
1953년 4월 노형초등학교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까 길을 잘못 들은 지점으로 돌아가 옛길을 이용 도세기빌레와 진빌레를 지나갑니다.
사진 오른쪽에 탐라도서관 일부가 보이고 탐라도서관자리를 방일이 공원이라고 합니다만
잃어버린 마을 방일이는 이곳이 아닙니다.
한라대학교 정문 앞으로 왔습니다.
1969년에 개교한 간호전문학교가 1982년 재단이 바뀌면서 이곳으로 이전해와서
1991년 한라전문대학, 1998년 지금의 한라대학으로 변천되어 왔습니다.
제주도내에서는 취업이 가장 잘되는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복을 가져다준다는 데 벼락 맞아 생긴 구릉인 베락구릉에 만들어진 학교도 복을 부르나 봅니다.
학교 울타리 오른쪽에 항상 밖이 궁금해서 내다보는 돌하르방 세 명을 만나고
그 앞을 지나 바로 고사마루로 가려다가 다시 맘이 바뀌어서 학교 정문 앞을 다시 지나 큰숭물로 왔습니다.
학교가 세워지면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학교열으로 아직 남아있는 이 지역의 옛 흔적입니다.
큰숭물케라고 하는데 케는 잡목과 잡풀들이 우거져 있는 넓은 들판을 뜻합니다.
느닷없이 전기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제주도에는 우리나라궁중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1887년보다 38년 늦은 1926년에야 전기회사가 설립됩니다.
제주읍 일부지역에 40kw의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했으며
1956년에 제주건입동에 내연발전기 250kw 3대가 설치되면서 시내 5개동에 전기가 공급되었습니다.
그 후 시설을 더욱 확충하여 외곽동까지 전력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전기를 놓는 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수요자가 가설비를 부담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마을에서 마을 공동재산을 팝니다.
원노형은 2필지(고장빌레라는 곳과 원노형의 원노형인 더렁굴)를 팔아 기본 기금을 마련하고
모자란 금액을 호당각출하여 이곳 정존보다 두달먼저 전등을 밝히었고
원랑은 알솔밭이라는 곳 800평을 매매하고
당시 추진위원으로 선정된 사람들이 한전과 협의하여 부족금액일부를 20년상환으로 융자를 받았고
잔여액은 각세대별 분담하여 이곳 정존보다 2개월 늦게 전기를 가설하였습니다.
이곳 정존은 1970년 초에 전화사업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력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자금조달을 바로 이 큰승물케 윗쪽 지금의 한라대학자리인 큰승물머세의 소나무를 베어서 팔아 확보하였습니다.
그 후 추가로 가구별 15000원에서 25000원씩을 수금하여 총 257만원을 투입, 1972년 12월 드디어 전등을 밝히게 됩니다.
제법 유명한 갈비집앞입니다.
이지역의 옛지명이 함박이굴이왓(咸泊洞伊田)이지요.
함박이굴사람들의 밭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 되는데 여기서 4.3을, 그리고 현기영 을 생각해 봅니다.
노형동.
지금은 제주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가장 번화한 마을이지만
4·3으로 인해 인명 희생만도 5백50여명이나 될 정도로 제주도의 마을 중 최대의 참화를 겪은 마을입니다.
4.3후 기본적인 복구에만도 6년이나 걸렸으면서도 다수의 마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돌아와 다시 마을을 가꾸던 주민들도 70년대의 개발과 90년대 후반의 개발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개발로 거의 마을을 떠나 그 슬픔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노형2구를 이루고 있었던 '함박이굴' '방일이' '드르구릉' '기정밭' '개아진이' 등의 마을들은
4.3을 겪으면서 사라져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중 함박이굴이 지금 이 일대입니다.
함박이동산의 구렁진 곳에 큰 못 세 개가 있었고 그 일대에 동네가 형성되어 사람이 살았으나
4.3으로 전부 불타 벌판으로 변했던 곳.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 잡목이 우거져 있던 곳입니다.
이곳이 순이삼춘의 작가 현기영이 태어난 곳입니다.
그가 생활했던 집에는 천장에 구렁이가 둥지를 틀고 있었고,
저녁이면 대숲에서 살쾡이가 기어 나왔다고 하지요.
