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유수암리입니다.
해발 약 250m내외 높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입니다.
유수암, 거문덕이 그리고 개척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수암마을
공식적으로는 조선 초에 지방토호의 한 사람인 좌수 홍덕수가 식솔과 일가들이며 많은 노비들과 무리들을 이끌어 입향,
정주하여 마을의 형태를 갖추었다하고...
설화에서는 삼별초를 따라 온 어느 한 고승이 지금의 유수암 절동산 아래 맑은 샘을 발견하고
그 언덕 아래 조그만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하여 불사를 시작한 것이 이곳에 인적이 닿은 시초이고
수년 후에 항파두성이 함몰할 때 김통정 장군의 처 이화선이 수하를 데리고 유수암천이 흐르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양지 바른 곳에 토실을 짓고 살다가 명을 마쳤으므로 속칭 종신당이라 전해오며 이때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이 종신당터라고 하던 곳을 둘러보고
수령 450년이 넘었다는 높이 16m. 둘레 510cm의 팽나무를 보고
유수암물옆에 머문 다음
절동산으로 올라갑니다.
1970년대에 지금의 절동산이라는 곳 일대의 땅을 사서 운동장으로 기부하신 이훈석님의 송덕비입니다..
운동장한구석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 표식
무환자나무 1주와 팽나무 9주
무환자나무는 원래의 나무가 잘려진 후 새싹이 떠서 자란 것이고 원목의 밑동둘레는 3m이상이었다. 합니다.
지금나무의 밑동둘레는 ?
철조망에 가로막혀 접근할 수 없습니다.
팽나무는 모두 9주가 남아있고 가장 큰 나무는 키 16m 가슴높이 둘레 6m랍니다.
운동장옆 정수장
마을오방석중 가운데 자리. 솔동산
마을길을 북으로, 남으로,빙글 빙글 돌다가...
4.3성 동문자리표식까지 왔습니다.
거문덕이
원나라에서 제주일대에 마장을 운용할 때
지금의 궤물오름을 중심으로 형성된 목마장의 목자들을 집단으로 모여 살게 한 곳이 바로 거문덕이였으며,
유수암 본동 보다 약 100년 가까이 먼저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옛 지도와 탐라순력도를 보면 현재의 유수암리를 유수암촌으로
검은덕이를 黑德村, 감은덕촌(感恩德村), 거문덕촌(巨文德村)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아
거문덕이마을과 유수암은 두 개의 마을이었습니다만 1910년 전후 유수암본동과 거믄덕이마을은 금덕리로 통합되었습니다.
하지만 4.3때 소개나간 주민이 돌아오질 않아 지금은 텅 빈 마을이 되었고
1996년에 행정지명이 금덕리에서 유수암리로 바뀌었습니다.
거믄덕이마을 옛터..
개척단지입니다.
개척마을은 40여 년 전 새로이 형성된 개척단지이지만 그 당시 고생하시던 분들은 다 떠났고
지금은 목가적인 삶을 원하시는 분들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옛 가옥이 아직 서너채 남아있지만 다 허물어지기 직전이고....
도예, 그림, 다도 등에 관련 있으신 분들이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곳이라서 유수암리본동과는 꽤나 떨어져 있는데다 동질감도 없다하네요...
다 부서져 가는 옛 가옥과
이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요즘 새로 지었을 별장식주택 중 가까운 건물 각각 하나 찍고서 발길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