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제주시 노형동 - 원노형

하늘타리. 2011. 1. 21. 22:25

한라산을 가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섭니다.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날 데리러 오겠다는 일행을 기다립니다.

 
아파트 출입구 조경물에 얼음이 얼었네요.


차량은 안 오고 전화만 옵니다.
중산간 지역에 폭설이 내려 차량이 통제되었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행정동으로서의 노형동을 이곳저곳 살펴보려 합니다.

 

꽤 오랜 만이네요.
몇 년 전에 한 바퀴 돌았는데 예전의 흔적이 마을이름외에는 남아있지 않아서 실망만을 느끼고 돌아선 기억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큰 기대를 안 하고 옛말 그대로 원보하듯이 다녀오려합니다.

 

지난해 초 지역신문기사에 제주시 노형동 거주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섰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제주지역 읍면동에서 5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는 처음이고 전국적으로도 5만 명이 넘는 곳은 노형동을 포함 4곳 뿐이라 합니다.
인구5만 명 돌파를 기념해 기념행사를 가지겠다고 쓰여 있었는데 어떤 행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기념할 일인지, 적정규모를 넘어서 우려할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노형동에 사는 제 입장에서는 가까운 곳에 각급 관공서, 은행, 마트 등이 있어 생활은 편합니다만...
삶의 향기와 온도는 그리 따스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노형동은 약 600년 전에 설촌되었다 합니다.

구한말에 원노형, 다랑곶, 정준이, 너븐드르, 월산마을 이렇게 다섯 개 마을이 노형리로 되었고

일제강점기간에는 원노형, 다랑곶, 정준이가 노형 1구, 너븐드르와 월산마을이 노형2구로 있다가

1955년에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면서 40개 행정동을 설치할 때

1,2구룰 노형동으로 통합하였습니다.

1962년 제주의 40개 법정 동을 14개 행정동으로 개편할 때 법정동인 해안동과 도평동을 노형동과 합병 관할하다가

1978년 도평동은 외도동으로 넘기고 현재는 노형동과 해안동 2개의 법정동이 노형동이라는 행정동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형이란 지명은 지형이 배와 같고 큰못에 배를 띄우고 노를 짓는 형태라 하여 櫓形에서 찾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조선조 문헌에 보면 대부분 老兄과 老衡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어떤 의미의 원래의 말이 한자어의 음을 차용 老兄으로 쓰이다가(남환박물, 탐라순력도의 제주목도 나 지과條) 

老衡으로 변천된 것 같습니다.(삼군호구가간총책)
삼군호구가간총책이 쓰여진 1905년 인구를 보면

그 당시 제주도 총인구 85,330명, 제주목중면 (제주시와 북군이 합쳐지기전 제주시지역)의 인구가 12,649명인데

그 중 626명이 당시 노형리에 살았다고 합니다.
25개 마을에서 8번째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었군요.

그로 부터 약 20년 후인 1929년 조선총독부 생활실태조사서에는 인구가 2666명으로

제주시에서 화북, 삼도 다음으로 많은 수를 보유하였다가

 

1953년도에는  인구가 1103명으로 엄청 줄었습니다.(제주시 30년사)

그 이유는 ...생각해 보시지요.

정존마을을 돌때 대답드리겠습니다.

 

원노형마을로 갑니다.

 


노형로터리 동남쪽 1100도로를 따라 위치한 마을로서

노형동에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노형동의 설촌 시거지라서 원노형이라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어디를 갈까 망설입니다.


남아있는 옛유적이 없어서이지요.

 

향토지에 따르면 마을 북쪽에 고노골성이라 하는 동서로 250미터 정도의 높은 성을 쌓아

 사각 비추는 것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4.3이전까지 마을의 여러 가지 일을 의논했던 都家(오늘의 마을회관)가 있었다 합니다.
그 주소가 928-7번지라 하여 마을 향토지에 있는 당시약도를 근거로 찾아가 봅니다.

 

고노골성이 있었었다는 곳. 그냥 와봤다는 겁니다.


주소로 추정한 도가의 위치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다 구릉이 남아 있는 곳을 둘러보고

 

 

마을 표지석이 있는 중심가, 노형로타리로 갑니다.


표지석을 보고

 

 


5거리 북쪽 구역으로 건너가서 원노형쪽을 찍습니다.

 


적갈색건물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원노형입니다.


한장더

 


오픈세일 현수막 걸린 건물까지는 다랑곶 즉 월랑마을입니다.


그 건물 뒤쪽에 학교가 있습니다.

그곳부터 정준이 즉 정존마을이지요.


이렇게 마을 한복판을 찢어서 왕복 6차선의 5거리를 만들었으니 무슨 흔적이 있겠습니까?


돌아서서 월랑마을 표지판 한번 보고 다시 원노형구역으로 들어갑니다.


노형초등학교 정문 앞에서부터 그 동쪽(적갈색건물 대순진리회옆)까지…

엄청 많았다 하는 참나무가 다 베어지고 길이 뚫리며 가운데가 깎인 초남동산(참나무동산)기슭 큰 길에 연해서 위치한 묘소입니다.

 

묘비 앞에 이곳도 이제 개발할 테니 옮기라고 표시판을 세워놨네요.


조금 더 가서 예전 원정이 마을이 있던 곳이자 원노형과 정준이를 가르는 길인 원정로,

지금의 주민 센터가 있는 길로 올라갑니다.

 


제주일고입니다.

 


1955년 지금 삼성초등학교자리에서 개교를 했고 1983년에 현 위치로 이전해 왔습니다.


학교를 이전할 때 향교에 있다 이도동구석으로 내몰려서

1962년 당시 교정으로 옮겼던 비석을 가져온 것이 있습니다.

