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절오백 당오백

신당답사 - 한경면 고산리

하늘타리. 2010. 10. 20. 14:22

 

신도 바닷가를 걸어 한장동으로 들어갑니다.

 

 


서귀포시장이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네요. 


원래는 같은 대정현이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경계가 갈리었습니다.

 

돔베성창의 도대불 

그 뒤로 차귀도가 보입니다.
지실이, 장군바위, 죽도가 차귀도를 형성하고
그 앞 왼쪽에 와도의 발치가 보입니다.
 

고려 예종 때 제주에 유능한 인재의 출현을 막기위해 중국에서 보낸 고종달(호종단)이  지장샘수호신의 꾀에 속아 術書를 찢어버리고 돌아가는 길,

용머리바위를 삼등분해 놓고  배를 타고 이 섬앞을 지날 때

 한라산 신령이 보낸 매의 공격으로 배가 침몰하여 죽고말지요.

그의 돌아감을 막았다 하여 遮歸島라 불리운다 합니다.


당과 관련해서 사귀를 모시는 동네의 섬이라 해서 사귀도라 불리우던 것이 차귀도로 변음되었다는 글도 있습니다만...


마음에 드시는 쪽으로 선택하세요.

 

기록을 종합해 볼까요.
기원전 1만년∼6천년에 先主民들이 살던곳임은 발굴된 유물이 알려주고 있고..
고려 충렬왕 26년에 차귀현촌을 설치하였지만,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하여 한 동안 사람이 살지 않다가

고려말에 모동장에서 합적이 성을 쌓고 양마하던 곳이었으며 그 후 차귀진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원진 목사때  신두모리라 부르다가  당산이 있다해서 당산리라 개칭한 후

1971년  한림면 고산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한경면에 속해 있습니다.


용찬이굴입니다,


1930년대 이 마을에 좌용찬이라는 분이 살았는데

생선과 전복을 수집하여 이 해식동굴안에서 얼마기간 양식하며 크기도  키우고,

시기를 조절 일본에 수출함으로 큰돈을 벌었다 합니다.
그렇게 번 돈 중 일부를 마을을 위해 꽤 많이 희사하셨다 합니다.


차귀도 선왕할망이 계시는 자구내 갯그리 할망당입니다.  

  

자구내 개당이라고도 합니다.
당집을 만들고 그 안에 신상을 모셨습니다.

 

지전물색은 못걸게 하고 정해진 제물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당오름을 넘어  개당의 반대쪽 일주도로변으로 왔습니다.

 
당오름.

고산리와 용수리를 가르는 높이 148미터의 오름입니다.

사진 왼쪽 지점으로 돌아가서 올려다 보면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얹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을 삼반석이라 합니다. 이 삼반석이 닭볏 형체를 이루어 계관산(鷄冠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만

오름 아래 커다란 당이 있었던 연유로 당오름이라 불리웁니다.  

 
옛 차귀당 자리에 세워진 당오름 당목잇당입니다. 

 

옛 차귀당 터임을 알리고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습니다.

 

그 뒤에 당을 정비하는데 기금을 희사한 분의 공덕비와 당을 소개하는 문구가 적혀진 비석이 있습니다.

 

재작년에 왔을때와 옹벽은 그대로 인데 그 위에 벽돌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입혔습니다.

 

제단의 분위기도 무속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주의 민속신앙인 당은 육지의 서낭당 또는 미륵당과 비슷한 것이지
무속인의 굿당과 다른 것인데
이젠 굿당이 되었습니다.


젯상뒤에 못보던 비석이 있네요

 

고산본향남칠성대신

이분은 누구신가요?

 

육지 무교에서 모시는 칠성신이 행하는 일곱가지 모든것을 관장하는 신을 칠성대신이라 칭합니다.
그러니까 1성 天樞星, 2성 天璇星, 3성 天璣星,  4성 天權星, 5성 玉衡星, 6성 開陽星, 7성 搖光星이

행하는 괴강(魁罡)을 종합하여 관장하는 분이시지요.
제주의 안칠성, 밧칠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듯 합니다.

 

그 럼 여기 계시던
사해용신 법사용궁 축일본향 한집님은 어디로 가시었나요?

 

제주의 신당이 다니던 당궐도 없어지고

매인 심방도 없어지니 누군가 희사하시면서 정비후 다른 분을 모셔도 그것에 대한 합의가 없습니다.
어느날 보니 그리 되있는 식입니다.

 
애매한 심사로 당을 나와서  마을 안으로 들어갑니다.


고산 뷰티고등학교로 왔습니다.


미용쪽, 보다 우아하게 표현하면 토탈뷰티계열 특성화학교입니다.
1960년에 고산상교로 개교하여 중간에 관광정보고로 2008년에 뷰티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 공립화 기념비에 기록되어 있는 바처럼
1948년 그 혼란기에 마을주민의 힘으로 고등공민학교를 세운것이 효시가 됩니다.


1954년에 고산중학교를 개교하고
1969년에 고산상업고등학교를 개교합니다.
여기에 드는 재원 모두를 마을주민의 사재와 출향인사들의 의연금으로 이루어 졌다느것이 대단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학교가 커질수록 부담도 많아져서 1973년도에는 개인에게 학교운영권을 넘깁니다.
그것을 의결하던 마을회의에 참가한 주민들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을겁니다.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여건상으로 운영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공립학교로의 전환을 추진하였고
2003년에 공립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교육불모지에 사학에 터를 세웠던 이지역 선인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10월 '가을의 노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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