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절
휘영청 달 밝은 칠월보름 백중에
정성어린 백종과실 삼보님께 올리고
삼계고해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생 부모 영가를 천도합니다.
목련의 효성이 칠월중원 밝히어
사부모의 아귀보를 벗어나게 하나니
고통 없는 화락천에 그예 다시
태어나 무량복락 무한히 누리시었네.
나으실제 아픔을 기쁨으로 아시고
기를제의 괴로움을 자비로서 달래신
바다 같은 부모님의 크나크신
은혜를 삼보님께 아뢰니 살피옵소서.
이 절집에 보살상이 하나 있슴니다.
이 절집 복원할 때 당시 주지 스님이 당신의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모신 석상이랍니다.
나도 문득 어머님이 생각나서..
어머님께 노래 한곡 들려드리며 글을 씁니다.
..............
법화사입니다.
이곳은 16세기 후반쯤에 폐사된 뒤
1926년 경 관음사의 안도월 스님과 안봉려관 스님이 이 자리에 새로이 건물을 짓고 포교활동을 해 왔는데
1948년 4.3사건으로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잊혀져가던 법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도부터 입니다.
그때 법화사 주지로 부임한 시몽 스님이 법화사 복원운동에 나서서
발굴조사를 의뢰하고
한편으로는 사찰 부지를 해마다 사들여 무려 3만평의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지위에 1987년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1988년 남순당을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九品蓮池를 복원하였습니다.
대웅전입니다.
이 대웅전은 1982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1차 법화사지(法華寺址)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8평 규모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복원 되었습니다.
素菴 玄中和선생 글씨.
2006년에 세운 법륜상.
대웅전내 삼존불.
석가모니불, 우보처 지장보살, 좌보처 관세음보살
조선 태종 때까지 이절은 노비가 280명이나 되는 큰절이었습니다.
절 규모에 맞게 모셔진 부처님도 원나라 良工(사람이름인지 뛰어난 기술자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에 의해 조성된
상호가 아주 훌륭한 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다 합니다.
명태조의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원찰을 건립 중이던 명나라 조정에서 이곳의 불상을 모셔가려고 黃儼과 韓帖木兒 등을 파견하자
조선왕조에서는 조정관리를 보내 강정포구 서쪽 포구를 통해 어디론가로 모셔갑니다.
그래서 그곳이 삼존불이 떠났다하여 세불포구라 한답니다.
부처님 떠나신 후 점점 쇠락해져 어느 순간 폐허로 변했지요.
신중탱화
渡江達摩百態之像
법당벽면에 붙어있는 안내문에 있는 관음상
張保皐像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1990년대 정밀 유물 발굴조사 결과 주춧돌과 명문기와 등이 나왔는데.....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에 쓰여있는 '시중창16년기묘필(始重創十六年己卯畢)'라는 명문을 근거로
중창연대가 원나라 탐라총관부가 제주에 설치된 1275년 (충렬왕 원년) 이후~1279년(고려 충렬왕 5년)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고려 때 법화사의 중창 이유가 중국 원나라가 제주지역에 다루가치를 파견해 지배권을 강화하고
남송 및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려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 법화사 주지 도현스님이 지역 신문에 밝힌 바에 의하면
"법화사의 출토 유물 가운데 궁궐 건축에만 쓰였던 용과 봉화 무늬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무역과 관련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과거 법화사는 사찰로서의 종교적 기능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주도 내 정치, 경제의 중심지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시데요.
발굴시 출토된 유적들...
중요한 것은 제주박물관에 있습니다.
누각이 있던 흔적.
산신각이나 독성전이 있기는 너무 가깝고
원통전이나 지장전...?
발굴 후 모아둔 벽돌 및 기와들
이전에 식수로 쓰던 물통
요사채.
종무소와 그 옆 소나무
애기능금
구화루.
일부러 단청을 하지 않아 오래된 듯 보입니다만
2004년에 건평 54평의 2층 누각으로 지어졌습니다.
구품연지와 참 잘 어울리지요.
구화루 2층에서 강명희화백의 작품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올라가 보지요.
원래 이곳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듯
열린 창호지문으로 스며드는 빛 속에
벽에 걸리거나 기둥에 얹히거나 나무 탁자에 유화와 수채화들이 놓여있습니다.
