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4.3 유적지 역사기행 - 명월상동, 민벵듸공동묘지, 조수국민학교터

하늘타리. 2010. 10. 23. 22:37

 

제주 4.3 연구소장 안내로 서부지역 4.3 유적지 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소장님 글에 사진을 붙입니다.

 

명월상동 4·3성


명월상동 성터는 1948년 겨울을 옹포공장에서 보낸 명월 상동(고림동) 주민들과

상명, 금악 주민들이 1949년 봄 명월 상동에 향사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마을을 복구할 때 쌓았던 성의 일부이다.
당시 성 안에는 마을별로 10세대가 기거할 수 있도록 기다랗게 함바를 잇대어 짓고,

동쪽으로는 명월 상동, 북쪽으로는 금악, 그리고 남쪽으로는 상명 주민들이 사용했다 한다.
명월 상동을 재건한지 2년가량 지나자 상명 주민들은 고향 마을을 재건해 복귀했다.
이즈음 고림동 주민들은 금악 사람들과 같이 원래의 성 밖으로 다시 성을 쌓았다.
그때까지 살던 함바가 너무 좁아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름도 원래의 성을 안성이라 하고 새로 쌓은 바깥 성을 밧성이라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고림동에서는 특공대가 결성됐다.

금악 지경까지 밭일을 나가면서 경찰만으로는 경비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공대는 명월 상동과 금악 주민 중 20세 이상 젊은이 스무 명 정도로 결성됐다.

특공대는 경찰들과 같이 밭일 나가는 사람들 경비를 서기도 하고,

성에 보초서는 사람들을 위해 순찰을 돌기도 했다.

금악주민들은 고림동 생활 5년 만에 고향에 돌아갔다.
현재 고림동에는 안성이 밑폭 3m, 윗폭 2m, 길이 300m 정도 잘 남아 있어 보존대책이 필요하다.

 

안쪽에서 본 모습

 측면. 성의 넓이가 꽤 넓습니다.

바깥쪽에서 본 모습 

 

 

만벵듸 공동장지  


명월 상동 갯거리오름 서남쪽에는

1950년 음력 7월 7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된

민간인들을 매장한 만벵듸 공동장지가 있다.


같은 날 희생된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와는 다른 구덩이에서, 다른 시간에 학살된 만벵듸 공동장지의 희생자는

한국전쟁 직후 한림 및 무릉지서에 검속되었던 사람들이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주로 한림 지역의 우익인사에서부터

유족들 표현대로 농사밖에 모르던 농투성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 사람들이다.


현재 유족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이 사건의 희생자는 63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검속되기 시작했다.
검속은 희생된 전날(1950년 음 7월 7일, 양 8월 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이루어졌다.
이들의 구금 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였다.
만벵듸 희생자들은 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살됐다.

그 날, 몇 시간 후에는 큰 구덩이에서 백조일손 희생자들이 학살됐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백조일손 희생자들은 트럭이 중간에 고장 나는 바람에 한림지역 희생자보다 학살 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시신 수습은 1956년 3월 30일 이루어졌다.
일부 유족들이 모여 군인들 몰래 칠성판이며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 3시경에 트럭으로 섯알오름에 가서 수습해 왔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을 쉽게 구별했다고 한다.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는 것이다.

 

만벵듸 공동장지는 다행히 유족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유족들은 그 날, 매장을 하면서 서로 약속했다.
우리 앞으로 단 한 사람이 여기 벌초를 오더라도 메도, 술도, 벌초도 같이 하자고.
현재 묘역은 잘 정비되어 있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안에는 섯알오름 희생자 외에 원래 그 곳에 묻혔던 토지 주인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수국민학교 옛터

 

 

 


조수국민학교에서는 1948년 11월 22일 조수마을 주민들이  희생됐다.

이날 오전 9시께, 저지지서 경찰과 저지지서에 파견 나온 응원경찰로 구성된 경찰토벌대는 주민들을 조수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미리 잡아두었던 조수국민학교 교사 4명과 청년 3명 등 7명을 끌고 와 주민들 앞에서 공개 총살했다.

그 이유는 무장대가 조수리를 기습해 당시 저지지서장이었던 김문경의 동생을 살해하고 학교 등사판을 가지고 갔다는 황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소정(남, 03년 67세)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김문경(당시 저지지서 지서장)이 동생이 죽었어.

산에서 와서 아주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지.
그 뒷날 아침에는 저지지서에서 문경이가 경찰들과 토벌대를 데리고 와서 조수 사람들을 전부 모이라고 했어요.
그때 학교는 무기 방학 중인데 우리도 나오라고 하니까 갔죠.
조수리 사람들 다 모였어요.
선생님이었던 김창심을 (경찰이) 손을 붙들고 데려가요.

우리는 교실에 들어가고… 그런데 교실에서 보니까 와작착, 와작착 막 때리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무슨 일인고 하는데, 조금 있으니까 선생들 데리고 나오더니 운동장 서쪽으로 데려가요.

그리곤 곧 죽여 버린 겁니다.

김창심, 이성률, 양공옥, 조철남 해서 선생 네 명과 마을청년 조유경, 조기완, 김경욱 모두 일곱 명이예요.
죽일 줄은 몰랐어요.

운동장에 있다가 돌아앉으라고 하더니 그냥 사살해서 죽여버린거죠.
<왜 교사 네 분을 총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폭도들이 와서 사람을 죽이고 가면서 학교 등사판을 가지고 가버렸다고 해요.

이 등사판을 이용해서 삐라도 뿌리고 하니까 내통했다고 선생님들을 죽인 거죠.
<나머지 사람들은?>

청년 세 사람은 당시 조낙청년회(당시까지 조수와 낙천은 한마을이나 다름없이 모든 일을 같이 함, 조낙청년회는 조수낙천연합청년회를 지칭함)가

산에 간 김태일이네 하고 내통이 됐다고 해서 죽여 버린 거예요.
아주 잔인하게 죽였죠. 그리곤 그냥 가버렸죠.
<경찰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많이 왔지요. 토벌 대장이 현처묵이고, 문경이는 저지지서장.

경찰이 가버리자 동네사람들이 담가로 (시신들을) 매어서 일찬이네 밭 위로 가서 토롱해 주었지요.

임시로 묻어준 거죠.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묻어주었어요."
조수국민학교는 폐교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곶자왈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Johann Sebastian Bach  Concerto for two Violins and Orchestra in D minor, BWV1043 1악장 (Vivace)
David Oistrach, Violin / Igor Oistrach, Violin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 Eugene Goossens, Conductor

'제주이야기 > 한라산 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월리 찔레꽃 노래비 공원   (0) 2010.10.26
무명천 할머니  (0) 2010.10.26
해녀축제 - 그 고달픈 삶에 대한 잠시의 위로  (0) 2010.10.21
감산리 안덕계곡  (0) 2010.10.19
한남리 정씨열녀비  (0) 201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