부모가 모두 집을 나간 고향에서 작가는 불화로 싸움이 잦았던 조부모 아래서
두려움과 외로움에 울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할아버지의 배려로 가끔 외가를 방문해서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의 외가도 역시 노형리에 속한 너븐드르 마을에 있었습니다.
47년 봄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고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이튿날 작가는 함박학교에 입학했다합니다.
하지만 3·1절 총격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전도에 일어나면서,
학교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고 말았다고 하지요.
1년여 후 작가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댁과 함께 무근성으로 이사를 합니다.
소설 순이삼촌은 이곳 노형동에서의 있었던 일과 조천읍 북촌리에서 있었던 일을 엮어 써 내려간 소설입니다.
무근성으로 이사간 이후의 작가의 기억은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소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4.3과 소설 순이삼촌에 대해서는 4.3기행 또는 너븐숭이 등의 글로 몇 번 블로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최근에 들어선 빌라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함박이동산입니다.
함박은 함지박을 뜻하는 제주어입니다.
부근의 물통이 하나 남아 있을 텐데 생각없이 지나왔습니다.
원주 변 씨 입도조 묘역
입도조 邊世淸은 고려의 충절을 다한 그의 할아버지가 새 왕조 건국에 동조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참살당한 뒤
난세의 어수선함을 피하여 제주에 들어와 새생활의 터전을 닦으셨다 합니다.
나주김씨 입도조 선역
입도조 金仁忠은 고려 말의 무신으로 강화진 좌령랑장을 지내다가
조선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제주로 들어와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고사마루로 올라갑니다.
告祀를 지내왔던 마루(旨)라서 고사마루라 한다고 합니다만 묘비석에는 高舍峴이라쓰여 있어 이게 더 맞을 듯합니다.
고사마루에서 원노형방향을 바라봅니다.
고사마루에서 드르구릉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내려가 함박이동산을 오릅니다.
함박이동산으로 가면서 내려다본 새가름(새로 만든 동네)
함박이동산
방일봉가는 길에 보는 방일이 마을 옛터.
휑하니 저쪽 월산마을쪽이 보입니다.
방일봉입니다.
일대에서 아침 해가 맨 먼저 비쳐오는 곳이라서 옛날 부근마을에서 이곳에 올라 해맞이를 했다하여 해맞이 동산이라고 합니다만
오름 정상부까지 도로로 깎여서 이제는 아무도 봉우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그래도…월산 쪽에서 보면 화구 없는 원추형의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덤블을 뚫고 방일봉정상으로 가는 길.
발앞에 지천인 천량금을 피해서 깨끔발을 합니다.
노박넝쿨
방일봉에서 바라보는 해뜨는 방향 남짓슨오름, 광이오름, 생이오름.
방일봉에서 바라보는 동북쪽 신제주넘어 공항관제탑.
내려가는 길에는 말오줌때가 지천이네요.
나란히 보이는 연동 검은오름과 노루생이.
노루생이 뒤로 걸시의 한쪽어깨가 겹쳐있습니다.
걸시오름뒤로보이는 아흔 아홉골.
외도동이 보입니다.
동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동개진이마을이 있던 자리를 지나 석숙이못을 찾아갑니다.
석숙이못.
석수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다는 못답게 참 보기 좋게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이제는 아무도 올수가 없습니다.
마을이 없어지니 주변이 숲으로 덮이고 밭으로 둘러싸여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밭과 숲을 가로질러 헤매고 또 헤매면서
해방직후 노형동 가장 윗마을이던 드르구릉으로 왔습니다.
넓은 들 가운데 있는 큰못을 중심으로 80여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던 곳인데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표석만이 황당그러이 서있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노형동 여섯 곳의 없어진 마을 중 유일하게 표석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까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인이 부주의했다는 건데…
세상의 변화에 상관없이 순박하고 단지 열심히 살아간 것이 부주의한 것인가 봅니다.
그들이 쫓겨 가던 길을 따라 가봅니다.
그 시절에는 없던 공원이 있습니다.
미리내공원.
제주 폐기물환경사업소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인조잔디구장입니다.
80년도부터 92년까지 이 일대 7만 평방미터 이상의 땅에 쓰레기를 갔다 버려 매립을 했습니다.