그림을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기는 또 처음입니다.
평을 할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으니 그냥 봅니다.
무엇보다도 절집에서 탱화나 불화가 아닌 그림을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하고
그림이 말하려는 바와 내가 느끼려고 하는 것들의 대화가 나를 풍요롭게 합니다.
구화루를 돌아서
구품연지로 다가갑니다.
돌다리를 건너서
구품연지를 안고 있는 구화루를 뒤돌아봅니다.
九品蓮池蓮花麗 구품연지의 연꽃이 참 곱다는 이야기지요.
愼言人像
家語曰 孔子觀周 遂入太祖后稷廟 廟堂右階之前有金人焉
三緘其口而 銘其背曰 古之愼言人也
공자가어에 『공자께서 주나라에 구경 가서 태조 후직의 묘에 들어가보니
묘당 우편 섬돌 앞에 쇠사람(金人)이 있었는데
그 입을 세 군데나 꿰매고 그 사람의 등에 새겨 있기를
「옛날의 말을 삼가는 사람이다」하였다.』
무슨 의미로 이 자리에 세워놨는지 모르겠습니다.
절집에 와서 공자가어를 읽는 것도 그렇고
그 내용이 말을 삼가하려고 입을 꿰메인 내용이니 생경하기만 합니다.
呑虛스님 禪詩碑
西翁스님의 禪詩碑
법화사지 안내판
청호진 대사 장보고 석비와 장보고 석상
해상왕 장보고의 업적을 새긴 비석으로 2006년 8월 11일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제작비를 지원,
서예가 박동규 필체에 무형문화재 김옥수 명장이 제작을 맡았다 하고
높이가 6.5m이며 너비는 2.4m로 직사각형 형태의 비에는 모두 3,000자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張保皐의 본명은 弓福 또는 弓巴라 합니다.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유년시절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완도, 혹은 그 인근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장씨 성도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30세쯤에 당나라 徐州의 武寧軍 小將이라는 軍職에 올랐을 때부터 입니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당나라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소장직에까지 승진했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는 신라 제42대 임금인 흥덕왕을 만나 완도에 청해진(완도)을 설립할 것을 요청하였고
김우징 등의 왕족이 이를 찬성하여 마침내 허용되었습니다.
1만 병사를 얻어 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고
신라 근해에 출몰하여 신라인을 사고파는 노예무역선을 소탕하였습니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였고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있었으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역할도 했다합니다.
장보고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 쟁탈전에도 개입합니다.
838년(희강왕 3)에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군사를 동원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권세를 휘두르던 그는 846년 (문성왕 8년)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次妃로 들이려 했는데
귀족들이 자기를 海島人이라 무시하고 반대했다는 이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하여간 조정과 내통한 부하 염장에 의해 살해됩니다.(일본 기록에는 841년이라고 합니다)
그 후 얼마 뒤 청해진은 해체되고 그곳 주민들은 지금의 김제지역으로 옮겨갑니다.
말년의 권력투쟁에 뛰어들어 오욕을 겪지만
장보고는 선원들의 뱃길을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어
일본에서는 교토시 북쪽의 히에이산(比睿山)에 세운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16세기 센고쿠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습니다.
교토의 엔랴쿠지에서도 일본 승려 엔닌이 세운 장보고 기념비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보고가 산동성 롱청(榮成)시에 세운 赤山法華院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 법화사에 2006년 8월에 장보고비와 석상이 세워졌습니다.
장보고가 이 사찰을 창건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 근거는 중앙의 서류에는 없습니다만
법화사라는 이름과 고려말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그리 추정한다 합니다.
이렇듯 법화사는 고대 한반도 불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찰이 폐허로 변해서 잡초만 무성할 때
이곳에 절집을 중창하신 중창주 안봉려관 스님과 안도월 스님의 공덕비와 대화주들의 기념비를 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오늘의 발길을 멈춥니다.
'제주이야기 > 절오백 당오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도동 우렝이 돗당 (0) | 2010.12.01 |
---|---|
도평동 대통밭당 (0) | 2010.12.01 |
흥룡사 (0) | 2010.11.03 |
하귀리 월영사 (0) | 2010.10.31 |
신당답사 - 한경면 저지리 본향 당멀 허릿당 (0) | 2010.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