 


노형동에 비지정 문화재가 세 곳 있는데 그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옮겨온 당시에는 제주향교개수00라는 글자만큼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아무글씨도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이전 3년 후 재학생 523명의 얼굴을 새겨 일맥의 뿌리를 세운 탑입니다.

 

 


그 탑앞에서 보이는 운동장과 담 너머의 우편집중국왼쪽자리

 


이곳에 그 언젠가 인지는 모르지만 군대가 진주해 있었답니다.
그래서 진군지라하고 이일대의 가로명이 진군로입니다.

 

 

경사를 계속타고 수목원 쪽으로 올라갑니다.

 


수목원입구 사거리,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곳에  김유비여사송덕비가 있습니다.

 


1916년 남원읍에서 출생하셨고
18세에 가까운 동네분과 결혼 1939년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가서 모진 고생으로 돈을 모았으며

1985년 남편이 돌아가시고 그 11년 뒤 돌아가셨는데
못배운게 한이 되어 그 어렵게 번돈 6억 원을 돌아가시기 직전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였답니다.

 

 


전 국회의원 누군가 이사장을 맡아서 활기찬 장학 사업을 한다 하는데

이 비석은 나무숲 그늘에서 항상 적적해 보였는데

그나마 지금은 주변 사방이 다 도로확장공사중이라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기념비에서 바라본 연동성당입니다.

 


제 교적이 있는 곳입니다만 콘크리트노출식 공법이 볼 때마다 생경합니다.

 

수목원입구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내려갑니다.
전경대가 나오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 찍으면 피곤한 일이 생길 듯해서 멀리 나무 뒤에서 찍었습니다.

 


예전에는 멧물구릉이라고 하던 곳입니다.
이 뒤쪽에 멧물샘이 있었고 지금 연병장자리에 멧물못이 있어서 주변에서

쇠번, 몰번을 서던 테우리들이 우마들에게 물을 먹이는 곳이었다 합니다.
해방 후 이 못을 확장하여 농업용저수지로 만들기도 했지만 전경대가 들어서면서 매몰되어 연병장이 되었습니다.

 

멧물샘이 나오던 곳입니다.

 


전경대 간부 가족들이 사는 아파트의 심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1100도로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내려갑니다.
우편집중국앞에서 보는 동쪽 방향

 

  


예전에 과원이 있었답니다.


그 자리를 뚫고 1100도로를 만든 거지요.
이형상의 남환박물(1740)에 노형에 과원이 설치된 기록이 있고 ,

1770년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 노형촌 서쪽에 과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에 기초하여 이 일대를 과원로라 합니다.

 

 

또 한곳의 노형동 비지정문화재입니다.
노형동 노랑굴.

옹기를 구워서 바로 그 앞에서 팔았기에 옹기터동산이라고도 했답니다


지금은 저너머에 아무런 흔적은 없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래도 노랑굴터라고 추정할 수 있는 무너진 토굴의 흔적이 있었고

생활도기파편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이곳도 개발이 진행중인 구역이라 흙을 쌓아 모으고 있습니다.

 

 


우편집중국이 있는 곳은 예전에 도용당이라 하던 곳입니다.

 


당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날에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연해 있는 밭, 멧밧이라고 합니다.

 

 


제주일고운동장에서 말씀드린 군사들이 진을 쳤다고 하는 진군지이지요.
주변의 묘 비석에 陳軍地 등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묘도 다 없어졌습니다.


서쪽 길 건너 정준이마을지경  멧밭구릉.

 

 

옛날에는 '먹는 구룽'과 '쇠 멕이는 구룽' 등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다 메어 졌습니다.
먹는 구릉은 약 200여 평, 쇠 멕이는 구릉은 약 400여 평이 되어 노형에 있는 못가운데는 가장 큰 못이어서

바다에 접하지 못한 노형아이들의 수영장으로 활용되던 곳이랍니다.

 

몸을 정반대로 돌려 동쪽으로 갑니다.


연동과 노형동이 이 다리아래로 흐른 내를 경계로 갈립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공식적으로는 흘천, 도두동 구역에서는 사수천이라 합니다만
연동사람들은 엉내, 노형사람들은 몰머릿내라고 합니다.
남조순오름지경에서 발원하여 노형동과 연동을 가르고 도두동을 거쳐 바다로 흐릅니다.
노형사람들이 예전에 성안을 가려면 이내를 꼭 지나야 했기 때문에

 마을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마을머리에 있는 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합니다만 한자로는 馬頭川이라고 합니다.

마을의 머리든 말의 머리든 흐르는 냇물이 만들어낸 마을의 경계를 따라 북으로 갑니다.
유나이티드앞 하천을 복개해서 주차장으로 쓰는 곳을 지나고

 


가뭄에도 물이 고여서 마을의 생명수를 제공했던 곳을 지나니

 

 


1980년에 가설한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이름이 제2호암거입니다.

 


북쪽에 있는 노형교를 제1호암거라 하고 이곳을 제2호 암거라 한 것인지…
사려니숲길입구에서 교래리쪽으로 가면 첫 번째 다리(교래1교)가 제1호암거라고 표식되어 있는데

그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노형교.

 

 


1970년대 이 다리가 생기면서 노형이 발전되기 시작을 합니다.
사진을 잘못 찍어 아주 작은 다리처럼 보입니다만 왕복 6차선에 좌우 인도가 있는 꽤 넓은 다리입니다.

노형교위에서 원노형쪽 방향을 돌아보고

 


몸을 북으로 돌려 월랑마을쪽으로 갑니다.


  Vieuxtemps - Elegie for viola and piano, Op. 30

Roger Chase    viola  ·  Michiko Otaki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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