포화상태에 다다르고 주변으로 가스, 침출수 등이 넘쳐나자
매립장 상부토지를 정지하고 침출수의 집배수시설 및 가스배제시설을 하고
축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등의 체육시설과 녹지공간을 조성하여 제공된 곳입니다.
이용하는 개인 및 단체는 드물고 도에서 주관하는 중, 고 축구시합때 몇 번씩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인조잔디구장 서쪽 끝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4.3의 광풍을 피해 주민들이 숨어들었던 배염나리가 있습니다.
배염나리는 한라산의 북사면인 제주시 노형동 중산간에 위치한 계곡의 한 부분입니다.
이 계곡은 도근천의 상류가 되는 곳이며 사시사철 물이 흐르고
주변으로는 아름드리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들과 철쭉이 우거져 유원지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고
특히 여름철에 폭포같이 내리는 배염나리의 물을 맞으면 땀띠나 신경통이 말끔히 사라진다고 해서
노형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찾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배염나리라는 지명은 울창한 산림으로 주변이 서늘하여 '뱀이 나올 것 같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곳이 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살아남기 위한 피난처로 노형 마을 주민들이 숨어들었다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비극의 처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노형동 출신의 양중화라는 분이 4.3연구소에 증언한 말을 옮겨 봅니다.
(2008년 증언 당시 77세)
"배염나리에 궤가 있어요. 뭐 궤라기보다는 엉장 같은 데였죠.
이 궤에는 일반 양민들이 살았죠.
풀을 베어다가 땅에 깔고 하면서 몇 사람 인줄은 잘 모르겠지만 10호 정도의 가족이 피신해서 살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바게왓 사건이 나고 며칠 안 됐을 때예요. 토벌대가 와서 나오라고 했어요.
토벌대는 그 사람들을 바로 옆에 있는 누운오름으로 끌고가서 죽였어요.
사람들을 데리고 가다가 지치니까 쏴버린 것인지… 죽은 장소들이 조금씩 틀렸어요.
배염나리에서 죽은 사람들은 일단 여기 토벌을 한번 왔다 갔으니까 다음에는 안 올 것이라고 해서 다시 들어왔다가 당한 겁니다.
나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들리는 말로는 경찰, 군인, 민보단 합동토벌이라고 했어요.
참 비참하게 죽였어요. "
배염나리에서 잔디구장쪽으로 다시 올라와 동쪽 장궤아진밧으로 갑니다.
그곳에 있는 또 다른 피신처, 장궤라 하는 긴 바위로 된 땅굴을 가려고 했습니다만...
기억이 혼동되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동쪽 방애구릉을 가자.
<10년전 쯤 찾아갈때 이용했던 누군가의 사진 : 장궤와 방애구릉>
어디선가 개두마리가 따라오며 짖어댑니다.
들개는 아니고 부근 농장에서 기르는 개 일텐데 그래도 풀려 있는 큰개 두 마리를 혼자서 상대하려면 벅차겠지요.
도망가자....
개가 있는 반대쪽 동쪽 언덕으로 밭을 가로지릅니다.
묘비에 보니 老衡境許門道寶來峴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볼레낭동산을 넘어 온 것이네요.
조금 더 남쪽으로 올라가면 말 그대로 허문도가 나오고 하잣성이 나옵니다.
허문도라는 것은 동서로 길게 하잣성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 지역을 1100고지로 가는 도로가 이어지면서 돌담을 헐어버린곳이다 해서 돌담을 허문 길목이라는 겁니다만
주변에 하잣성흔적이 보이질 않으니 그냥 길일뿐입니다.
하잣성은 목마장과 목마장을 구획한 구간을 연하는 맨 아래지역에 쌓은 돌담입니다.
여기가 예전 4소장터였고 몇 해 전만 해도 잣담의 흔적이 선명했는데
지금은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도깨비도로, 충혼묘지, 한밝저수지 동쪽 유주숫물까지 노형동지경입니다만
길도 않좋고 해서 1100도로변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쭉 내려옵니다.
정존 마을을 거의 다 헤메인 후에야 정존마을회관으로 왔습니다.
