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김녕비석거리

하늘타리. 2011. 1. 6. 20:46


김녕리 비석거리입니다.
한수동과 대충동, 용두동의 중간에 위치한 제주 근대 5일시장의 발상지라고도 합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옛날에 남녀노소가 해돋이와 달맞이를 하였다고 하고
그리고 부근의 용천수가 있어 사람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물 길어 가는 곳이고 하다보니

사람이 많이 모여서 자연히 시장터가 되었지요.

 후일 시장터가 확대되어 대충동으로 옮겨지기전까지는 꽤나  번창한 거리였다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주민이 모여드는 곳이라서

후생들이 우러러 보고 따르도록 훌륭한 인물에 대한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지금은 2기의 효자비와  6기의 선정비가 남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아시지요?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1481년(성종 12)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1486년에 증산(增刪)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35권으로 간행하고,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의 증보에 의해 완성을 본 책입니다.

 

  내용은 권1∼2는 경도(京都), 권3은 한성(漢城), 권4∼5는 개성(開城),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로 되어 있습니다.

책머리에 그 도의 전도(全圖)를 싣고

이어 연혁(沿革) ·풍속(風俗) ·묘사(廟社) ·능침(陵寢) ·궁궐 ·관부(官府) ·

학교 ·토산(土産)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樓亭) ·사사(寺社) ·역원(驛院) ·

교량 ·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습니다.
 이어서 이행 등의 진전문(進箋文), 서거정 등의 서문이 있으며,

책끝에 김종직(金宗直) 등의 발문이 있습니다.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과거 정치사, 제도사는 물론

향토사를 연구함에 필수적으로 자료로 사용되는 책입니다.
1958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책이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지요.

 

이책 전라도 제주목 인물 효자란에 김녕에 사는 효자이야기가 있습니다.

州吏也 母病腫氣絶 再割脛肉 取血和酒以進 疾遂愈 事聞旌閭
향리로 근무하는 자로 그 어미가 종기로 인해 기절하는 병에 걸리자

두번에 걸쳐 허벅지 살을 베어 나오는 피를 술에 타서 먹임으로 병을 낫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려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효자이야기의 주인공이 이 비석의 인물 김칭입니다.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목 효자란에는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쓰여 있습니다.
其母居金寧村 秤以記官在官門 聞母患腫氣絶 卽脫鞋笠疾走

一日再割其脛肉 取血和酒以進 母復甦 終養二十餘年 成化丁未 事聞旌閭
모자를 벋고 맨발로 뛰어와 하루에 두번 허벅지를 베어 피를 내어 술에 타서 드렸더니

어머니가 완쾌하시어 20년을 더 사셨다라고 쓰여 있네요.

 

비문을 옮겨봅니다.
孝子金秤之閭
本以記官 在於官下 聞母疾甚 卽走奉脛血和酒進之 復甦終養二十有年 成化丁未旌閭,咸豊己未 本里朴振 改石閭
 성화 정미년은 성종 18년(1487)입니다.

 그때 정려를 받아 정문을 세웠다고 되어있으며 소실되었는지 

 철종 10년(1859)에 마을사람 박진(朴振)이 석려(石閭)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효자박명복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해방후 10년뒤에 그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비석입니다. 


전면은 朴孝子明福紀念碑」라 되어 있고

 좌측면으로부터 뒷면, 우측면에 이르기까지 내력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일부를 옮겨보면
.... 朴孝子 名明福字良奉 密城大君彦 之裔 入島中祖順元公六世孫也(中略)

戊寅孝子年當二十一 而父病劇心驚 斫指血 和藥奉進 延命月餘 是孝oo致 及至喪 哀戚愈甚

越三十九年丙辰年 至五十九 而遭母憂 關喪三年 oo子回甲之戊午歲也翌年己未 四月二十五日卒 壽六十二 鄕里驚歎皆以孝子稱焉....

이라고 되어 있고 말미부근에 後三十六年乙未秋 其孫라 새겨져 있습니다.
박명복 21세때 아버지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베고 그 피를 먹게하여 한달을 연명케 하였으나 마침내 돌아가셨답니다.

또한 59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를 슬퍼하면서 초상이 난 뒤로부터 졸곡까지의 모든 제사를 정성껏 지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1919년 62세에 죽으니 사람들 모두가 효도를 다한 사람이라 하여 죽은지 36년후인 기미년(1955)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살펴봅니다.


목사정공기원선정비(牧使鄭公岐源善政碑)  

정기원 목사(겸방어사, 武臣)는 철종 14년(1863) 정월에 부임하고 고종 원년 (1864) 3월에 사직하였습니다.
재임 중 그는 임술민란을 일으킨 강제검(姜悌儉) 김흥채(金興采)등을 체포하여 사형시켰고,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행정을 폄에 있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위엄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멸되어 비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지비(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之碑)
좌측면에 「가경이십삼년정월 일(嘉慶二十三年正月 日)이라 음각되어 있어,

순조 18년(1818) 정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구동 목사(겸방어사, 文臣)는 순조 15년(1815) 5월에 부임하고

순조 17년 (1817) 10월에 형조참의로 임명되어 갔습니다.
재임 중 그는 홍피전(洪彼錢) 1천 8백 냥을 마련하여 다른나라 배가 표도하였을 때 공궤하는 비용으로 비치했다가,

뒤에 환모(還牟) 1천 88 석을 바꾸어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또 순조 17년에는 제주에 흉년이 들어 육지부 곡식을 옮겨서 도민을 구휼하였는데,

이때에 그는 환모조(還耗租) 2천 5백석을 미리 준비하여 보관해 두게 하였습니다.


사상이공원팔휼민선정비(使相李公元八恤民善政碑)
이원팔 목사(겸방어사, 文臣)는 순조 22년 (1822) 정월에 부임하고 동왕 24년 정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습니다.
재임 중 그는 공성곡(供星穀)을 설치하여 길거미(拮据米, 재정이 곤란할 때 쓰는 쌀) 47석을 사창에 붙여

임금의 사자를 접대하는 비용으로 갖추게 두었고,

효열(孝烈)을 장려하고 시신을 매장하게 하고 뇌물을 막고 선세를 덜어 주었으므로 백성들이 추모하였다고 합니다.

 

사상구공재용휼민선정비(使相具公載龍恤民善政碑)

 

 

이 비석은 뒷면에 「도광이십일년오월 일(道光二十一年五月 日)」이라 음각되어있어

헌종 7년 (1841) 5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구재룡 목사(겸방어사, 武臣)는 헌종 5년 (1839) 3월에 부임하고

동왕 7년 윤 3월에 대정현감이 왜인이 내박하였을 때 문정하지 못한 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평상시의 경계하지 못하였다 하여 함께 파직시켰습니다.
재임 중 그는 5백여 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게 하였고,

양읍(정의와 대정 양현)의 수세곽(水稅藿)과 본주의 일전곽(日田藿)을 혁파하였습니다.

그의 정사가 번거롭지 아니하여 부역을 가볍게 하였으며 취렴이 적어서 백성들이 추모하였다고 합니다.


鐵碑

 

돌로 된 배면에 맞물려 세워졌던 철비는 나름 굉장한 신경을 써서 조성하였을 거라 추정되지만  누구의 비석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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