500여 년 전 원주邊씨가 낙도하여 베릿가름일대에서 목축을 하며 거주하여 설촌됐다 하며
마을이름유래에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지세가 높은 동산에 바른 모양으로 설촌된 마을이라는 데서 정존동이라 호칭한다합니다.
주변의 묘 비석에는 ‘정종, 정중이, 정준이, 정존동’ 등의 표기가 나타납니다.
베릿가름의 베리는 벼랑 또는 높은 언덕을 뜻한다 하고 가름, 카름은 마을이 형성된 곳을 뜻하는 제주어입니다.
수덕동산자리에 만들어진 소공원입니다.
수덕은 큰 돌들이 엉기정기 쌓이고 잡초목이 우거진 곳을 뜻하는 제주어이고
이 일대의 동네가 바로 새벳가름 또는 베리가름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큰 돌은 없지만 수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남아있네요.
정준이와 너븐드르 사이를 가로질러 이호동으로 흘러가는 새밋내입니다.
공식명칭은 남당내라고 합니다.
생이오름서쪽 싱이굴에서 멧물을 거치고 지금의 제주고등학교 서쪽 남당모루를 거치고 큰승물머세에서 벼락을 맞고 베락구릉을 형성하다
함박이구릉을 지나 흘러왔습니다.
새밋내 인근 정존마을서쪽 지금의 뜨란채아파트 216동 인근에 있는 종남물입니다.
종남은 때죽나무를 말하고 이 일대에 때죽나무가 많아 종남골이라 했습니다.
어느 시절 마을의 생명을 이어갔던 물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정서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낚시하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이 귀여워서 한 장 꾹
세밋내 변에 세워진 정존 마을 표지석을 지나고
그 바로 옆 내 건너편에 세워진 광평마을 표지판은 참고로만 미리 찍어놓고..
왕복 8차선 큰길을 건넙니다.
대방구릉
새밋내하천 대방구릉질.
지금은 양쪽에 둑을 높게 쌓아 올렸지만 예전에는 이곳으로 건너 두 마을을 왕래하였습니다.
동쪽으로 몸을 돌려 큰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큰길을 건너 노형 3단지 공원으로 옵니다.
웃소왕머세입니다.
이곳은 월랑마을입니다. 만...
월랑마을 본동하고는 큰길로 갈리어 있고
정존마을 뜨란채아파트단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 대다수가
월랑마을 정존마을 분류에 무심하시기 때문에
단지가 같이 구성된 정존마을에 같이 묶었습니다.
머세라는 말 그대로 돌무더기나 잡풀과 잡목이 우거져 있어 농사짓기가 어려운 땅이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또다시 길을 건넙니다.
왜 자꾸 길을 건너고 다시 건너고 하느냐고요?
여기저기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또 길을 뚫어놔서 마을구분도 않되고 옛길이 다 끊기고 없어졌습니다.
옛 마을길을 따라서 걷고자 하다 보니 도리어 이리저리 왔다갔다가 됩니다.
알소왕으로 가는 옛길로 들어갑니다.
전혀 알 수 없는 물통을 지나고 옛길을 따라 가다가 알소왕마을에 있는 억새미당으로 왔습니다.
이 당은 이호동 오도롱마을에 있어서 오도롱본향당, 오도롱할망당, 소왕상시당이라고 불리웁니다만
정존마을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존마을 원주민들은 다 떠나버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 지은 아파트로 들어와 살다보니
이 당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졌고 결국 이제는 폐당직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본풀이를 옮겨봅니다.
“시님제석 오도롱 소왕 상시당, 혼두두두 수물두두 거느린 송씨 할마님,
인간차지, 여리불법 할마님, 알당은 축일 한집 상세경, 가온딧도 보잿도”입니다.
억새미당에서 당목넘어 보이는 정존마을 노형3단지를 바라보고 ..
이호동 소왕마을 억새미지세터를 지나고
새밋내위에 놓인 억새미교(억삼교)를 지나서
노형동 너븐드르마을 억새미드르로 왔습니다.
소왕도 그렇고 억새미도 그렇고..
같은 생활권이었던 곳을 억지로 구분했다고 생각되네요.
W. A. Mozart
Rondo for violin & orchestra in Bb major, k. 269
David Oistrakh, cond & vn
Berli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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